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1) 미국의 전후 대한 구상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

라. 외교 협회와 자문위의 한반도 신탁 통치 구상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외교 협회와 자문위는 만주와 한반도 문제의 전후 해결 방향을 제시하였다. 만주는 정치적으로 중국에 귀속시키고, 한국은 궁극적으로 독립시키되 일정 기간 국제적 보호와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기본 내용이었다. 그것은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기존 정책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선 새로운 동북아 정책은 평화 시 미국이 이 지역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즉 남⋅북 태평양을 관통하는 공군력만 갖춘다면 미국이 동남아시아나 아시아 본토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종래와 같이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을 위한 현상 유지책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대신 모종의 지역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주국 지도
푸이

한국의 전후 처리는 주변 강대국 간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해결이 복잡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체적인 해결 방향은 만주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그 분리 방식에서 만주는 중국에 귀속시키기로 한 데 반하여 한국에 대해서는 국제 신탁 통치안을 예상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해당 지역의 전후 정세 변화에 대한 예측, 해당 지역에 대한 강대국 사이의 이해 관계, 해당 지역이 미국의 이해 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이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은 분명했지만, 이 지역에 새로운 지배 체제와 안보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주변 강대국과의 이해 관계 조절, 해당 지역 정치 세력과의 관계 조정 등 해결해야 할 현실적 문제들을 남겨 놓고 있었다.

위와 같은 해결 방향에 깔린 미국 측 의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중국 대륙과 부속지(대만 등)의 처리는 중국에 맡기되, 동남아시아 등 인접한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 둘째, 만주는 러시아와 일정한 타협이 필요할 것이나 중국에 귀속시킴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주변국 간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어느 한 강대국의 독주를 막고 미국 주도하의 지역 안보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 통치 구상은 바로 세 번째 의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은 국제 신탁 통치안의 첫째 가는 적용 사례로 간주되었지만, 신탁 통치안 자체는 외교 협회와 자문위에서 마련한 전후 동아시아 지역 문제 해결의 일반적 방침이었다. 외교 협회와 자문위는 1942년 중반 이후 국제 신탁 통치안을 다각도로 검토하였고, 이를 한국에 적용하기 위하여 세부 방안들을 마련하였다.

전후 식민지 문제의 해결 원칙으로 신탁 통치를 제시할 때 미국의 주된 고려 사항은 ① 전후 유럽 제국의 동아시아 지배를 방치할 것인가, ② 이 지역의 민중들이 각성하고 있고, 이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데 전후 연합국이 전쟁 발발 당시의 현상을 유지하려 한다면 불안정이 초래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미국은 민족주의가 고양되기 전후에 하나의 개방된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강대국 제국주의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탁 통치안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기구에 의한 관리 방안은, 구식민 모국(舊植民母國)의 반발을 최소화하여 이들과의 이해 관계를 조절해 내고, 식민지 민중들의 민족주의적 열기를 일정한 정도에서 개량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 밸브’로 간주되었다. 1) 즉 신탁 통치안은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는 조건에서, 미국 자본의 자유롭고 안전한 전세계적 경제 활동을 위한 장치이자 식민 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배 방식으로 고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정치범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 신탁 통치안을 적용할 때 참여할 중국⋅소련⋅영국의 반응을 미국이 예상한 부분이다. 중국은 국제 기구에 의한 신탁 통치를 열렬히 옹호하고 소련도 기꺼이 동의하고 있으며, 영국도 한국에 관해서는 별 문제 없다는 것이 국무부의 견해였다. 이미 1942년 중반 이전에 이 문제를 두고 관련국들 간에 어떤 형식으로든 교감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초기에 미국은 다른 강대국들의 동의를 낙관하였다.

자문위 정치 소위는 1942년 여름, 한국에 대하여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독립시키되 기간 중 연합국 공동 관리(국제 기구)에 의한 신탁 통치를 통하여 자치 능력을 배양시킨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자문위 정치 소위의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신탁 통치 적용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정치 소위는 동아시아에 적용할 신탁 통치안의 일반적 원칙과 목표를 가다듬었다. 신탁 통치 원리를 전세계 모든 식민지와 종속 지역에 새롭고 광범하게 적용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성원들이 만장일치의 견해를 보였으며, 이의 적용에 필요한 새로운 조직 형태나 세부적 실현 방안, 필요한 기회 비용 등은 다른 문제들과 관련하여 계속 논의를 진행하였다.

