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한국사Ⅱ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다③ 신라의 팽창과 고구려의 수·당과의 전쟁

나.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350년 이상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에게 자신을 섬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의 서북쪽에 있던 ‘돌궐족’과 함께 이에 맞서려 하였다. 그리고 수가 침략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고, 수의 군사 기지가 될 수 있는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598).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581~604)는 이를 핑계삼아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고·수 전쟁). 육군이 랴오허 강을 건너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으며, 수군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를 압박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들을 쉽게 물리쳤고, 전쟁에서 참패한 수왕조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휩싸였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수의 두 번째 왕인 ‘양제’는 나라의 운명을 걸고 대규모로 고구려를 다시 공격해 왔다. 113만 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왕이 직접 전쟁터를 지휘하였다(612).

그러나 국가 인구가 겨우 300여 만 명에 불과했던 고구려는‘을지문덕’장군이 지혜로운 전술로 맞서 수의 대군을 멸망시켰다(살수 대첩).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던 수의 도발은 614년에도 이어졌으나 역시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무너진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무리하게 침략을 한 수 나라였다.

수의 뒤를 이어 중국을 이어 받은 나라가 ‘당’왕조(618~907)였다. 당은 건국 직후부터 고구려에 굴복을 요구해 왔고, 수시로 군사적인 위협을 했다. 고구려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를 완전히 굴복시켜 당나라의 영토에 편입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긴 어려웠다(고·당 전쟁).

고·당 전쟁’은 수나라의 패배를 설욕하고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당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45년에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만주 서남쪽에 있는‘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치밀한 전략과 민간인의 협조로 당의 대군을 물리쳤다. 특히 당의 태종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기도 하였다. 그 후 세 차례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였다.

고구려는 수차례 거듭된 수·당의 침략을 국민적 단결과 우수한 전략으로 잘 막아 냈다. 전쟁으로 중국의 수왕조가 결국 망하였고, 고구려 역시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고구려의 승리는 한국의 중국에 대한 역사적 승리이며, 백제나 신라의 영토까지도 지켜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인물탐구

신라의 화랑도 정신 - 사다함

진흥왕 때(540~576) ‘사다함’이란 귀족 청년이 있었다. 어려서 화랑으로 추대되어, 15~16세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국가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찾고 있던 사다함은, 자진해서 ‘가야’국과의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왕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그러나 사다함은 노비들에게 토지를 주어 다 해방시켰다. 국가를 위해 싸운 것일 뿐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매우 칭찬하였다.
그러나 사다함에게는 더 큰 근심이 있었다.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다짐했던 친구가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다함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한 그를 신라인들은 슬픔으로 위로하고 기념하였다.
우정을 중요시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장에서 그 용맹함을 몸으로 실천했던 신라의 화랑들, 그들은 바로 신라의 발전과 훗날 삼국 통일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이 되었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 - 사다함
고구려, 수의 침략 물리침
안시성 전투 승리(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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