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한국사Ⅳ 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과 발전② 번영하는 귀족 사회

다. 불교와 유교가 함께 발달한 나라

고려는 불교가 가장 융성한 나라였다. 고려인들은 불교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현재 생활과 내세에 행복을 준다고 믿었다.

고려 태조는 후손에게, ‘고려는 불교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이므로 절을 세우고 불도를 닦으라.’는 교훈을 남겼다.

승려는 사회에서 높은 대접을 받아, 왕족과 귀족 중에서도 승려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들이 여러 명인 경우 적어도 한 명은 승려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자 신분인 의천은 (대각)국사가 되어 여러 업적을 남겼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수양을 하고, 고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국가는 승려 대상의 과거 시험인 승과를 통해 승려의 지위를 결정하였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선이 되고, 최고의 승려는 ‘왕사’, ‘국사’라는 칭호를 받아 국가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믿음에서 대장경을 만들었다. 한편, 승려들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의병이 되어 적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전국의 좋은 곳에는 절이 세워졌다. 절은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았고, 왕실이나 고관, 지방의 실력자들이 신앙심에서 토지를 바쳤다. 여기에 절이 자체적으로 사들이거나 개간한 토지 등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지녔다.

절은 기술자와 노비의 노동에 의해 베, 모시, 기와, 술, 소금 등 각종 물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불교 행사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또 절은 빈민 구제라는 명분으로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많은 이자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절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안전을 기원해 주고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도 정치, 경제적 힘이 커졌다.

그러나 불교의 권력과 경제력이 커지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는 사회를 이끄는 역할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 사대부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불교와 더불어 유교가 크게 발달하였다. 성종 때의 유학자 최승로는 정치 개혁안을 제시하면서‘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라고 하였다. 즉, 고려에서 불교는 개인적인 수양의 원리요, 유학은 국가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가 되었다. 국가에서는 불교 행사를 하면서, 한편 매년 2월과 8월에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려를 이끌어 간 관료는 유학 지식과 유교적 세계관을 갖춘 학자들이었다. 나라의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는 유학 경전을 가르쳤다. 유학이 크게 융성하면서 여러 사립학교들도 생겨나자 국가에서는 국립 학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방에도 향교라는 학교를 세워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유학을 공부한 학자들도 불교를 믿었다. 이처럼 고려에서 유교와 불교는 자연스럽게 공존하면서 발달하였다.

대각국사 의천
문종의 넷째 아들, 불교계 통합
장생표
절의 토지 경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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