논의는 언제나 기존의 위임 통치 제도로는 식민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제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국제 관리 체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즉 전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고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런 전제하에 신탁 통치의 목표로 1) 영토 내 주민들의 정치적 성숙을 위해 원조할 것, 2) 이 지역의 원료를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관리할 것, 즉 어느 일국에 의한 일방적 독점을 방지하고, 미국 자본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정하였다.

요약하면 신탁 통치안은 구식민 모국들과의 이해 관계를 조정해 내고, 종속국 인민들의 민족 운동을 완화시켜 이 지역에서 미국 경제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방안으로, 애초부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또 이러한 전후 해결 방향으로 미국 여론을 이끌 수 있는 방안도 연구되었다. 한국 문제에 관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태평양상의 도서들(괌이나 솔로몬 군도, 오가사와라 열도, 대만 등)과 마찬가지로 안보적 요소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는 점이다.

〔사료 2-1-01〕 미국의 전후 구상에 나타난 국제 신탁 통치안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

한국과 사할린

한국이 해방 이후 곧바로 그들의 국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국제적인 공조나 후원(tutelage)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연관성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은 여기에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싶어할 수도 있다. 미국 또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이 느슨한 연방 형태가 된다면, 한국이 거기에 합류하는 것도 있을 법하다.

소련은 사할린에 대한 주요 권한을 가지려 할 것이다.

(출처: Notter File, P Minutes 20, 1942. 8. 1 중 “Korea and Sakhalin”)

극동 문제들

미국을 위한 기본 정책

위원회는 미국이 극동 인민들의 해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일반적 원칙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 원칙을 실시할 때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국제 신탁 통치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a) 해당 영토의 인민들이 정치적인 성숙을 얻는 것을 돕고, (b) 모든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대상 지역의 자원을 통제하기 위함.

(중략)

신탁 통치의 성격

다음의 국가들이 신탁 통치 계획에 포함되어야 한다. (a) 남쪽 지역에 대해서는 대영 제국,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같은 식민 통치 국가 외에도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이 포함되어야 하며, (b) 한국에 대해서는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c)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해서는 남쪽 지역의 신탁 통치 참여 국가에 프랑스가 추가되어야 한다.

행정 체계에 대한 두 가지 일반 계획이 제안되었다. 첫 번째는 국제적 감독하에 놓이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주권 국가들이 직접 행정을 담당하는 방안, 두 번째는 탁치 행정을 맡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해당 정부에 소속되기보다 국제 기구에 직속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전자가 바람직하게 느껴지지만 위임 통치 시스템과는 달리 인민들이 국제 기구에 직접 청원하는 것이 허가되어야 한다. 불만족스러운 관료를 제거하고 그들이 상업과 재정, 사법권과 교육에서 바람직한 기준을 준수하도록 요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행정부에서 현지 인물들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출처: Notter File, P Minutes 21, 1942. 8. 중 “Far Eastern Problems” 및 “Nature of Trusteeship”)

일단 이렇게 한반도 문제 처리의 대체적인 방침이 결정된 후 자문위 영토 소위는 1943년 5월 한국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일련의 문제점들, 즉 독립 실현 방안, 국내 정치 구조, 독립에 대한 주변 강대국의 태도, 경제 자립 전망, 영토와 국경선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정치 소위의 논의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요구와 처리 방침을 정식화하는 원칙적, 총론적 토론 단계에 해당한다면, 영토 소위의 논의는 한국 문제의 각론별 연구를 통하여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신탁 통치 구상과 견주어 보는 작업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영토 소위원회는 1943년 중반부터 한국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 즉 독립 실현 방안, 정치 구조, 경제 자립 전망, 영토와 국경선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은 신탁 통치안을 중심으로 한 미국 측의 한국 문제 해결 방안을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는 자리였다. 이후 미국 정부 내의 모든 대한 정책 논의는 이를 움직일 수 없는 전제로 해서 출발했으며, 일단 이러한 전제가 받아들여지자 이후의 모든 구체적 검토와 각론적 연구는 이 결론을 증명하고 보강하는 식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강대국 간의 논의도 본격화되었다.

영토 소위원회는 또 한국 문제에 대한 구체적 정보와 사실적 요소들을 평가하고, 이를 신탁 통치 구상과 견주어 보는 작업을 하였다. T319는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들, 특히 중국 관내와 미주 지역 운동 세력들의 동향을 점검하였으며 T317은 한국의 향후 경제적 발전 전망을 분석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보고자는 우선 한국이 1)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계속 남을 경우, 2) 한국의 즉시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한국이 경제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가질 경우, 3) 한국의 궁극적인 자유, 독립을 인정하나 국제 신탁하에 자립 정부 기간을 거친 뒤 독립할 경우 각각에 대하여 예상되는 사태 발전을 개관하였다. 보고자는 이러한 예측에 입각하여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즉시 독립할 경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경제 국유화 위험이 있고, 밑으로부터의 경제적 욕구 분출에 의한 위기가 예상되니 즉시 독립보다는 신탁 통치하에서 자유로운 외국 무역과 외국 자본의 접근을 용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맺었다.

