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2) 전시 연합국 회담과 신탁 통치안

나. 얄타 회담과 연합국의 한반도 점령 및 시정 방안 논의

신탁 통치 구상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이 대한 정책 결정 집단 내부에 자리잡음으로써 미국의 전후 대한 정책 구상은 완숙 단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5년 들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점차 미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대일 군사 작전과 관련하여 보다 현실적인 기초 위에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적용될 국제 신탁 통치안은 정치적 독립과 군사적 안보를 내용적으로 분리하였고, 군사 안보적 측면이 1차적인 고려 사항이었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한국의 전후 처리안이 주변 강대국과의 이해 관계 조정을 전제로 하였던만큼 전후 이 지역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어떻게 미국 측에 유리하게 조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하였다.

미 국무부는 얄타 회담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국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국무부 정책 기획 위원회(Policy and Planning Committee) 한국 소위원회는 국제 정치적 문제⋅안보 문제⋅독립 능력의 각 측면을 검토하였는데, 여기에서 작성된 보고서들은 얄타 회담을 위하여 국무부에서 작성한 요약 보고서의 근간이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점령과 군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 사항들을 점검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이 단계에서도 군사적 점령이나 군정 모두 연합국의 공동 점령⋅공동 관리를 지향하였으며 군사 기지도 4강 관리를 선호하였다.

얄타 회담 준비 과정에서 마련된 미국 측 입장은 아래의 요약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사료 2-2-03〕 얄타 회담 준비 과정에서 미국의 대한 정책 요약

한국 문제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한국에서 군사 작전을 마침과 더불어 ① 가능한 한 한국의 점령군과 군정에 연합국 대표를 두어야 한다. ② 그러한 대표는 한국의 장래 지위에 실질적 이해 관계를 가지는 국가들인 미국⋅영국⋅중국⋅소련(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③ 다른 국가들의 대표권은 미국의 비례적 힘을 그 영향력이 약화될 정도까지 감소시킬 만큼 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무부의 견해이다.

(출처: FRUS, Conference at Malta and Yalta, 358∼359쪽.)

위의 요약 보고서는 한국에 관한 그 이전 단계의 전후 구상을 그대로 반영하였고, 그 과정에서 마련된 전후 해결책을 집약하였다. 이 문서는 연합국이 대일전 종전을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시점에서 미국이 한국의 전후 처리를 선도했고, 또 주도했음을 보여 준다. 얄타 회담에서 미국은 카이로 선언의 추상적 원칙 천명에서 더 나아가 두 가지 사항, 즉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 점령⋅공동 시정 방침과 함께 미국의 주도성을 다른 강대국들로부터 확약받고자 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일정에 오른 시점에서 1) 한국에 대한 소련의 지리적 근접성과 강력한 지상군의 존재는, 미국 측에서 볼 때 전후 이 지역의 상황을 불투명하게 하거나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얄타에서도 한국에 관한 구체적인 협정은 없었고, 신탁 통치안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구두 동의를 얻었을 뿐이었다.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20~30년간의 신탁 통치를 언급하였으며 스탈린은 이에 대하여 그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스탈린은 외국군이 한국에 주둔하는지 여부를 물어 루즈벨트로부터 이에 대하여 부정적이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얄타 회담
스탈린

얄타 회담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이 회담을 전후하여 미국 군부의 군사 전략적 고려가 미국의 대한 정책 준비에서 점차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군부도 원칙적으로는 한반도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평가하는 데 위의 ‘전후 기획’ 기획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요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방법이었다. 1945년 전반기에 군부 기획가들은 일본과 그 점령지에 대한 평화적 점령 계획을 발전시켰는데, 2) 이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들은 한반도에 대한 미 군부의 군사적 목표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예상했던 정책 수단을 잘 보여 준다. 이 무렵 미 군부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목표를 관철시키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초기 점령 지역의 선정이나 점령 방식의 안출에 노력하였다.

군부도 전후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기본 정책 목표와 이해 관계 관철을 위하여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만주 문제의 해결을 꼽았다. 그리고 소련의 만주 점령(한국이나 북중국 일부까지 포함할 것으로 예상) 또는 소련의 힘과 북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결합은 전체 동북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가져올 것이며, 이는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미 군부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중국의 통합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소련과의 합의를 중시했다. 미 군부는 어떻게 해서든 소련이 중국 문제 해결을 위하여 공동 보조를 취하도록 만들었고, 반대 급부로 만주에 대한 소련의 이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스팀슨 전쟁부 장관

한편 미 군부는 일본을 환태평양 공로(環太平洋空路, Great Circle Air Route)의 일환으로 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적 안보를 위해 필수적인 전략 지역으로 파악하였고, 따라서 미국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다른 서태평양상의 군사 기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평가하였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목표나 전후 이 지역의 군사력 배치와 지역 관계로 볼 때 중국이나 만주, 일본에 대한 이익선(利益線)의 분할과 관철 방법은 처음부터 비교적 뚜렷하였으나, 한반도의 처리는 다소 복잡하였다. 이에 대한 군부의 처방은 ‘한반도에서 우리의 책임과 권한은 압도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명목상의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와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술적 기회 비용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고, 이후에도 이 양자의 조율은 군부의 대한 군사 전략 기획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주목할 것은 여기에서 한반도 몇몇 지역을 우선 점령 지역으로 분류하여 조기에 점령할 것을 군부가 제안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종전 시점의 군사적 상황이 그 지역의 정치적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하에 ‘어떤 지역이든지 장악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있는 지역은 조기에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미군의 통제하에 둘 것’을 계획하였다. 즉 적대 행위가 종식된 시점에서 미국의 지위는 어떤 지역에서는 지배적일 테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게 될 것임을 익히 예상함에 따라, 전후 목표를 지역적 차이와 미국의 군사적 역량에 따라 개별적으로 검토하고 대응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군부는 종전 직후의 초기 목표와 장기적인 정치적 목표를 분리하고, 잠재적 위험이 될 전략 지점은 조기에 확보한다는 방침을 수립하였다.

