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한반도 신탁 통치안4.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4) 찬⋅반탁 논쟁에 대한 미 군정과 소련의 반응

가. 미 군정의 반응

반탁 운동을 거치며 남한에서는 반탁=반소, 친소=찬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면서 좌⋅우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미 군정은 1945년 말과 1946년 초의 반탁 운동을 계기로 국내에서 찬⋅반탁 대립 구도를 좌⋅우 대립 구도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미 군정은 찬탁=친소=매국, 반탁=반소⋅반공=애국이라는 대립 구도를 의도적으로 확대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건이 박헌영과 존스턴의 기자 회견이다. 이 사건은 『뉴욕 타임즈』 통신원 리처드 존스턴이 조선 공산당 비서 박헌영과 기자 회견한 내용을 윤색하고, 미 군정이 이를 의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박헌영과 조선 공산당에게 크나큰 정치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다.

박헌영-존스턴 회견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이 기사가 국내 언론에서 취급되는 경위와 존스턴이 이 사건에서 맡았던 중심적 역할이다. 아래 표는 이 사건을 미 군정 측 자료와 당시 신문을 토대로 일지 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표 4-4-1>박헌영⋅존스턴 기자 회견 사건의 경과

날 짜 사 건 경 위
1월 5일 박헌영,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 12명의 한인 기자와 7명의 외국인 기자 및 군정 관계자가 참여.
1월 6일 하지 장군, 주한 미군 사령부 정례 참모 회의에서 정보 부장 니스트(Nist)에게 존스턴의 기사, 특히 송신 허가되지 않은 존스턴 기자의 메모가 매우 흥미롭다고 주의를 환기시킴. 이 참모 회의에 참석했던 군사관 킵(Albert Keep)은 인터뷰에 참석했던 미군 장교가 존스턴이 박헌영의 발언을 완전히 곡해하여 써 놓았다고 발언했음을 같은 날짜의 ’사관기장’에 남김. 공보국의 뉴먼(Newman) 대령조차 이 보도의 진위를 의심하여 이를 스노(Edgar Snow) 기자에게 확인하였음. 스노는 이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박헌영의 견해가 아닐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함.
1월
6∼7일
’조선 인민보’, ’자유 신문’, ’중앙 신문’, ’신 조선보’, ’서울 신문’, ’조선 인민보‘ 등 국내 신문에 박헌영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위의 내용은 다루어지지 않음.
1월 8일 ’G-2 주간 정보 요약(G-2 Weekly Summary)’ 17호는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원하고 10년 내지 20년 이내로 소 연방에 가입이 가능하다고 암시했다(hint)는 박헌영 회견 내용을 간략히 소개. ’G-2 정보 일지(G-2 Periodic Report)’는 기자 회견 내용을 요약하면서, 남한 언론이 이 문제를 실제 성명보다 상당히 밋밋하게 다루었으며, 소련 단독 신탁 통치나 일정 기간 유보 후 소 연방 가입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지적.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이 ‘소련 일국의 신탁 통치를 희망하는 동시에 10~20년 내에 조선이 소련의 한 연방이 된다.’는 취지의 박헌영 담화 내용을 방송. 같은 날 발행한 ’G-2 주간 정보 요약‘ 18호는, 그 어떤 한국 신문에서도 17호에 소개한 따위의 기사는 없었다고 지적.
1월 16일 『동아 일보』, 『대동 신문』 등 우익 계열 신문들은 일제히 샌프란시스코 방송의 보도 내용을 싣고, 박헌영을 신랄하게 공격.
1월 17일 조선 공산당, 존스턴의 왜곡을 항의하는 성명 발표.
1월 18일 존스턴 기자, 박헌영과의 회담 경위에 대하여 기자 회견. 박헌영이 회견 기사의 취소를 원한다면 직접 『뉴욕 타임즈』에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 박헌영의 요청으로 만났고, 그가 기사의 취소를 요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하여 존스턴이 이를 거절하였다 함. 존스턴은 박헌영이 재성명을 발표하겠다고 하여 그의 재성명을 받아 다시 『뉴욕 타임즈』에 타전하였다고 말함. 『뉴욕 타임즈』는 존스턴의 17일 서울발 기사로 박헌영 사건을 왜곡된 형태로 처음으로 간략히 소개. 그 부분을 소개하면 “박헌영은 ‘어제’ 미국 언론과 회견했고, 소련 일국의 조선 신탁 통치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가 없다고 말했다. 박헌영은 이 발언을 좌익 언론에 해명하면서 그의 발언이 와전되었고, 그는 언어 장벽(language difficulties)의 희생자라고 말하였다.”
1월 19일 박헌영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한국인 기자 12명이 왜곡을 해명하는 공동 성명 발표.
1월 20일 군정청 공보부는 「정계 동향」 17호에서 ‘박헌영 폭탄’이 가져온 여파를 게재.
1월 22일 ’G-2 주간 정보 요약‘ 19호는 박헌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은 전파되었고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쓰고, “1월 20일에 이르러서는 그 회견 내용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신문들은 공동 신탁 통치보다 일국 신탁 통치를 훨씬 덜 좋아는 것이 분명하다.”고 씀.
1월 26일 「정계 동향」 17호의 저자 버취 중위는, 존스턴의 기사가 박헌영의 발언을 정확히 보도하였다는 인상을 주는만큼 다음 호에 존스턴의 보도는 거짓이었다는 정정 기사를 써도 좋겠느냐고 공보국장 뉴먼 대령에게 문의. 뉴먼 대령은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두라고 말함.

