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대한 정책과 신탁 통치안2) 전시 연합국 회담과 신탁 통치안

다. 포츠담 회담에서 분할 점령까지

위와 같은 미국 군부의 견해는 포츠담 회담 준비 과정에서도 반복되었다. 군부는 회담을 준비하면서 대한 정책 구상에 대하여 ‘카이로 선언을 군대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이것은 한국 문제의 전후 처리 또는 소련에 대한 견제 모두 군사적 압력보다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군부의 견해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반도 분할 점령을 위한 소련과의 사전 조정은 미군의 일본 직접 침공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더욱 절실해졌다. 1945년 들어 군부는 대일전 종결을 위한 막바지 전략 수립에 골몰하였다. 미국은 일본 진공 방향으로 초기에는 아시아 대륙을 통한 침공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전력상 우위가 확실해지고, 신속 기동 항공 모함 전단, 장거리 중폭격기의 개발 등 군사 기술적 우위가 보장되자 1943년 말, 대일 진공로를 태평양을 관통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대일전 종결 방침으로 예상되었던 ‘봉쇄 → 폭격 → 일본 열도 침공’ 중 대안으로 상정되었던 직접 침공이, 조속한 종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방침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1)

일본 직접 침공을 통한 대일전 종결 전략이 의미하는 것은 소련군의 대일전 참여와 이들에 의한 만주, 중국의 일본군 견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종결 전략에 따라 얄타와 포츠담에서 소련의 참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군의 참전을 이용한 효과적인 대일전 수행과, 전후 소련의 영향력을 이 지역에서 차단하는 것을 조화시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미국 입장에서는 동유럽과 같이 점령 지역의 정치적 향배가 소련과 그 지역의 급진 세력들에 좌우됨으로써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미국은 사전 협약을 통하여 전후 이 지역에서 양국의 이익선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전후 처리에 관해 얄타 회담에서 구체적 협정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 사망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은 다시 한번 소련으로부터 확약을 받고자 시도했다. 트루먼은 5월 말 홉킨스(Harry L. Hopkins)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하여 한반도 신탁 통치에 대한 소련의 지지를 요청했고, 스탈린은 동의를 표하였다.

트루먼 대통령
해리 L. 홉킨스

포츠담에서도 미국은 한반도의 전후 처리에 관하여 소련과 구체적이고도 성문화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2) 미국 측은 한국에 국제 신탁 통치안을 적용하되,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 지역은 조기 점령으로 이를 확보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국무부나 군부 모두 소련과 사전 협정을 강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군부는 전략 지역의 점령당사자를 사전에 결정할 것을 강조했으나, 포츠담에서 합의된 것은 미⋅소 양국 해⋅공군 군사 작전 구역의 설정뿐이었다.

포츠담 회담
애틀리, 트루먼, 스탈린

포츠담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45년 7월 25일 트루먼은 예상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할 경우에 대비하여 점령 계획을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군부는 맥아더가 작성 중이던 일본 점령 계획안(작전명 블랙 리스트)과 이전의 논의를 토대로 보고서를 준비하였다. 이 보고서는 초기에 점령해야 할 전략 지역으로 부산과 서울을 꼽았다. 미 군부는 정치적 필요에 따르건대 동경(東京) 점령 이후 이 지역들을 바로 다음 목표물로 하여,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사단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맥아더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미국은 서둘러 자신의 이익선을 가능한 북쪽에서 확보하고자 하였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일본 항복이 확실해진 8월 11일, 소련보다 먼저 진주할 수 있다면 서울과 중국의 대련(大連) 항을 점령하도록 군부에 지시했다. 대련 항은 산동(山東) 반도의 끝에 있는 전략 지역으로 북위 39도선 이남에 있었다. 얄타 회담에서 미⋅영⋅소는 이 항구를 소련이 ‘지배적 이해 관계’를 가지는 항구로 규정하였고, 소련이 보호해야 한다고 합의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은 일본군 항복 접수 지역을 논의하면서 가급적 ‘한국과 만주의 공업 지대’를 신속하고도 많이 점령하고 싶어했다. 트루먼의 지시는 미국 측 병력 전개상의 애로로 분할 점령선이 북위 38도선으로 확정됨으로써 3) 수정되었지만 소련군의 대일 선전 포고 이후 계속되는 소련군의 남진 소식은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 군사 지도자들과 미군 태평양 사령부를 긴장시켰다. 4)

나가사키 원폭 투하

트루먼의 의도는 극동 지역에서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게 될 부대와 국가들을 명시한 일반 명령 제1호에 반영되었고, 군부는 이전에 기획한 점령 계획안의 연장선상에서 점령 계획을 수립하였다. 미 군부의 점령 계획안 마련 과정에 나타나듯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현실적인 군사력 배치상의 애로, 소련의 대응을 조화시키는 문제야말로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미국이 부딪쳤던 가장 큰 난관이었다. 일단 소련이 일반 명령 1호를 받아들이자 미국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하지 중장 휘하의 미 육군 24군단을 38도선 이남 지역의 점령군으로 선정하였고, 24군단은 진주를 서둘렀다.

