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혼인의 난맥상

증가하는 이혼과 재혼 논의

개화기에 외국인은 “조선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를 무시해야만 하였고,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천한 행동으로 여겼으며, 남편은 아내가 죽었을 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 모든 아는 사람들의 조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평민들은 아내를 주먹질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특히 이혼은 높은 계층에서 자주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아내가 어려운 상태를 견디지 못해 복종하지 않거나 싸움을 할 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이들을 때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혼하였다.”294)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남존여비, 내외법 등에 따른 조선의 불평등한 부부 관계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기막힌 이혼의 이유를 알려 주기도 한다. 이에 비해 1920년대 엘렌 케이의 자유이혼론 추종자들은 이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오히려 부도덕한 축첩을 폐지한다고 하며, 자유이혼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자유이혼이 어떠한 폐해를 함유하였을지라도 야비한 성적 관습, 가장 부끄러운 매매적 성교, 가장 통렬한 심령의 학살, 가장 비인간적인 참인(慘忍), 근대 생활에 나타나는 자유에 대한 야비한 침해 등 이러한 해독과 참인을 보라! 결혼으로 이미 양출(釀出)되고 또는 현재 양출되려는 폐해보다는 기백배(幾百倍) 우월하리라.”295)

“이혼이라는 것이 절대로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이라는 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으니, 결혼의 가치는 그 반면에 이혼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있는 만큼 더 가치가 있으며, 결혼 생활의 진의를 반증하여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혼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부자유하고 야합적인 결혼 생활이 비극일 것이다. 과부 또는 결혼한 부인일지라도 부자유한 생활 내지 성생활을 하는 이보다, 오히려 깨끗하고 행복된 새로운 생활을, 그네들 자신이 만들지 않으면 언제나 그네들이 받고 있는 불행은 씻을 수 없을 것이다. 이혼은 정당하다.”296)

이처럼 정당한 이혼, 즉 자유결혼의 파탄은 오로지 남녀 간의 연애만의 문제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십중팔구는 경제 문제에서 비롯된다. 1924년에 이미 이혼은 경성 지방 법원에서 하루 평균 5, 6건의 이혼 소송이 접수될 만큼 급격히 늘어났다.297) 이혼의 자유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1918년부터였다. 처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한 사건으로 재판상 이혼이 성립한 사례는 1921년이 처음이었다. 당시 이혼 이유는 배우자의 중혼, 배우자의 간통과 처형(處刑), 부부간의 성격 차, 경제적 이유와 폭행 등이라 하였다. 1932년에는 이혼 총수가 6,712건으로 하루 평균 18건인데, 이는 그 전해에 비해 138건이 감소한 것이지만 당해 연도의 결혼에 대한 비율은 5%가 넘는 높은 것이었다. 지방별로 제일 많은 곳은 경기도, 그 다음은 황해도, 평남 순이며, 제일 적은 곳은 함북, 경북 순이었다. 연령별로는 20∼24세가 최고인 31%, 15∼19세가 23.3%로 결혼 5년 후가 가장 많았다.298) 이와 같은 이혼의 격증 현상은 당시 잘못된 결혼 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하였다.

‘현하(現下) 조선의 이혼 원인이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라는 남녀 지상 토론 대회에 남녀 여덟 명이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였다.299) 그 가운데도 심히 여성을 비방하여 “대체로 여자는 아직 사람이 못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여자는 생각이 좁습니다. 금방 웃다가도 새파랗게 골을 잘 냅니다. 둘째 여자는 허영심이 많습니다. 자기 신분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돈 잘 쓰고 옷 잘 입을 생각만 합니다. 셋째 여자는 의뢰심이 많습니다. 먹고 입고 하는 것을 전부 남편에게만 바라고 있습니다. 넷째 여자는 울기를 잘합니다. 그리 대단찮은 일에도 눈물을 쫄쫄 잘 흘리며, 걸핏하면 친정에를 가느니 죽느니 하고 야단입니다. 이러고서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편안케 하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이혼하는 탓을 여성에게만 돌렸다. 반면 신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그 원인이 있다며, “첫째 이혼은 남성의 횡포에서 나오는 것. 양같이 유순한 재래 여성을 아무 탈 없이 박대하는 것. 둘째 현대 남녀가 관습적으로 이혼을 주창하는 것이 꼭 이혼병 환자 같다. 셋째 현대 여성이 남자의 비위에 맞지를 않는 점, 즉 남자들의 힘으로 현대 여성과 같이 살 힘이 부족해서 불만과 충돌을 갖게 된다. 넷째 생활고와 남자들의 잠재해 있는 방탕성 때문이다.”라고 반박하였다.

‘재판소에 이혼 소송을 일으키는 원고의 10분의 8은 남자’라며, 참을성이 없는 남자에게 이혼의 책임을 돌리기도 하였다. “무식하다고 부모가 얻어 준 안해를 버리고 자유연애에 기울어지다가 그 새 마누라가 달아나기나 하면은 그 꼴은 또 어떻겠습니까?” 하고 남성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 다. 동시에 구여성과 이혼한 뒤, 신여성과 재혼하더라도 부양을 계속한다면 구여성이 본부인이고, 구여성의 부인 노동에 비하면 신여성은 소비하는 첩과 같다는 지적도 남성의 처지를 대변하는 점에서 계속되었다.300) 이는 곧 여성을 단지 노동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음을 잘 보여 준다.

한편 재혼에 대한 논의도 이혼만큼은 아니지만 나온다. 나혜석이 주장한 여성 재혼의 당위성이나,301) ‘자식을 가진 청상과부가 재혼함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논쟁은 여성 재혼을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라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302) 이처럼 자유이혼과 재혼 논의는 이미 시작된 자유연애·자유결혼 논의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필자] 신영숙
294)「관혼상제와 의식주」,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4), 『국역 한국지』(1900), 297∼335쪽.
295)노자영, 「여성 운동의 제1인자」, 『개벽』 1921년 3월, 47쪽.
296)『여인』 1932년 10월, 2∼3쪽 .
297)홍란, 「이혼 소송 격증」(평론), 『신여성』 3권 2호, 1925년 2월, 13쪽.
298)태허, 「숫자로 나타난 조선의 혼인 조사」, 『신여성』 1933년 9월, 54∼57쪽.
299)남녀 지상 토론 대회, 『여성지우』 1권 2호, 1929년 2월, 82∼92쪽.
300)나일부, 「신여성과 구여성, 결혼 문제에 대한 AB의 논쟁」, 『비판』 1938년 11월, 58∼62쪽.
301)「처녀·비처녀의 관념을 양하라 : 정조 파괴 여성의 재혼론」, 『삼천리』 1932년 2월.
302)허하백, 「재혼하여도 죄가 아니다」, 『여성』 1권 2호, 1936년 5월, 13쪽, 36∼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