사료로 본 한국사분야별문화현대세계 속의 한국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86. 2002 월드컵 - 붉은 열정의 한 달

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의 6월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은 특별했다. 장애도, 차별도, 반목도, 질시도 없는 꿈같은 세상이었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병상의 중환자들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손에 땀을 쥐었고, 마침내 감동했다. 월드컵은 결코 ‘가진 사람들’이나 ‘힘센 사람들’의 잔치가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그늘진 곳에 깃든 소외된 사람들조차 외로움을 잊었고, 골고루 행복했다. 월드컵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붉은 6월의 한복판에서 한국인들은 꿈꾸어왔던 한국의 모습을 완성된 퍼즐처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2002 월드컵은 한국 스포츠 사상 최대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올림픽을 치렀고, 세게 10대 스포츠 강국의 하나로 분류될 만큼 국제 무대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월드컵만큼 한국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을 밝혀준 이벤트도 없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이벤트를 유치해 완벽하게 성공시킨 한국인의 자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W세대’가 뜨다

2002년 6월은 한국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낳았다. 연인원 2,100만 명을 동원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길거리 응원’과 월드컵 열기의 중심에는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까지의 ‘월드컵(W) 세대’가 있었다. 이전까지 입에 오르내리던 ‘4⋅19세대’ ‘6⋅3세대’ ‘386세대’의 배경에 정치 의식이 전제돼 있었다면, W세대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경제적 실용에 눈뜬 세대로 분류된다. 배낭⋅인터넷⋅휴대전화⋅생수병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들은 2002 월드컵에서 인터넷과 전광판 등을 매체로 삼아 전국의 광장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이들은 누가 권하거나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움직였다. 사회학자들은 W세대의 이러한 특징을 ‘개인주의에 기초한 수평적 결합’이라고 규정했다.

긍정의 메시지를 외치다

월드컵 세대는 자신감과 능동적인 삶의 자세로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보여줬다. 그들이 외친 긍정의 메시지와 외국, 특히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인을 억누르던 서양에 대한 공포감 내지 열등감을 털어내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확실히 주목할 만했다. W세대의 자신감은 ‘긍정’의 태도로 나타났다. 1970년대 ‘유신 반대’, 80년대 ‘독재 타도’, 90년대 ‘낙선 운동’, 최근의 ‘안티 운동’에서 보듯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뒤흔든 것은 ‘부정(否定)’의 명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긍정의 구호를 외쳤다.

레드 콤플렉스를 털어내다

또한 이들은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재발견했다. 2002 월드컵을 계기로 텔레비전 중계 화면 속의 국명은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W세대는 월드컵이란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자신들의 표현 양식으로 채택했다. 붉은색과 태극기를 이용한 이들의 다양한 패션은 사회 저변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레드 콤플렉스’와 엄숙주의의 금기를 털어냈다. 젊은이들은 한국팀이 경기하는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Red hot’이라고 표현했다. ‘빨갱이가 되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Be the Reds’라는 슬로건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조금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스타가 없는 대신 팀이 스타가 되다

6월의 기적은 월드컵 4강이라는 유례없는 성과로 집약된다. 세계적인 스타가 없는 한국팀이 4강에 진출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긴밀한 협력과 능률적인 조직 운영을 통해 1등 집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역시 성적은 중요했다. 한국이 2002년에도 이전에 출전했던 네 차례 월드컵에서처럼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면 ‘오! 필승 코리아’의 함성도, 수백만 붉은악마의 길거리 응원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4강 신화를 일군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 그 새로운 패러다임

히딩크는 한국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첫째, 기본에 충실하라.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양 발을 다 사용한다는, 우리조차 몰랐던 장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기본 중의 기본인 체력이 약하다고 진단하고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을 다그쳤다. 둘째,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히딩크는 연전 연패의 수모를 감수하며 강팀과의 경기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한국 팀에 경쟁력을 부여했다. 셋째, 스포츠는 경쟁이다.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도입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김병지, 고종수는 배제됐고, 이운재와 박지성이 일어섰다.

