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이야기 고려사1. 고려 초기의 정치 이념3) 훈요십조 이야기

다. 훈요십조에는 어떤 이념이 담겨 있을까

훈요가 전 고려 시대를 통하여 쟁점이 되었던 정치⋅경제⋅사회의 여러 이슈들에 대한 정책적 판단의 근거로 활용되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치 사상적 측면에서 훈요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여기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앞의 글에서 (삼한) 일통 의식을 고려 왕조 성립기 정치 사상의 하나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는 옛 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하여 동일한 역사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또한 후삼국, 즉 천하를 통일했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천하가 하나로 되는 천자국(天子國) 체제를 지향하는 의식이라 정의한 바 있습니다. 결국 삼한 일통 의식은 정치적으로 옛 삼국의 영토를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 체제인 천자국(天子國) 체제를 형성하며, 문화적으로는 옛 삼국의 다양한 인적, 문화적 자원을 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했던 것입니다.

훈요는 문화와 사상에서 일통 의식의 지향성이 잘 담겨 있는 자료입니다. 통일신라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옛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용인하며, 그것의 공존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이념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다원주의 이념은 이질적인 요소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타협과 공존의 원칙을 지향하는 이념입니다. 옛 삼국의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존중하는 한편, 그것을 통합하여 고려 왕조 특유의 사상과 문화를 창조하려는 뜻이 훈요십조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훈요에서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사실이며,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료 1-3-13〕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제1조,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불교가 호위하는 힘의 도움을 받았다. 그 까닭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그 업(業)을 닦게 하였다. 뒷날 간신이 집권하여 승려들의 청탁을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것을 모두 금지하라.”

”제2조,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골라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내가 지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상하여 왕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뒷날 국왕(國王)⋅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하여 더 창건하면 커다란 근심이 된다. 신라 말에 절을 다투어 지어 지덕을 훼손하여 나라가 망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

제1조에서 태조는 고려 왕조가 불교의 힘으로 건국되었다고 하여 불교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태조가 제1조를 작성한 취지는 왕조 건국에 커다란 도움을 준 불교를 존숭하면서도, 뒷날 간신들이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데 있습니다.

태조의 그러한 생각은 제2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창건한 사원 외에는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라 멸망의 교훈을 들어, 사원 설치의 남발은 지덕을 훼손하여 왕조를 단명으로 이끌 수 있다고 염려한 것입니다.

훈요의 제1조와 제2조에서 나타난 태조 왕건의 생각은 뒷날 지배층이 승려들과 결탁하여 사원을 빼앗거나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하는 등의 불교 폐단에 대한 우려입니다. 이는 불교는 존숭하되 승려들의 정치 간여에 대한 경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 속에는 왕조 건국에 큰 역할을 한 불교 등 특정 종교와 사상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담겨 있습니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불교뿐만 아니라, 풍수지리 사상도 왕조 건국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5조가 그러합니다.

〔사료 1-3-14〕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제5조, 짐(朕)은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국왕은) 사중월(四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에 그곳에 가서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왕조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이 고려의 건국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1조에서 불교가 왕조 건국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과 같은 수준의 언급으로서, 당시 풍수지리 사상이 크게 존숭되고 유행했음을 알려 줍니다. 특히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므로, 국왕은 계절마다 서경에 순행하여 1백 일 이상 머물며 나라를 안정시키라고 했습니다. 풍수지리 사상으로 왕조의 안녕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태조는 불교와 함께 풍수지리 사상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제8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료 1-3-15〕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제8조,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의 산과 땅의 형세는 모두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 및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국가를 어지럽히거나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뒷부분 생략)”

태조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지세를 거론하면서, 왕조 건국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등용하지 않으려는 명분으로 풍수지리 사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8조 역시 당시 풍수지리 사상이 지배 이념으로 중시되었음을 보여 주는 예가 됩니다.

다음 제6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료 1-3-16〕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제6조, 짐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며,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뒷날 간신들이 이 행사를 줄이거나 더하는 것을 금하게 하라. 나는 처음부터 이들 행사 날에는 국기(國忌; 천자와 황후의 제사)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기로 맹세하였다.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하도록 하라.”

