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3. 국제혼과 문화 교류원나라와의 통혼 및 혼인 풍속의 변화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고려는 충렬왕부터 공민왕 때까지 여덟 명의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들은 지배국의 공주로서 위상이 높았다. 특히 충렬왕비 제국대장 공주는 원나라 세조의 딸로서 그 지위는 왕 이상이었고, 왕도 그녀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할 정도였다. 충렬왕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고, 이것이 고려 정치에 미친 여원 통혼(麗 元通婚)의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원나라 공주들은 고려 출신 후비들을 질투해 조비(趙妃) 무고 사건 같은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그녀들의 높은 위상은 충선왕비 개가(改嫁) 사건에서 보듯 왕의 즉위와 폐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정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09)

<노국대장공주 복원도>   
종묘 공민왕 사당에 소장된 공민왕비 초상화를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여덟 명의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후대에도 회자될 만큼 각별했다.

한편 일부 관리들은 출세를 위하여 원나라 공주의 겁령구(사속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고려 후기 고위 관료였던 김방경(金方慶)은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을 제국공주의 겁령구 출신인 차신(車信)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사람들은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이런 행동을 했다며 비난했다. 충렬왕의 폐행(嬖幸) 중 한 명인 원경(元卿)도 인후(印候)가 공주의 겁령구로 재상이 되어 권세가 나라를 흔들게 되자, 그의 세력을 빌리고자 아들 선장(善長)을 인후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그러나 이보다 두 나라 사이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공녀이다. 원나라는 다처(多妻)를 취해 고려에 여러 차례 공녀를 요구했다. 공녀 요구는 고종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원나라와 강화하고 부마국(駙馬國)이 되면서 더욱 본격화했다. 이에 왕실의 여성부터 일반 서민의 여성까지 공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 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부녀의 수가 2000명을 넘었을 것이다.110)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

공녀가 되면 평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대부분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이에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쳐 이웃 사람도 볼 수 없게 하고, 딸의 머리를 깎는 등 공녀 선발을 면해 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간혹 딸을 공녀로 바쳐 출세를 도모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컨대 원나라 평장 아합마(阿哈馬)가 아름다운 여자를 구하자 홍원사 진전 직(直)인 장인경(張仁冏)이 자기 딸을 보내겠다고 요청했다. 장인경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딸을 팔아서 관직을 얻었다며 비난했다. 그런데 정작 아합마는 그 여자가 명문의 딸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같은 계층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일부는 지배층의 잉첩(媵妾)이 되었고, 신분이 높은 여성은 왕이나 고급 관료의 배우자가 되기도 하였다. 궁인 이 씨는 비파를 잘 타서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화평군 김심(金深)의 딸 달마실리(達痲失里)는 인종의 비(妃)가 되었다가 황후로 추봉(追封)되었다. 공녀로 끌려간 여성 중에 가장 출세한 사람으로는 기황후(奇皇后)를 들 수 있다.

기황후는 행주인 기자오(奇子敖)의 딸로서 1333년 원나라에 끌려갔다. 궁녀가 된 기씨는 순제의 총애를 받아 1339년에 황자를 낳고 제2황후가 되었으며, 1365년에는 제1황후로 책봉되었다. 『원사(元史)』 「후비전」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으로, 늘 중국의 역사책이나 『여효경』 등을 보며 역대의 현숙한 황후들을 본받고자 했다. 또 지방 각지나 외국에서 진상물이 들어오면 반드시 먼저 태묘(太廟)에 바친 뒤 맛을 보았다. 1358년 수도에 큰 기근이 들자 그녀는 관아에 명해 죽을 쑤어 굶주린 백 성을 먹였으며, 또 금·은·곡식·비단 등을 내어 유골 10여 만 구를 묻어 주고 수륙 대회(水陸大會)를 열어 명복을 빌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는 한편 그녀는 조정 중신들에게 고려 여자를 선물하고 그녀들을 조종해 원나라 정계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그녀의 일족은 고려에서 온갖 불법을 자행했으며, 그녀는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자 북쪽으로 달아나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한편 공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도 있다. 충혜왕의 딸인 장녕공주(長寧公主)는 원나라 노왕(魯王)에게 시집갔는데, 원나라가 망하자 북평(北平)에서 실종되었다. 공민왕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그녀를 찾아 주길 요청했고, 명나라 황제는 사방에 수소문해 그녀를 북경에서 찾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신돈(辛旽)은 여러 관리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올리게 했다. “부인은 평생 한 남자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니 감히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갈 수 없습니다. 장녕공주는 일찍이 원나라에 있을 때도 행실에 비방이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수치이며, 원나라가 망할 때 또 수절해 죽지 못하고 명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먼 변방에 안치시켜 생명이나 보전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왕은 그녀를 궁궐에서 살게 하였다.111) 장녕공주의 사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녀가 되어야 했던 여성의 굴곡진 삶을 보여 준다 하겠다.

[필자] 권순형
109)『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 제국대장 공주 및 조비.
110)유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 18, 1957, 34∼37쪽.
111)『고려사』 권91, 열전4, 공주 충혜왕 장녕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