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5. 가야의 건국 설화 읽기1) 김수로왕 신화의 전승과 성립

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 허황옥 관련 설화

〔사료 5-1-04〕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김수로왕 신화

(다) 건무(建武) 24년(48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궁중으로 뽑아 들여 왕비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로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였다.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문득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본래 모르는데 내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다고 여겨 관리들을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山神)에게 바쳤다. 그 외에 왕후를 모시고 온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각종 비단과 의복, 피륙과 금은 주옥,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의 궁전으로 들어왔다. 신하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왕후의 신하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였으며,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들었다.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 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느님을 뵈었는데, 하느님께서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서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그 말씀이 귓가에 쟁쟁할 뿐이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 남해)를 찾기도 하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나로서는 커다란 행복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공주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탔고, 공주의 신하 내외도 역시 말고삐를 나란히 하였다.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공주의 신하 내외와 노비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손님집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편안히 나누어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풍부하게 물건을 주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궁궐 안 창고에 두고 왕후가 네 계절에 쓸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수로왕비릉
출처: 문화재청

(라)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는 존귀한 직위의 칭호라 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외국에 알려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위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 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하였다. 신귀(神鬼)는 음을 바꾸지 않고 그 뜻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또 계림(鷄林:; 신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차례를 두었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나라 법과 한나라 제도에 의하여 나누어 정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으며,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다. 왕후의 내조의 공은 우임금의 왕후인 도산(塗山)이 하(夏)나라를 돕고, 요임금의 딸인 당원(唐媛)이 (순임금을 도와)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마) 후한의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냈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였으며, 붉은 기가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왕후가 데려온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지만, 그들 내외는 모두 1, 2년 후에 죽고 말았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손님집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항상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이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199년) 기묘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함이 왕후가 죽은 때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워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 묘(首陵王廟)라고 하였는데, 높이가 1장에 둘레가 300보에 이르렀다.

(바)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仇衡王)에 이르기까지 이 묘(廟)에 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을 기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니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 허황옥의 등장과 그 실체

(다)에서는 김수로의 왕비가 되는 허황옥 관련 설화이다. 김수로 신화는 뒤에 이어지는 허황옥 왕비 설화와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이 「가락국기」가 갖는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파사 석탑
출처: 문화재청

허황옥의 출신지로 나오는 아유타 국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설이 분분한 실정이다. 그 중 하나는 아유타 국을 인도 갠지스 강의 상류인 사라유 강가에 있던 고대 도시 국가인 아요디아(Ayodha) 왕국으로 보는 견해이다. 또한 설화에서 허 왕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 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 태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아유타 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分國)으로 보는 견해, 중국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여러 논의가 있지만, 아유타 국이 인도⋅태국⋅중국⋅일본의 어느 곳에 있었는지, 또 아유타 국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허황옥이 실제로 그곳에서 온 것인지 등등이 모두 불분명하다. 설사 허황옥 설화의 내용과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하더라도, 가야사 입장에서 보면 그 출신지 문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허황옥의 출신 국가나 그 문화가 가야의 역사 전개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황옥 문제는 과거 가야사 초기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흥미롭고 낭만적인 역사 이야기 정도로 만족해도 좋을 듯하다. 굳이 심각한 태도로 이 아유타 국 문제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일단 설화에 보이는 내용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은 찾아보도록 하자.

우선 공주의 이름이 허황옥 및 그의 결혼 후견인인 대신들의 이름이 신보(申輔), 조광(趙匡) 등 중국식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인도나 태국에서 곧바로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허 왕후는 배에 금은, 비단, 의보, 그릇 등의 물건들을 많이 싣고 왔다고 했는데, 다시 뒤에 “이를 중국 점포의 여러 물건”이라고 표현했으며, 짐을 싣고 왔던 배는 선원 15인에게 각기 쌀과 포목 등을 주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허 왕후는 통상적인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해상 무역로를 따라 가야 지역으로 들어온 세력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당시 가야 지역과 중국과의 교역은 중간에 낙랑 세력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허 왕후는 낙랑계 주민 혹은 중국 내륙의 교역 상인 세력과 연관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연관된 인도나 태국 지역의 아유타 국 출신이라는 설화는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물론 허 왕후의 출신이 인도 등 동남아 지역이 아니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혹시 실제 인도 출신이라 하더라도 한동안 중국 지역에 머물며 중국화된 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허 왕후 집단의 실제적 성격보다는 후대에 변형되었을 가능성이다. 아무래도 불교가 번성하였던 시기에 허 왕후의 신비한 성격을 부각하기 위하여 김수로 신화에다 불교적 신이성을 추가하였을 것이며, 대략 그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로 짐작된다.

한편 (라)는 건국 이후 가락국의 체제 정비를 이루는 과정, (마)는 허 왕후와 수로왕의 죽음 등이 기술되어 있다. (바)에서는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에서 구형왕에 이르기까지의 수로왕에 대한 숭배를 간략히 기술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바) 아래에도 문무왕 이후의 사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으나, 본 건국 신화의 내용에서는 생략하였다.

이렇게 보면 건국 신화로서의 모습은 (가)~(다)가 핵심이다. (라), (마) 역시 건국 이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건국 신화의 주요 부분이지만, (라), (마)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교적 관념이나 표현, 한문식 관직명 등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가)~(다) 부분과는 그 서술 방식에서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다) 부분과 (라), (마) 부분은 그 신화의 성립 혹은 완성 시기가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수로 신화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수로 신화가 실려 있는 「가락국기」의 성립 시기 등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전기 가야 연맹의 지역 범위
출처: 김태식 저,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 2002, 12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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