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1) 미국의 전후 대한 구상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

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 전후 정책의 산실

미국의 대외 정책 입안과 실행에 1차적 책임을 갖는 부서는 국무부이다. 국무 장관은 대외 정책의 입안⋅결정⋅집행에서 대통령의 공식 고문 역할을 하였다. 특히 2차 대전은 대외 정책에 관한 책임과 권한을 대통령과 국무부에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의회도 전시 초당 외교를 내걸고 루즈벨트 대통령과 행정부의 대외 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국무부 내에서의 대한 정책 주무 부서는 극동국(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이었는데, 한국의 외교적 사안 및 대한 정책의 결정⋅집행에 관한 실무 차원의 일을 전담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

그러나 전후 미국의 대외 정책 작성은 물론, 한반도 신탁 통치 구상과 관련해서도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국무부 실무 부서가 아니라, 2차 대전 발발 이후 미국 재계와 정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후 기획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선구적인 것은 미국 재계의 이해 관계를 대외 정책(對外政策)으로 정식화하는 기능을 맡았던 외교 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2차 대전 발발 이후에 만든 ‘전쟁과 평화 기획(‘War and Peace’ Project, 이하 기획)’이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국무부 내에 ‘전후 대외 정책에 관한 자문 위원회(The 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y, 이하 자문위)’가 구성되었고, 이곳은 이후 미국의 전후 세계 전략과 대외 정책을 구상하고 입안하는 중심이 되었다. 1)

헐 미 국무 장관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획’과 ‘자문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나의 전후 고문들(my post-war advisers)’이라는 애칭으로 명명하면서 미국의 전후 정책을 언제나 이들과 함께 협의하였다. 일반적으로 외교 협회는 미국 동부 권력층(Establishment)의 두뇌 집단(Think Tank)으로 간주되었고, 뉴욕의 금융 집단에 지배되고 있었다. 외교 협회는 낮은 대중적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거대 기업의 주도자 및 기업체 대표, 세계적인 학술 전문가들이 모여 대외 정책의 일반적 틀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였다. 또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시 외교에서 국무부를 무시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전후 기획에 관해서는 거의 협의회와 국무부 자문위에 의존하였다. 이 ‘전후 고문들’이 연합국 전시 회담에서 루즈벨트를 보좌하였으며, 유엔 창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마디로 ‘기획’과 ‘자문위’는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과 대외 정책의 산실로서, 전후 미국 중심의 신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외교 협회는 재계(財界)의 주도하에 민간(民間)⋅관계(官界)⋅군부(軍部)를 대표하는 두뇌 집단들을 모아 2차 대전 발발 2주 뒤 바로 ‘기획’에 들어갔다. ‘기획’에서는 미국의 전쟁 목표와 전후 세계 질서 수립 방안이 마련되었으며, 지역 문제의 해결 원칙이나 방안도 구체적으로 검토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교 협회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는 물론, 정부 내의 수많은 외교 협회 회원들의 협조와 지원을 받았다. 기획의 진정한 시금석은 ’이 연구가 정부에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에 있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를 통한 기획안의 실현성과 실제적 유용성이 논의의 최종 목표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국무부 내에 자문위가 설치되자 ‘기획’의 기능은 자문위에 그대로 흡수되었고, 외교 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전후의 대외 정책 기획 업무는 국무부의 방대한 정보 수집 능력과 조직을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더욱 확대⋅발전되었다. 자문위에 참여한 주요 인사 가운데 상당수가 외교 협회 측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이들이 자문위의 구성과 운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였음은 물론이다. 자문위는 전후 구상이 성숙됨에 따라 자신의 기본적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임무와 기능에 따라 분화되어 갔다.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1)한반도 신탁 통치 구상에 관한 종래의 연구들은 주로 미국 정부가 공간(公刊)한 FRUS의 정책 문서 및 전시 회담 기록, 전시 회담과 대소 교섭에 참여하였던 미국 측 인사들의 회고록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정책 결정의 배경이나 정치적 의도를 심층적으로 밝히기 위하여, 정책 구상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초기 기획 단계의 문서와 정책 결정의 경과를 알려 주는 내부 논의 자료를 주로 이용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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