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1) 미국의 전후 대한 구상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

마. 미국 전후 정책 입안가들의 한반도 신탁 통치안에 담긴 전략적 고려 사항

1943년 가을 국무부 내에 ‘동아시아에 관한 국간 위원회’(局間委員會)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장기 계획에 참여하였던 기획자들과 국무부 각 부서의 실무 관리들 간의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일반적인 방침이 마련된 시점에서 이를 실무 관리들과 조율하고, 실무 관리들을 장기적 목표와 계획에 따라 이끄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 국간 위원회는 1944년 2∼4월에 한국에 관한 계획을 한층 발전시켰다. 1)

그 이전 시기와 달리 국간 위원회는 신탁 통치안이라는 상위안에 입각하여 이의 실현 경로와 방법들을 검토하였고, 군정(軍政)과 군사적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전후 해결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었고, 군사적 대비책에 대한 고려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국간 위원회는 군사적 점령과 군정에 대한 일반적 방침과 이를 적용할 때 필요한 고려 사항들을 점검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군부의 주요 기획 집단인 육군부 작전국(OPD, Operation and Planning Division)과 민정국(CAD, Civil Affairs Division)에서도 한국 민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는데, 이 국간 위원회에서 준비한 문서들이 지침서가 되었다. 국간 위원회가 추구했던 방향은 연합국 공동 점령과 공동 군정을 실시하는 것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후에 나타날 분할 점령안은 본격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이 무렵 전후 기획가들의 한국 관련 논의 내용은 ‘기획’의 「P-B81, 한국의 독립 정권 수립 문제」라는 비망록에 잘 정리되어 있다. ‘기획’ 정치 소위원회에서 1943년 12월에서 1944년 5월 사이에 몇 차례의 토론 끝에 작성된 이 비망록은, 완성되자마자 토론 요약과 함께 즉시 국무부로 전달되었다. 정치 소위는 해방 지역에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지침을 제출하려는 목적에서 몇 개의 대상 지역을 선정하여 연구를 진행하였고, 한국은 그 중 한 예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는 ‘① 점령에서 독립에 이르는 이행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② 해결책을 어떻게 미국 여론에 가장 잘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비망록과 토론의 내용 중 주목할 것은 먼저 해방에서 독립에 이르기까지의 경로 문제이다. 이 문서는 군정 실시 이전의 시기를 ① 혁명적 요소들이 적극 활성화되는 ‘진공기’, ② 일본 항복 이전 연합군의 한국 점령, 2) ③ 일본 항복 시 영토 이양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특히 진공기에 토착 혁명 세력이 야기하는 분규와 혼란이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하면서, 점령군의 임무는 진공기의 분규와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 놓았다. 연합국의 한반도 진주와 점령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여부인데, 이 보고서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여부와 관계 없이 소련에도 ‘한자리를 보장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군정 실시 이후의 시기는 다시 ① 군정, ② 연합국의 공동 민간 행정의 2단계로 나누고, 군정 단계에서는 적절한 군사적 보장 장치를 동반하며 한국군에 대한 훈련 조치가 포함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내용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 전략적 고려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군사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어느 한 강대국의 독점을 막고 4대국 협정에 의한 안전 보장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소련의 남진 저지가 1차적이고 일본 통제가 2차적인 목표였다. 이 점이 바로 미국이 지역 안보 차원에서 계속 4대국 협정에 의한 국제 신탁 통치를 주장하는 주된 이유였는데, 신탁 통치안 제기의 배경이나 정치적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문서는 점령으로부터 궁극적인 독립으로 나아가는 경로와 이에 필요한 수단과 방법 등을 비슷한 성격의 다른 어떤 문서보다 포괄적이고 알기 쉽게 규정하고 있다. 내용적 연관성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에 작성된 국무부 전후 기획 자료들을 폭 넓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 한국 문제 구상에서 잠정적인 지침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 2-1-03〕 미국의 전후 기획가들이 구상했던 한반도 점령 및 군정 계획

