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2. 대한제국의 수립과정3)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상징화 작업

다. 대한제국의 국기와 국가 제정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자주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서 우선 국기와 국가 등 국가 상징물을 제정하려고 하였다. 국기와 국가는 또한 국민들에게 충군애국심을 일깨우는데 좋은 수단이 되었다.

〔사료 2-3-03〕『독립신문』, 논설 - 교육과 애국심 고양

“애국하는 것이 학문상의 큰 조목이라. 그러므로 외국서는 각 공립 학교에서 매일 아침에 학도들이 국기 앞에 모여 서서 국기를 대하여 경례를 하고 그 나라 임금의 사진을 대하여 경례를 하며 만세를 날마다 부르게 하는 것이 학교 규칙에 제일 긴요한 조목이요.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직무로 밤낮 배워 놓으면 그 마음이 아주 박혀 자란 후라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것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중해지리라. (중략) 국기가 곧 임금이요, 부모요, 형제요, 처자요, 전국 인민이라. 어찌 소중하고 공경할 물건이 아니리요. 우리 생각에는 조선 정부 학교들에서 국기를 학교 마당 앞에 하나씩 세워 매일 학도들이 그 국기 앞에 모여 경례하고, 애국가 하나를 지어 각 학교에서 이 노래를 아침마다 다른 공부하기 전에 여럿이 부르게 하고, 이런 노래는 학부에서 위원을 정하여 하나를 음율에 맞게 만들어 외국 사람을 청하여 몇 날 동안 교원들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 후 그 교원들이 자기 학교들에 돌아가 학도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학문상에 대단히 유익한 일이요.”

(출전 :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

사실 국기인 태극기는 이미 1882년 8월 박영효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부터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연구에서는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때 이미 태극팔괘도를 준비하였으나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할 때 8괘가 너무 복잡하므로 4괘로 간략화한 것을 국기로 하고, 태극팔괘기는 군주기로 사용하기로 조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1883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태극기가 사용되었다.

태극기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 도록
태극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 도록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는 푸른 나무로 홍예를 만들어서 국기로 좌우를 단장하였다. 1897년 8월 22일 고종 탄신일 때에는 서울 시민들이 각처에 국기를 많이 달았으며, 1899년 3월 19일 황태자 탄신일에도 각 관청과 민가에서 국기를 달았다. 그렇지만 아직 국기의 규격이 통일되지 않아 중추원에서는 3색, 경무청에서는 5색, 민가에서는 청, 백, 황색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1900년 12월에는 경부에서 각 상점에 국기의 규격을 통일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국가의 제정은 이보다 더 늦었다. 독립 협회나 각 학교 교회들은 행사에서 국가 대신 다양한 형태의 애국가, 무궁화가, 독립가, 계몽가, 진보가 등을 불렀다. 지은이도 다양하였는데, 국가의 제정이 대한제국 국민들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가사는 대개 황제에 대한 충성, 나라에 대한 사랑, 나라의 보전에 대한 기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료 2-3-04〕애국가 - 이용우

대죠션국 인민들아 이사위한 애국하세/충성으로 님군섬겨 평안시졀 향복하세

경사롭다 경사롭다 샹하업시 우리동포/강하가 맑다 해도 원원한 우리 마음

함끠 모도 군사되야 경텬위디 하여보세/젼신이 쇄분해도 나라 위해 영광되리

황하슈가 여침토록 해륙군을 봉츅하세/ 평생집심 여일하기 안팎없이 맹서하세

(출전 : 『독립신문』, 1896년 7월 7일)

〔사료 2-3-05〕무궁화 노래(1897)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텬이 도우샤/ 임금과 백셩이 한가지로/만만셰를 길거하야 태평독립을 하여 보세/만만셰를 길거하야 태평독립을 하여 보세

(출전 : 『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

〔사료 2-3-06〕무궁화 노래, 혹은 협성회 무궁화 노래

일. 셩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하세

이. 애국하는 열심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삼. 천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사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네

사. 우리나라 우리 황뎨 황천이 도우사/군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출전 : 『독립신문』 1899년 6월 29일)

무궁화 노래 악보

1902년 1월 고종은 “인심을 분발시키고 사기를 장려함으로써 충성하고 애국하게 하는 데에는 국가를 부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는 조칙을 내렸다. 당시 군악 교사로 와있던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가 작곡하였고, 한글과 로마자로 가사를 표기하여, 악보가 소책자로 국내외에 배포되었다.

〔사료 2-3-07〕대한제국 애국가 발문

“무릇 성악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서 언어와 문자로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군악이 있어온 지 퍽 오래다. 우리 황제폐하는 나라 다스리는 큰 일을 중흥하였고, 백 가지 유신을 하였으며, 더욱이 군대 행정에 힘을 쓰셨다. 군악에 대하여서도 각국 성악을 참고하여 신보를 엮도록 명하였고, 독일 교사 에케르트로 하여금 성률에 밝은 사람으로서 궁치(宮徵)를 심정(審定)하여 애국(愛國)의 노래에 올리게 하니 팔음(八音)이 잘 맞고 팔풍(八風)으로 행해지니라. 우리 군인이 그 노래를 부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소리가 장려한 즉 분연히 용감하게 나서는 적개심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 소리가 옹용(雍容)한 즉 힘써 행하고 대중들과 화합함을 생각하며, 모두가 용약(踊躍) 고무되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충애지심(忠愛之心)이 유연히 생각나게 될 것이다. 성악(聲樂)의 도(道)에는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

(출전 : 민영환, 「대한제국애국가 발문」1902년 7월 1일)

〔사료 2-3-08〕대한제국의 애국가(1902년)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해안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쌓으시고, 위권(威權)이 멀리 온 세계에 떨치사

오천 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출전 : 『황성신문』, 1904년 5월 13일)

[사료 설명 : 1904년 5월 13일 『황성신문』에 실린 <대한제국 애국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上帝 우리 皇帝를 도으소셔 萬壽無疆샤 海屋籌를 산갓치 으소셔 威權이 寰瀛에 치샤 於千萬歲에 福祿이 無窮케 소셔 上帝 우리 皇帝를 도으소셔”]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사료 2-3-09〕찬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뎨 십사(14)

일(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이(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삼(三) 가을하늘 공활한대 구름없이 높고/ 박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사(四)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출전 : 『찬미가』 윤치호 역술, 1905)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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