영토 소위에서 작성한 문서들 중 한국 독립과 관련한 전반적 문제점들을 살피고 있는 ’T318, 한국: 국내 정치 구조’는 뒷날 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처리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문서는 종전 시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주되, 국제적 감독과 신탁 통치하에서의 제한된 자치 정부 시기를 거치는 이행기 이후 실제 독립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맺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문서에서 한국인의 자유⋅독립에 대한 권리와 자결권의 즉각적 행사, 양자를 분리시켜 이를 외교적 수사와 정책 논리로 공식화한 점이다. 2)

〔사료 2-1-02〕 미국이 구상한 전후 한국 문제 처리 원칙

Ⅸ. 경제적 대안과 결과(consequences)

1. 한국을 제국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일본이 보유하는 것

(중략)

많은 이윤을 내고 있는 정부 소유 회사들(1940년에 4억 1천 4백만 엔), 개인 기업, 그리고 반(半) 개인 기업을 통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개발은 착취를 목표로 한 의도된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일본 경제와 일본 투자가들만을 위한 십억 엔 이상의 상품이 계속 생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하여 한국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보다 일본 산업에 더욱 의존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략)

2. 경제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포함하는 한국 독립에 대한 공식 승인

이러한 대안은 주권과 자치 정부를 강제로 빼앗긴 이들에게 주권과 정부가 복구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급한 대서양 헌장의 조항을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신생 한국 정부는 일본이 운영하던 독점 기업이나 국영 철도, 다양한 광물 자원과 같은 수익성 높은 회사들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곧바로 ’모든 국가들이 …… 한국의 자원과 무역에 평등한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생산과 토지의 국유화에 대한 옹호자들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현재와 같은 생산을 계속해 낸다는 보장은 없다.

(중략)

3. 자유와 독립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국제 신탁 통치하의 자치 정부 기간을 거친 이후 독립을 승인하는 것

이 대안은 주된 목적은 한국의 발전을 정치⋅경제적으로 가능한 빨리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는 데 있다. 신탁 통치 기간 동안 이것은 한국에 대하여 전세계가, 그리고 전세계에 대하여 한국이 ’경제적 번영을 위하여 필요한 세계 무역과 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할 기구의 완성을 허용할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한국의 무역이 현재의 엔 블록에 대한 의존에서 세계 경제로의 의존으로 넘어감에 따라 발생할 문제들을 최소화할 것이다. 이는 또한 한국을 포함한 그 어떤 국가도 한국의 자원을 독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인데 이들 자원 중 일부, 예를 들면 마그네슘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출처: 「T317, 한국: 경제적 발전과 그 전망」 1943. 5. 25 중 “IX. Economic Alternatives and Consequences”)

Ⅵ. 대안과 결과들

대서양 헌장의 기초에 따라 한국은 독립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가장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국가 중의 하나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왔다. 미국은 적국 체류자에 대한 제한에서 미국 내 한국인들을 제외해 왔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의 선언처럼 독립을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 내의 독립을 위한 모든 활동을 억압해 왔다. 미국이나 중국에 있는 망명 그룹의 한인들은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구상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치 의식은 모국의 평균적인 한인들보다 훨씬 더 선진적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일본 식민 정책으로 한국인들은 자치 정부를 위한 훈련을 할 수 없었고, 정부 기관 내에서 경험을 쌓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독립 한국에 대한 국제적 감독이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의 제한된 기간 동안 한국 정무를 맡는 사실상의 행정부 역할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한국 독립에 대한 의구심은 무엇이 한국의 안녕과 극동에서의 영구적인 평화에 가장 기여할 수 있을지를 감안하여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공식 승인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 조치는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한국인들은 이를 대서양 헌장 3조의 실행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행동은 한국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정부를 지지하는 것에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관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그룹을 지원하는 것은 연합국의 다른 이들을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소련 정부는 중경의 후원 아래 세워진 한국인 정부를 승인하는 데 주저할 것이다.