외교 관계 협의회(CFR) 정치 그룹

한국에서 독립 정권을 구성하는 문제

데이비드 로위(David N. Rowe)

(한국에 관한 카이로 선언 공동 성명의 본문: “언급된 세 강대국(중국, 영국, 미국)은 한국 인민들의 노예 상태에 유념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정했다.” 뉴욕 타임즈, 1943년 12월 2일)

현 전쟁의 결과로 한국의 독립을 회복시키는 것은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정치⋅문화적 공동체 가운데 하나를 재구성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인민들을 현존하는 가장 가혹한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일본에 의한 한국인과 한국 민족성에 대한 억제는 아주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와 또 다른 이유로 독립적인 새 한국 정부의 설립은 쉽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서둘러 시도할 문제가 아니다. 다음 지면에서 이 과정에 관한 주요 문제들의 일부가 토론됨으로써 이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이 제시될 것이다.

Ⅰ. 향후 전쟁의 추이가 한국에 독립을 가져다줄 강대국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본의 항복이 연합군에 의한 한국 점령에 선행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연합국이 후원하지 않는 한국인이나 체제가 성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에 의하여 실제로 한국이 점령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얻어 낼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 경우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연합군의 점령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 당국이 계속 한국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선 일본의 조건부 항복이 주변부(한국 등)에서의 행정적 혼란을 낳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현지 혁명적 그룹들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문제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이 가운데 그 어떤 그룹도 영구적인 정부를 위한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확히 연합국 중 누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되찾는 군 병력을 대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전에 언급할 수 없다. 지리적인 근거로만 놓고 본다면 한국에서의 군사 작전은 러시아가 중심이 될 것이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공격하기에 최상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병력이 한국을 점령하더라도, 연합군의 군정은 아마도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영국을 대표하는 공동의 것이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 가능성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극동 지역의 전쟁에 따른 자국 군대의 주둔 지역에 대한 보장을 받으려 할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러시아가 대일 선전 포고를 하더라도 이를 성취할 수 있다. (러시아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 가깝다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라도 러시아는 한국 군정에서 한자리가 부여될 수 있다. 이것은 최소한 러시아를 한국의 정치적 미래를 계획하는 데 중국, 영국,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 두게 할 것이다.

Ⅱ. 군사⋅전략적 고려가 한국에서 독립 정권을 세우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다른 아시아의 주 대륙 세력, 즉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만나는 지역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 세 강대국 간의 경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한반도에 강력한 군사력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한국에 연합국에 의한 강력한 군사적 수단이 처음부터 필요한 이유가 되며, 이는 어떤 한 강대국이 한국을 지배한 후에 군사 행동을 하는 도로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군사⋅전략적 시각에서, 연합국들이 한국의 보존을 위한 군사적 수단에 완전히 합의하기 전까지는 (한국 내에) 독립적인 정권이 출범해서는 안 된다. 이 (군사적) 수단들은 4대 강국에 의하여 우선 공동으로 합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결 방안이 중⋅소 경쟁의 부산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안전 보장책에 전면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중략)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1) 한국의 독립. 이는 그 어떤 강대국도 한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은 성취될 수 없다.

(2) 한국의 안보. 이는 처음에는 연합국의 합동 병력에 의하여 제공되어야 하는데, 어떤 한 강대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독립은 무효화될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조치가 한국에서 상당 기간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군사력이 얼마나 유지되어야 할지는 부분적으로 얼마나 빨리 한국인들이 자치 정부를 이루는가, 또 처음에는 다른 강대국에 비하여 보조적인 수준일 한국인들이 얼마나 빨리 자신들의 군사력을 키우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정치적 발전과도 관련이 있는데, 만약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 다른 시도(군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의미: 역주)를 위하여 노력한다면, 이에 대한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해독제는 일본 침략에 반대하는 자들이 지휘하는 극동의 적절한 군사력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강대국들의 군대 철수는 미래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기지를 한국 내에 둘 수 있게 하는 조약 여부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설에 대한 준비는 연합국 병력이 한국을 점령한 직후 바로 시작해야 한다. 이를 건설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보다 점령에 부수적인 조치로 바로 이루어지는 쪽이 손쉬울 것이다. 이러한 군사 기지들은 한국 점령 기간 동안 개선될 필요가 있는데, 전쟁 동안의 기술적 변화를 따라잡기 위한 것이다.