존스턴의 박헌영 기자 회견 내용은 ’G-2 정보 일지‘ 1월 8일자, 존스턴 메모, 서울에서 발행하던 영자 신문 『Seoul Times』 1월 18일과 23일자 기사, 『조선 인민보』 1월 6일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존스턴이 박헌영에게 영어로 질문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 단독 신탁 통치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소 연방 가입 가능성이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박헌영은 영어로 답변했는데, 전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고, 후자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고 10년~2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존스턴 메모는 박헌영이 소련에 의한 일국 신탁 통치안과, 궁극적으로는 소 연방에 가입할 것이라는 명백한 제안을 했다는 뉘앙스를 담았다.

박헌영은 자신의 소 연방 발언은 완전 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그를 비난하는 아우성이 그의 해명을 삼켜 버렸다. 전후 맥락을 감안하건대 그의 발언은 한국은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발전할 것이라는 그의 정치적 견해와 신탁 통치안을 원칙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존스턴 기자가 언급한 내용은 그의 정치 노선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신탁 통치 문제를 극히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정세에서, 미 군정 당국도 인정했듯이 박헌영처럼 노회한 정치가가 존스턴 기사처럼 그렇게 부주의하게 발언했을지는 의문이다.

위 사건 일지에서 주목할 것은 이 기사의 정치적 이용 가치에 제일 먼저 주목한 사람이 하지 장군이었다는 점, 그 이후 미 군정 정보 당국이 그 기사의 향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점, 미 군정도 왜곡 기사임을 내부적으로 자인한 기사가 열흘이나 지난 시점에서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는 데에는 샌프란시스코 방송 보도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 미 군정은 이러한 왜곡 기사를 차단하거나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짓 보도의 확산을 오히려 방조하였다는 점, 정작 위의 기사는 『뉴욕 타임즈』에는 실리지도 않았고 남한에서 문제가 되자 비로소 기사화되었는데, 이때에도 존스턴 기자는 이 사건의 핵심 당사자로서 이 왜곡 보도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으면서 왜곡을 방치하였다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방송함으로써 이 회견 내용에 잠잠하던 국내 언론을 자극하였고, 국내 우익 계열 신문들은 이 기사를 산사태처럼 쏟아 냈다. 1) 신문들은 존스턴의 논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박헌영과 공산당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고,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박헌영의 신망은 이 사건으로 몹시 손상되었다. 그는 좌익들 사이에서까지 구제 불능의 친소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턴은 박헌영을 다시 만났을 때,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정정은 뉴욕 타임즈에 요청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기사의 게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정을 이용하여 그의 윤색된 기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또 그 책임을 천연덕스럽게 뉴욕 타임즈 본사로 미루었다. 그리고 하지 및 주한 미군 사령부 정보부와 공보부는, 막상 기자 회견 직후 국내 보도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기사를 열흘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윤색된 내용 그대로를 국내에 보급,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그 기사가 국내 여론에 미치는 파장을 지켜보았다.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실이 편찬한 『주한 미군사』는 존스턴 기자 회견이 “(미 군정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 관계를 끝맺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사실은 존스턴이 박헌영과의 회견을 왜곡하고, 미 군정이 재차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공산당은 소련의 괴뢰라는 인식을 확산한 것이다. 미 군정과 존스턴은 『뉴욕 타임즈』의 권위를 빌려 정작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그 기사가 국내에 확산되는 데에는 정체 불명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큰 역할을 했다.

방선주는 이 사건을 미국 신문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의도적 오보’가 작용한 것으로, 또 한국인들의 반탁 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던 미 군정이 묘수(妙手)를 부린 것으로 평가했다. 이 기술은 사건의 배경과 의도를 정확히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의 정치적 효과를 만끽했고, 반탁 운동의 수혜자였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산당이 반탁 입장에서 삼상 회의 결정 지지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고, 2) 이러한 방향 선회를 주시하던 미 군정은 박헌영-존스턴 회견을 여론 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내의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샌프란시스코 방송은 그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이 국내에 전달될 때에도, 통신 기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 기사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발이었다.
2)공산당 비서 박헌영은 1945년 12월 28일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고, 12월 31일 평양에서 모스크바로부터 귀환한 로마넨코로부터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전말을 들었다. 이날 열린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집행위 상무 위원회에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실행 방법이 논의되었고, 삼상 회의 결정 지지 방침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