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본 한국사형정풍속도(刑政風俗圖)를 통해 본 조선의 형정(刑政)4. 형정풍속도의 내용과 특징1) 오형(五刑)의 내용과 특징

나. 유배형

유배형(流配刑)은 중벌에 속하지만 사형보다 가벼운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벌이다. 유배형은 주로 관료 및 양반 등의 정치범에 대한 처벌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평민이나 천민에게 언도되기도 했다. 귀양으로 알려진 유배형은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되어 그 지역에 격리되는 일종의 자유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유배형은 처벌 기한이 특별히 정해지지 않아 죄인에 대한 국왕의 특별 사면인 해배(解配) 명령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평생을 보내는 무기형이었다. 유배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등 거리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단독으로 집행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장형(杖刑)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배형의 거리 규정이 『대명률(大明律)』 규정에 따른 것인데, 조선의 지리적 조건과 맞지 않아 시행 초 혼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때문에 1430년(세종 12) 조선의 실정에 따라 각각 600리, 750리, 900리 등으로 유배 거리가 조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000리 형이 원칙대로 적용되어 전국을 순회하거나, 여러 고을을 옮겨 총 거리를 합산해 채우기도 하였다. 예컨대 1776년(정조 1) 정조는 불경한 상소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김약행에게 사형을 감해서 유(流) 3,000리를 언도해 기장현으로 보냈다. 3,000리를 채우라는 정조의 특명에 의금부는 서울→기장현(970리)→강원도 평해(400리)→함경도 안변(940)→단천부(690리) 등으로 3,000리가 정확히 반영된 코스를 정한 사례도 있다.

형정풍속도 가운데 유배형과 관계된 그림은 김준근의 〈정배가는죄인〉, 〈정배가는사람〉 등 2점과 김윤보의 〈피행목도배송(被行木刀配送)〉 1점 등이 파악된다.

〈도17〉 김윤보, 피행목도배송(被行木刀配送), 『형정도첩』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도15〉, 〈도16〉의 그림은 호송관 1~2명이 죄인을 배소로 호송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도17〉은 앞의 두 그림과 달리 죄수가 다른 감옥이나 재판을 위해 목도를 차고 이감되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림 속 유배죄인은 흑립 등 복장을 모두 갖춰 입고 행낭까지 메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장거리 유배행임을 알 수 있다. 유배지 호송이 병졸들의 삼엄한 감시하에 죄인을 포박한 채 끌고 갈 것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김경숙의 「조선 시대 유배길」에 따르면 압송관이 죄수와 동행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면서 때때로 점검만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위 그림에서도 호송관이 죄인에 대해 삼엄한 경계나 강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림에서는 죄인의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목도(木刀) 혹은 도류가(徒流枷)를 목에 채운 모습이다. 『흠휼전칙(欽恤典則)』에 따르면 도류가의 규격은 무게가 18근(10.8㎏), 길이는 5척 5촌(약 165㎝), 목의 지름은 1척 2촌(약 36㎝)으로 규정하고 있다.

〈도18〉 『흠휼전칙』 형구지도(刑具之圖)

도류가는 길이나 무게로 보아 죄수가 감옥에 구류된 상태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처럼 유배 가는 도중에 죄인의 목에 채웠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 마다 의견이 다르다. 유배길이 며칠의 노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장만큼 기다란 칼을 목에 차고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림7〉처럼 목도의 규격이 다소 작아지고 거기에 호의적인 호송관을 만나 목도를 벗어 등에 짊어질 수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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