부활한 일본이 침략을 통하여 또 다시 한국 영토를 삼키기 전에, 한국이 필요로 하는 원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안보 체제 수립이 한국에서 연합군이 영구적으로 철수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중략)

Ⅲ. 독립된 한국의 정권을 구성하는 데 한국의 정치적 요인들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인들이 혁명적인 활동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일본 축출 후 한국인들이 곧바로 정부 기능을 빠르게 장악할 만큼 통일성이나 동질성을 갖추고 있다는 정당화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축출 직후 한국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제안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인들은 자유 선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들이 독립적인 자치 정부를 시도하려 한다면, 정치적 교육 기간을 거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실제 행정 경험을 가진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고유한 능력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일부 한국인들이 있지만, 그들 중 다수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한국인 혁명가들 중에 그 누구도 정부 운영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

만약 (한국의) 시기상조의 독립이 지금까지도 중국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중화 공화국 첫 25년의 정치⋅행정적 혼란과 같은 것을 초래한다면,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극동에도 불행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효과적인 군사적 준비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침략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러시아, 중국, 일본 사이의 전략적 위치는 강대국들이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한반도를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도로로 이용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Ⅳ. 한국 독립에 관하여 연합국은 어떤 합의를 해야 할까

첫 단계는 연합군에 의한 군정으로, 적절한 군사 안보 조치가 수반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한국군에 대한 훈련을 포함하여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한국이 자치 정부를 수립할 준비가 될 때까지 존재할, 연합국 특별 협정에 따른 공동 행정부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 행정부는 연합국 후원하에 수립되어야 하며, 연합국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고등 판무관이 그 수장이 될 것이다. 고등 판무관은 차순위 국가(second-rank power), 예를 들면 캐나다, 스웨덴, 또는 네덜란드의 재능 있는 국민이 합당할 것이다. 관료 조직을 운영할 인물은 연합국 내의 적당한 인물 중에서 뽑아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복수의 판무관, 아마도 5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수립하는 것인데 이는 지난 전쟁 이후의 사르 위원회(Saar valley Commission)와 비슷하다. 만약 이러한 위원회가 설립된다면 차순위 국가의 대표를 의장으로 임명하고, 다른 4명의 멤버는 각각 영국, 중국, 소련, 그리고 미국에서 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조직은 한국에 대한 4대 강국의 관심을 직접 반영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가질 것이다. 위원회는 강대국 간에 만연하는 통일성 또는 의견 충돌 상황을 반영하겠지만, 국제적 후원 아래 세워진 여타 다른 형태의 정부보다 그 상황이 더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한국의 궁극적인 자치 독립 정부를 재차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합국에 의하여 발효될 특별 협정에 10년으로 한정된 기간을 설정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전체 문제는 다시 재검토될 것이다. 만약 이 기간이 종료된 이후 정부를 한국인들에게 넘기고 그들에게 진정한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국제적으로 후원되는 행정부는 또 그만큼의 기간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에 대한 궁극적이고 완전한 독립에 대한 명백한 보장이 이 협정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출처: 대외 협회 자료, David N. Rowe, P-B81, “The Problem of Constituting an Independent Political Regime in Korea” 1944. 5. 28)

1)국간 위원회에는 영토 소위, 극동국, 유럽국, 독일과, 국제 안보 기구 소위 등, 국무부 내 거의 모든 관련 부서 요원들이 참석하였다. 극동국에서는 히스(Alger Hiss), 빈센트(Carter Vincent), 딕커버(Dickover), 베닝호프(Benninghof) 등이 참여하였다.
2)이 문서는 일본 상륙 이후 연합군의 한반도 점령, 일본 진공 이전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이라는 두 가능성을 모두 상정하였으나, 당시 군부의 전쟁 수행 전략을 반영하여 후자의 경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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