존 R. 하지

미국의 전후 세계 전략 및 동아시아 정책 마련 차원에서 마련되었던 ‘현자들’(wisemen)에 대한 구상은, 태평양 전쟁 종결 이전에 신탁 통치안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 설치라는 두 가지 정책 대안으로 발전하였고, 이 단계까지만 해도 미국은 한반도를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하는 전후 처리안을 구상하였다. 이들 구상에서는 한반도 분할 점령안보다는 한반도와 아시아 대륙, 특히 만주와의 관계가 중시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으로 치달으면서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 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적 보장 장치로 한반도 일부분을 점령하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했다. 특히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미국 군부 지도자들은 아시아 대륙과 연결된 한반도의 어느 지점에서 서둘러 이익선을 확보하여야 했다.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할 점령은 이러한 미국의 이해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군부의 분할 점령안이 정책 결정 집단의 신탁 통치 구상이나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군부는 신탁 통치안이라는 전략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전술적 배치의 차원에서 분할 점령안을 마련하였다.

한반도 신탁 통치안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연합국 정상들 간의 전시 외교(戰時外交)에서 얻어진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 개인의 즉흥적인 발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신탁 통치안은 미국의 전후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작성되었고, 여기에는 미국의 전후 기획 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미국이 한반도 신탁 통치안을 입안할 때 동북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한국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중요성이었다. 특히 전후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 공산당,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미국이 한국의 전후 처리를 주도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연합국 간 전시 외교에서 신탁 통치안의 주된 주창자로 나선 것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 확립 의도를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한반도 신탁 통치안에는 이러한 지역 전략 차원의 고려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신탁 통치안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전후 미국과 식민지 종속 지역 민족 운동 사이의 관계 설정이라는 문제였다. 이것이야말로 신탁 통치안이 제기된 주요 동기이자, 미국 세계 전략의 일반적 원칙 수립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즉 전후 식민 종속 지역에서 구제국주의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는 반면, 민족 운동이 고조될 것이라는 점은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신탁 통치안은 후진 종속 지역에서 민족 운동의 급격한 분출을 저지하고, 미국의 감독하에 이들에게 정치적 독립을 허용하는 한편, 이들 지역을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즉 신탁 통치안은 식민 지역의 구식민 모국으로부터의 분리와 미국 영향권으로의 재편입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신탁 통치안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미국의 대한 정책은, 구상 자체로서는 이미 해방 이전에 완숙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남은 문제는 전후 급격한 한국 내 정세 변동과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에 이를 어떻게 조응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1)최종안이 확정될 때까지 봉쇄와 폭격을 통하여 일본의 조기 항복이 가능하다는 해군⋅항공대의 입장과, 직접 침공을 강조하는 육군의 입장이 심각한 대립을 보였다.
2)포츠담 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한반도 전후 처리에 관한 합의를 서두르는 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포츠담에서는 고의라고 생각될 정도로 한국 문제에 관한 논의를 무관심하게 처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원자 폭탄 실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이 소련 참전 이전에 대일전 조기 종결 가능성을 예상하고, 일부러 외교를 지연시켰다는 설명도 있다.
3)1945년 8월 10일 심야에 진행된 삼부 조정 위원회(SWNCC) 회의에서는 육군 대령 2명에게 옆방에 가서 30분 내로 한반도 분할안을 만들어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중 한 사람은 후에 주한 미군 사령관을 역임하게 되는 찰스 본스틸(Charles Bonsteel)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후에 국무 장관으로 임명된 딘 러스크(Dean Rusk)였다. 러스크의 회고록에 따르면 38도선은 너무 북쪽으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이 반발할 것으로 우려하였고, 만일 소련 측이 반대하면 남쪽으로 내려 긋는 방안을 제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련 측은 38도선 분할안을 한마디 반대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미군 측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4)미국의 대소 견제 의식은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갑자기 돌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을 때 일본과 함께 시베리아에 공동 출병하여 반혁명 전쟁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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