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한국사Ⅴ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③ 사림의 성장과 집권

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충돌하다

사림은 중앙 정계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을 샀으며, 현실 사회에 맞지 않아 실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림의 개혁은 일반 민중으로부터도 지지를 충분히받지 못했다.

사림의 등장과 확대는 기존의 정치 세력인훈구파와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은 ‘사화’라고 불리는 정치적 비극으로 발전하였다.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네 차례나 커다란 사화4)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대체로 피해를 본 것은 사림파로서, 조정의 주요 관직에 진출한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축출당한 사림파는 다시 힘을 키워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향촌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던 사림 세력은 정치 세력을 꾸준히 넓힌 반면, 훈구 세력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점차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인물탐구

좌절된 개혁의 꿈 - 조광조

연산군을 몰아 내고 왕이 된 중종은(중종반정 1506) 처음에는 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힘에 밀려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림을 등용하여 유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정치 개혁을 꾀하였다. 이 때 등용된 사림의 대표가 조광조였다.
조광조중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정치를 함으로써, 사회를 바꾸고자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로, 과거 시험 외에 추천에 의해 인재를 뽑는 제도를 실시하여,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유교 이념에 어긋나는 일체의 행위를 미신이라 하여 각 지방에 향촌 규약향약의 실시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거짓으로 공신에 오르거나 공이 과장된 권력자의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정책은 기존 정치 세력의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훈구 세력의 정치적 공격으로,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조광조는 처형되고 사림 세력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로써 조광조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이상적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광조 적려유허비(전남 화순)
초기 사림의 대표, 김종직에 내려진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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