한반도에서 첫 번째 우선 점령 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주요 항만 시설과 해군 기지가 있는 부산⋅진해 지역, 한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서울과 그 관문이자 서해안의 주요 항구인 인천, 한국과 만주의 주요 접경 지역인 항구 도시 청진⋅나진이었다. 이 가운데 미군이 확보해야 할 지역으로는 부산⋅진해 지역과 서울 지역을 꼽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군부가 이 시점에서 점령 방식으로 지역 분할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즉 변형된 지역 분할 방식을 초기 단계에 적용하고, 이 단계의 관리 기구로 오스트리아형 모델을 제시하였다. 3)

변형된 지역 분할(zonal administration)은 독일의 예와 같은 국가 간 엄격한 지역 분할과 달리 국경 장벽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4) 이것은 국무부가 구상한 연합국 공동 점령과 공동 관리 방식을 실질적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분할 점령안도 신탁 통치안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군부는 이후 전개될 한반도 주변의 군사 정황을 예측하면서 신탁 통치 실시 이전 단계의 점령 방식과 군정 실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혔던 것이다.

미 군부가 지역 분할 점령 방식을 택한 이유는, 국무부가 상정했던 공동 점령과 공동 관리에 따라 통일된 중앙 통제를 택할 경우, 동북아시아 지역에 막강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이 미국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고, 따라서 미국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소련에 비하여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군부는 초기 점령 단계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판단하였고, 전략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분할 점령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소가 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것은 일본이 미국의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항복했기 때문에 미국 측 관련자들에 의하여 긴급히 결정되었을지 몰라도, 분할 결정에 반영된 군사 전략적 고려는 이른 시기부터 군부 기획자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셈이다.

다음으로 이 시기 군부 기획안에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미국의 목표를 관철시키는 수단의 문제이다. 전후 한반도에서 군사상 우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정 때문에 군부는 어떻게 해서든 사전에 연합국 간 협정을 통하여, 즉 정치적 해결을 통하여 이 지역의 전략 지역을 확보하도록 강조하였다. 얄타 회담을 준비하면서 제출된 아래 문서는 이 시기 군부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사료 2-2-04〕 얄타 회담과 관련한 미 군부의 입장

일본에서의 상황과 달리 미국은 한국 문제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위치를 연합국 간의 협정에 의하여 확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정적 시점에서 지상군은 소련군이나 중국 공산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카이로 선언의 조항을 준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 문제는 미국에게 원칙상으로나 미래 전략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미국은 4강에 의한 신탁 통치가 종전 후 즉시 수립될 것이라는 사전 협정을 얻어 내야만 한다.

(출처: ’Occupation and Control of Japan in the Post-Defeat Period‘ 1945. 2. 16 및 ‘Tab “B” Control Machinery-Korea’)

〔사료 2-2-05〕 얄타에서 논의된 한국 문제

3. 한국

대통령은 1945년 2월 8일 스탈린 원수와의 대화에서 신탁 통치 문제를 꺼냈다. 대통령은 그가 한국을 위한 소련, 미국, 그리고 중국 대표로 구성된 3대 강국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필리핀의 경우 인민들이 자치 정부를 준비하는 데 50년 가량 걸렸음을 지적하였다. 한국에 대하여 대통령은 신탁 통치 기간은 아마도 20년에서 30년일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 원수는 기간이 짧을수록 좋으며, 외국군이 한국에 주둔할 것인지를 물었다. 대통령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스탈린 원수는 동의하였다.

대통령은 그러고 나서 한국에 대하여 민감한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을 한국 신탁 통치에 참가시킬 필요는 없다고 느끼지만, 영국이 배제될 경우 스탈린의 생각으로는 영국이 분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 원수는 영국이 “아마도 분명히 기분이 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은 (처칠) 수상이 “사실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그의 생각으로는 영국이 초청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Doc. E, p. E-24)

(출처: “Korea,” Handbook of Far Eastern Conference Discussions)

〔사료 2-2-06〕 지역 분할 점령 방식에 따라 미⋅영⋅중⋅소에 의한 한반도의 4분할 점령을 예상한 미국의 한반도 점령 계획안 지도

(출처 : ’Occupation and Control of Japan in the Post-Defeat Period, Tab “C” Areas of Occupation-Japan and Japanese held Territory‘ 1945. 2. 16)

〔사료 2-2-07〕 미군이 구상한 한반도의 우선 점령 지역 지도

(출처 : Joint Intelligence Staff, ’JIS 144/3 Occupation of Strategic Positions upon Japanese Withdrawal, Collapse, or Surrender‘ 1945. 5. 8)

1)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종결된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2)1945년 전반기에 미 군부는 신탁 통치 구상에 맞추어 초기에 점령해야 할 지역과 점령군의 구성, 점령 방식, 군정 및 민정 기구의 구성과 운영 등에 대한 세부안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3)지역 분할 점령 방식에 따라 미⋅영⋅중⋅소에 의한 한반도의 4분할 점령도 예상하였다.
4)이에 비하여 미국이 지배적 지위를 점하리라고 예상되는 일본에서는 군대나 지역을 통합된 중앙 통제 방식에 따라 관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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