냄비가 식다?

축구 경기에서는 불리한 경기를 하고 있다가도 실점하지 않고 버티다 막판에 한 골만 넣으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축구와 다르다. 훨씬 더 냉혹하고 엄격하다. 한국 축구로서는 사실 월드컵 이후가 더 중요했다. 냄비는 월드컵이 끝난 뒤 1년 만에 싸늘하게 식었다. 월드컵 경기장은 세계적인 시설이지만 그곳을 메울 콘텐트가 빈약했다. 프로팀이 깃들었지만 관중석은 다시 썰렁해졌다. 주요 선수가 해외 무대로 진출하고 국가대표팀 경기에만 관중이 몰리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국내 리그가 위협받았다.

중앙일보,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86. 2002 월드컵 - 붉은 열정의 한 달

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의 6월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은 특별했다. 장애도, 차별도, 반목도, 질시도 없는 꿈같은 세상이었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병상의 중환자들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손에 땀을 쥐었고, 마침내 감동했다. 월드컵은 결코 ‘가진 사람들’이나 ‘힘센 사람들’의 잔치가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그늘진 곳에 깃든 소외된 사람들조차 외로움을 잊었고, 골고루 행복했다. 월드컵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붉은 6월의 한복판에서 한국인들은 꿈꾸어왔던 한국의 모습을 완성된 퍼즐처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2002 월드컵은 한국 스포츠 사상 최대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올림픽을 치렀고, 세게 10대 스포츠 강국의 하나로 분류될 만큼 국제 무대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월드컵만큼 한국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을 밝혀준 이벤트도 없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이벤트를 유치해 완벽하게 성공시킨 한국인의 자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W세대’가 뜨다

2002년 6월은 한국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낳았다. 연인원 2,100만 명을 동원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길거리 응원’과 월드컵 열기의 중심에는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까지의 ‘월드컵(W) 세대’가 있었다. 이전까지 입에 오르내리던 ‘4⋅19세대’ ‘6⋅3세대’ ‘386세대’의 배경에 정치 의식이 전제돼 있었다면, W세대는 정치적 이념보다는 경제적 실용에 눈뜬 세대로 분류된다. 배낭⋅인터넷⋅휴대전화⋅생수병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들은 2002 월드컵에서 인터넷과 전광판 등을 매체로 삼아 전국의 광장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이들은 누가 권하거나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움직였다. 사회학자들은 W세대의 이러한 특징을 ‘개인주의에 기초한 수평적 결합’이라고 규정했다.

긍정의 메시지를 외치다

월드컵 세대는 자신감과 능동적인 삶의 자세로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보여줬다. 그들이 외친 긍정의 메시지와 외국, 특히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인을 억누르던 서양에 대한 공포감 내지 열등감을 털어내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확실히 주목할 만했다. W세대의 자신감은 ‘긍정’의 태도로 나타났다. 1970년대 ‘유신 반대’, 80년대 ‘독재 타도’, 90년대 ‘낙선 운동’, 최근의 ‘안티 운동’에서 보듯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뒤흔든 것은 ‘부정(否定)’의 명제였다. 그러나 이들은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긍정의 구호를 외쳤다.

레드 콤플렉스를 털어내다

또한 이들은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재발견했다. 2002 월드컵을 계기로 텔레비전 중계 화면 속의 국명은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W세대는 월드컵이란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자신들의 표현 양식으로 채택했다. 붉은색과 태극기를 이용한 이들의 다양한 패션은 사회 저변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레드 콤플렉스’와 엄숙주의의 금기를 털어냈다. 젊은이들은 한국팀이 경기하는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Red hot’이라고 표현했다. ‘빨갱이가 되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Be the Reds’라는 슬로건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조금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스타가 없는 대신 팀이 스타가 되다