극소수의 ‘정부’ 구성원들만이 이 방면에서 그들의 능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정무 경험을 가졌다. 사실상 그들 모두가 한국과 수십 년간 떨어져 있었다. 외국인 고문관들이 이러한 정부에 고용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조언이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이 없으며, 또한 그 정부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인정하는 정부라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이 승인으로 얻을 수 있는 즉각적인 결과에 관해서는, 혁명적인 움직임이 한국 내에 널리 퍼져 있다거나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밀접한 연락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 ‘정부’에 대한 승인이 반드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성공적인 반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2. 한국의 자유와 독립에 대해서는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 승인하고, 실제 한국의 독립은 감독이나 신탁 통치하의 제한적인 자치 정부 과도기 이후에 공식 승인(하는 방안)

만약 한국의 자유⋅독립에 대한 권리를 공식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당면한 미래 혹은 전쟁 종료 이전에 이루어진다면, 이는 분명히 한국인들에게 대서양 헌장의 원리가 한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확신시킬 것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 예를 들면 태국과 필리핀과 같은 지역에서 장래의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것이 어떤 특정 그룹을 한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미래의 책임에 대한 자각을 강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과도기를 위한 국제 신탁 통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어질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한국 인민을 준비시키는 책임의 한 몫을 미국이 맡도록 할 것이다.

이 해결책은 연합국이 종전 시기에 한국 인민들은 당면한 권리로서 반드시 자유와 독립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한다면, 아마도 더욱 손쉽게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한 법률상(de jure) 독립 승인의 문제는 1898년 쿠바와 관련된 유사한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던 선례를 따를 것이다. 쿠바의 특정 정부에 대한 승인을 피하기 위하여 그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쿠바 섬의 인민들은 당면한 권리로 반드시 자유와 독립을 가져야 한다.”

(중략)

c) 감독 위원회(Supervisory Council) 아래의 국제 행정 기구(International Administrative Authority): 이러한 계획하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법률상(de jure) 승인은 대서양 헌장의 3조를 시행하는 것이지만, 연합국 회원국이나 연합국 전체, 또는 국제 기구(international authority)가 한국의 어떤 특정 정치 그룹을 지원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 감독 위원회(International Supervisory Council)의 지휘하에 있는 국제 행정 기구(International Administrative Authority)는 연합국 회원국이나 국제 행정 기구에 참여하는 국가의 시민들로 구성될 것이다. (국제 행정 기구의) 요원들은 감독 위원회가 선택할 것이며, 그들이 시민으로 있는 개별 국가가 아닌 국제 기구를 대표할 것이다. 행정 기구는 감독 위원회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이며, 그 목적은 자치 정부를 위하여 한국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짧은 시일 내에 한국 인민들에게 ‘시민의 의무’에 대한 교육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개별 국가들 간의 한국 통제를 위한 경쟁을 제거하여 정권의 정치적 측면을 최소화할 것이다. 그것은 국제 행정 기구로 하여금 국제 기구에 걸맞은 기능과 함께 더욱 폭 넓은 대표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 기구의 어떤 한 구성원이 행정부의 성공적인 운영을 주도하지 않을 것이며, (운영의 책임은) 모두의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완전한 독립은 한국이 감독 위원회에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후에야 주어질 것이다. (국제) 행정 기구가 한국을 관리하는 데 가능한 최소한의 기한으로 할 것이라는 확고한 약속은 한국인들의 (국제) 행정 기구에 대한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감독 위원회는 (국제) 행정 기구의 지속 여부를 정기적으로 검토하도록 의무화해야 할 것이다.

(출처: 「T319 한국: 독립 문제」 1943. 5. 26 중 “VI. Alternatives and Consequences” (정용욱 편,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 1, 다락방, 1995, 413∼417쪽.))

1)1943년 5월 3일, 자문위 정치 소위원회 회의에서 나온 다음의 발언은 미국의 의도를 잘 보여 준다. “식민지 민중은 자치 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이들 지역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이는 세계 안보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 밸브가 없으면 보일러는 터져 버릴 것이다.”
2)’T316’에서 ’T319’에 이르는 영토 소위원회의 한국 관련 주요 문서들을 작성한 사람은 휴 보튼(Hugh Borton)이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사를 가르치던 교수 출신이다. 자문위에서 동아시아 문제에 관한 정책 구상을 실무적으로 주도하였으며, 동아시아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국무부에서 한국 문제를 담당하였다. ’T319’에서 그는 1898년 의회에서 쿠바에 대하여 법률상(de jure) 독립을 인정한 선례가 있었음을 근거로 들었다. 이 용어는 독립의 권리를 인정하고 일정 기간 자치를 허용하되, 주권과 통치권을 유보함을 의미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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