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2) 전시 연합국 회담과 신탁 통치안

가. 카이로⋅테헤란 회담과 신탁 통치안 원칙의 선언

카이로 선언 이전부터 미국의 정가와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한반도 국제 신탁 통치안이 흘러나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서양 헌장 1) 발표 이후 간헐적으로 전후 식민 지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을 내비쳤다. 루즈벨트는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국제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처칠의 대서양 헌장 최종안 수정본
영국 외상 이든

1942년에서 1943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후 기획 집단은 한국의 전후 처리에 관한 일반적 원칙과 세부적 문제점들에 관한 검토를 일단락 지었다. 미국 측은 상당 기간 지상 작업(紙上作業)과 정책 결정 집단의 토론을 통하여 다듬어진 한국의 전후 처리안을,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에서 전후 해결의 일반적 원칙으로 제기하여 다른 참여국들의 동의를 얻어 내려고 하였다.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위한 준비 모임에서 ’신탁 통치안의 가능성을 크게 강조하고 이를 모든 종류의 상황에 폭 넓게 적용해야 한다. 안보 관점에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국제 신탁하에 두어야 한다.’라는 점과 ’여러 가지 상이한 신탁 통치안을 식민지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그의 참모들 앞에서 강조하였다. 미국은 적어도 초기 구상 단계에서는 신탁 통치안을 식민 종속 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것을 원칙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카이로 회담 이전에 루즈벨트는 관리들에게 중국은 현재나 미래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소외시킬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요소이므로 어떻게 하든지 영국과 소련을 설복시켜 중국의 참여를 보장받으라고 지시하였다. 루즈벨트는 당시만 해도 2등 국가였던 중국을 강대국 회의에 참여시킴으로써 그의 중국 중시 정책을 내비쳤다. 그러나 4대국을 한자리에 모으려는 루즈벨트의 기도는 실패하였고, 결국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이라는 2개의 3개국 회담으로 성사되었다.

1943년 11월 23일 카이로 회담에서 결정된 한국의 장래에 관한 결의,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문안은 앞의 ’T318’의 결론에 나타난 취지를 사실상 그대로 관철시킨 것이다. 루즈벨트는 뒤이어 테헤란에서 스탈린과 회담할 때 카이로 회담의 한국에 관한 결정 사항에 대하여 물었고, 스탈린은 “한국은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루즈벨트는 이후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의 1944년 1월 12일 회의에서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 통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고 전했다. 2) 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에 명시된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구절은 미국이 제기한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연합국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되어 나온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카이로 회담

〔사료 2-2-01〕 카이로 선언

카이로 선언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 그리고 처칠 수상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1943년 12월 1일자 발표됨.

(3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미래의 군사 작전에 대해서, 몇몇 군사 임무에 합의하였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그들의 잔인한 적들에 대하여 해상, 육지, 공중으로 끊임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압박을 이미 증가시키고 있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이익을 탐내지 않으며, 영토 확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1차 세계 대전 시작 이래 장악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섬들을 일본으로부터 떼어 내고, 일본이 중국인들로부터 훔쳐 온 영토들, 예를 들면 만주, 대만, 펑후 군도 등을 중국에 반환하는 것이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얻은 다른 모든 영토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위대한 강대국들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출처 : “The Cairo Declaration,” Handbook of Far Eastern Conference Discussions)

테헤란 회담

〔사료 2-2-02〕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논의한 ’한국의 미래‘ 요약 D-7

3. 한국의 미래 지위

1943년 11월 30일 세 강대국 오찬 회동에서, (처칠) 수상은 스탈린 원수에게 당시 제안된 카이로 선언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독립할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원수는 그가 (카이로 선언을) 읽어 보았고,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것은 옳다.”라고 대답하였다.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의 1944년 1월 12일 회의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인들은 아직 독립된 정부를 운영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40년의 후원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스탈린이 동의했다고 보고하였다.

(출처 : “The Future Status of Korea”, Handbook of Far Eastern Conference Discussions (1949. 11))

1)1941년 8월 14일, 대서양 회담을 마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이 밝힌 8개 항목의 전후 세계 구상을 말한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고, 1942년 1월 1일에 이 헌장이 연합국 공동 선언에 들어감으로써 이것은 연합국의 전쟁 목적을 나타내게 되었다. 헌장에는 ‘피침략국의 주권과 자치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2)태평양 전쟁 위원회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는 연합국 간 협조를 위하여 1942년 3월 30일 구성되었고, 1944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의장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이 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전쟁 노력을 설명하였고, 전쟁 관련 문제들에 관하여 각국의 입장을 들었다. 자문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결정권은 없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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