6월의 기적은 월드컵 4강이라는 유례없는 성과로 집약된다. 세계적인 스타가 없는 한국팀이 4강에 진출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긴밀한 협력과 능률적인 조직 운영을 통해 1등 집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역시 성적은 중요했다. 한국이 2002년에도 이전에 출전했던 네 차례 월드컵에서처럼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면 ‘오! 필승 코리아’의 함성도, 수백만 붉은악마의 길거리 응원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4강 신화를 일군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 그 새로운 패러다임

히딩크는 한국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첫째, 기본에 충실하라.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양 발을 다 사용한다는, 우리조차 몰랐던 장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기본 중의 기본인 체력이 약하다고 진단하고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을 다그쳤다. 둘째,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히딩크는 연전 연패의 수모를 감수하며 강팀과의 경기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한국 팀에 경쟁력을 부여했다. 셋째, 스포츠는 경쟁이다.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도입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김병지, 고종수는 배제됐고, 이운재와 박지성이 일어섰다.

냄비가 식다?

축구 경기에서는 불리한 경기를 하고 있다가도 실점하지 않고 버티다 막판에 한 골만 넣으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축구와 다르다. 훨씬 더 냉혹하고 엄격하다. 한국 축구로서는 사실 월드컵 이후가 더 중요했다. 냄비는 월드컵이 끝난 뒤 1년 만에 싸늘하게 식었다. 월드컵 경기장은 세계적인 시설이지만 그곳을 메울 콘텐트가 빈약했다. 프로팀이 깃들었지만 관중석은 다시 썰렁해졌다. 주요 선수가 해외 무대로 진출하고 국가대표팀 경기에만 관중이 몰리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국내 리그가 위협받았다.

중앙일보사, 『아! 대한민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이 사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 사회의 변모된 모습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였다. 일본은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를 준비해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고, 한국이 뒤늦게 유치를 표명하였다. 주앙 아벨란제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공개적으로 일본 지지를 표명했고, 아벨란제의 연임을 막기 위해 유럽은 자연스레 대한민국을 지지하게 되었다. 아벨란제 회장은 양국의 유치전이 과열되고 표 대결에서 일본의 승리가 불안해지자 공동 개최를 제안하였다. 그 뒤 투표권을 가진 FIFA 이사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2002년 월드컵은 공동 개최로 결정되었다.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일본 월드컵(Korea-Japan Worldcup)’으로 결정되었고, 개막전은 한국에서, 결승전은 일본에서 열기로 했다.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일 동안 한국과 일본의 도시 각각 10곳, 모두 20개 도시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우승은 브라질, 준우승은 독일이 차지했으며, 주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대회에서 각각 4위와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대한민국의 4위뿐 아니라 터키의 3위와 세네갈의 8강 진출, 그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아르헨티나⋅포르투갈⋅우루과이 등의 조기 탈락 등 이변이 생기기도 했다.

2002년 여름 한국은 월드컵 열기에 휩싸였다. ‘붉은 악마’ 응원단이 등장하고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하나가 되는 응원 문화를 선보였다. 일부에서 지나친 ‘애국주의’ 열기를 우려하는 가운데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룩하였다. 네덜란드 출신 국가 대표 감독 히딩크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박지성⋅이영표⋅김남일⋅설기현 등 축구 스타가 탄생하였다. 한국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뿐 아니라 머플러⋅티셔츠⋅응원가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2년 6월 13일, 한국이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의 열기로 달아올랐을 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지방 도로에서 길을 가던 여중생 신효순과 심미선이 미군 장갑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월드컵 축구 대회와 제16대 대통령 선거 열기에 묻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뒤 2002년 11월 초 광화문 앞에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대규모 촛불 시위가 열렸다. 촛불 시위는 평화적 시위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시위 문화로 자리 잡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열풍은 거리 응원이라는 응원 문화를 탄생시켰고, 그 뒤 촛불 시위가 새로운 사회적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시민들은 한일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을 펼쳤던 그 장소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을 추모하고,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를 열게 된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대한민국사』, 임영태, 들녘, 2008.

관련 사이트

대한축구협회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