출처: 사이후쿠지 소장 고려 불화 ‘관경변상도’

부처를 섬기는 연등회팔관회를 반드시 행하고, 뒷날 간신들이 이 행사들을 가감(加減)하는 것을 금하게 했습니다. 불교 행사인 연등회가 중시된 것은 앞에서 확인한 바 있지만, 팔관회 행사를 중시한 점이 주목됩니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 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인 계율을 지키는 불교 행사에서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행해진 행사 내용을 보면 사선악부(四仙樂部), 즉 신라 화랑도 무리 가운데 가장 많은 문도를 거느렸던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 등 사선(四仙)이 등장함으로써, 신라 이래 전통 사상인 낭가(郎家)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행사 때 선왕에 대한 제사인 국기(國忌)를 범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행사 첫날 가장 먼저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 의식이 행해집니다. 천자를 자처했던 역대 고려 국왕에 대한 숭배는 제천 의례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팔관회를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팔관회는 삼국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조상 및 하늘의 신령에게 제사하는 도교 의식을 함께 계승한 것입니다. 제6조는 이같이 연등회와 같은 불교 의례는 물론 팔관회 행사를 통하여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와 함께 하늘과 산천의 여러 신들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및 민간 신앙 차원의 다양한 사상과 의례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사료 1-3-17〕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제10조, 가정과 국가를 가진 자는 근심이 없을 때 조심해야 한다. 널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여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도 (『서경』의) 「무일(無逸)」 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하였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붙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 보고 살피도록 하라.”

”제7조, 임금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신하의)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소하는 말을 멀리해야 한다. 간언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된다. 참언(讒言)은 꿀 같으나, (그것을) 믿지 않으면 저절로 그치게 된다. 또 때에 맞추어 백성을 부리고,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며,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면 저절로 민심을 얻게 되어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편안하게 된다. (뒷부분 생략)”

제10조에 따르면 국왕에게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 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통치의 요체는 제7조에 밝힌 바와 같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하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남을 헐뜯는 말을 멀리하고 간언을 들어야 하며,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백성을 때에 맞추어 부리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며,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 조항은 공통적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 나아가 유교에서 요구하는 인정(仁政), 즉 군주의 어진 정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료 1-3-18〕 『고려사』 권 2 태조 26년 4월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나라의 풍속을 사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의 제도를 모두 따랐다. 그러나 지역과 사람의 품성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은 금수와 같은 나라이다. 풍속도 다르고 언어 또한 다르다. 의관(衣冠) 제도를 본받지 말라.”

위 조항은 외래 문물의 수용에 대한 태조의 입장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외래 문화를 한족(漢族)의 중국 문화와 호족(胡族)의 거란 문화로 구분하고, 거란 문화에 대해서는 수용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당시 거란의 위협이라는 현실적인 정치 군사적인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뒷날 두 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가 해소되면서는 상당한 문물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외래 문물에 대한 태조의 입장은 중국 문화에 대한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태조는 중국과 고려는 땅과 인물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 문화와 반드시 같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즉 외래 문화의 수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같이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전통 문화를 지키면서 받아들이는, 선진 문물에 대한 주체적인 수용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외래 문화와 전통 문화를 서로 대립과 갈등이 아닌, 공존과 보완의 관계로 보려는 태조의 생각이 잘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조항 가운데 제3조는 왕위 계승에서 장자 계승의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장자가 불초할 경우 중의(衆議)에 따라 차자나 다른 형제에게 선양될 수 있음을 오히려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위 계승자에게 전하는 제9조는 문무백관의 녹봉은 나라의 재정 형편에 맞추어 정할 것이며, 공적이 없는 자에게는 관직을 내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거란의 위협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병졸에 대한 구휼과 함께, 무예가 출중한 자에게 벼슬을 내려 격려하도록 한 조항입니다. 이 조항들은 훈요가 후대 국왕들에게 왕조 경영의 원칙과 방향을 전수하는 동시에, 제3조와 같이 왕위 계승자에게는 국가 경영의 원칙을 보여 주는 태조의 ‘신서(信書)’라는 특성을 잘 보여 줍니다. 따라서 제3조는 앞의 조항들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편으로 훈요에 나타난 태조의 생각은 고려 왕조의 건국 과정을 통하여 체득된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고려 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지방 세력을 아우르며 건국됩니다. 그들은 신라 하대 이래 수십 년간 그들의 근거지에서 독자의 경제력과 군사력, 각종 의례를 바탕으로 영역 내의 주민들을 교화하고 독자 문화를 영위했던 소왕국의 군주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건국 후 고려 왕조는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의 협조를 통해 왕조를 통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방 사회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라는 통일 후에도 옛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정치와 문화를 고수함으로써 통합에 실패하였습니다.

고려 태조 현릉

삼한 일통 의식은 후삼국 통합 전쟁의 이념적 동력으로 후삼국 통합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삼국 통합 후 왕조 국가의 운영, 즉 통치 철학은 훈요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옛 고구려⋅백제⋅신라의 다양한 문화적, 인적 자원을 흡수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고유 문화를 인정하고 포용하여 새로운 왕조의 문화를 창조하려는 태조의 사상이 훈요에 잘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인정되어 공존하는 태조의 정책은, 통일신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서도 왕조 국가의 존속과 사회 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태조훈요를 통해 불교⋅유교⋅도교 및 민간 차원의 토착 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공존하는 정책을 천명합니다. 또한 외래의 선진 문물과 전통 문화를 대립과 갈등이 아닌 공존과 보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다원 사회를 지향하는 태조의 생각이 훈요 속에 잘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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