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4.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과 보건 의료 체계

일제 강점기의 의학과 보건 의료 체계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조선 병합에 따라 우리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위생학, 전염병 관리, 체력 관리 등을 포괄하는 서양 의학을 국가 관리술의 한 분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서양 의학과 보건 의료를 채택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시대에 취했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대한제국이 오랜 전통으로 민간의 주축 의료를 이루고 있던 한의학을 용인한 반면, 일제는 이를 철저하게 무시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당장의 의료 공백을 막고 기존 한의사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당대에 한해서 한시적으로 개업을 인정했지만, 한의사 교육이나 신규 면허는 철저히 억제해 장기적으로 한의학을 도태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한의학의 한시적 인정 정책은 1913년의 의생 규칙(醫生規則) 반포로 공식화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한의사는 의사보다 한 단계 낮은 ‘의생(醫生)’으로 규정되어 의료 체계가 이원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한의학 억제 정책으로 인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의는 꾸준히 줄고 양의의 수는 계속해서 늘었다.

<한방 진료>   
1920년대에 일제가 서양 의학의 과학성을 선전하고, 전통 한의학을 폄하하기 위해 만든 사진첩에 실린 사진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수는 크게 부족했고, 서양 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인들과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에 한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서양 의학의 수혜를 받지 못했던 것은 문화적 이질감과 한의학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일부러 이용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경 제적 수준의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일례로 1929년 노동자의 평균 일당은 1∼2.5원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총독부 의원의 평균 진료비는 입원 2000원, 외래 700원 정도로 터무니없이 비쌌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의료의 주축은 여전히 한의사가 담당했다.

일제 초기의 보건 행정을 보면, 1910년의 한일 병합과 함께 전국의 공중 보건 사업을 총독부 경무 총감부의 위생과에서 관장하고, 도나 군에서는 각각 경찰국 위생과와 위생계에서 관장하게 되어 정부의 공중 보건 활동이 경찰에 의한 위생 행정 체계로 바뀌게 되었다. 또 보건 의료 종사자들을 기능에 따라 법적으로 구분하고 그 자격·면허·임무 등을 규정해 경찰의 지도·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경찰 조직을 이용한 보건 행정 체계는 당시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도(民度)가 낮다고 보고 교육이나 보건 서비스의 제공보다는 강압적인 방식의 위생 업무 집행을 주로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라 광복이 되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공중 보건 활동은 주로 규제 중심의 행정 체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방역 분야에서는 1915년에 급성 전염병 예방을 위해 콜레라·이질·장티푸스·파라티푸스·두창·발진티푸스·성홍열·디프테리아·페스트 등 아홉 종을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하는 전염병 예방법이 공포되었고, 그 밖에 폐디스토마·나병과 같은 지방병(地方病)·마진·폐결핵 등의 만성 전염병에 대한 예방 규정과 학교 전염병 예방 및 소독에 관한 규칙, 해·항만(海港灣) 검역에 관한 규칙 등 공중위생과 질병 예방에 관한 많은 법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경찰이 주도한 통제 위주의 위생 행정은 항일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의 위생 법규 준수 지시·명령에 의식적으로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의 위생 상태는 크게 개선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병원과 의원은 조선 총독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관립 병원, 도와 지방 기관에서 운영하는 공립 병원, 민간인이 운영하는 사립 병원 이 있었다. 관립 병원으로는 한말 대한 의원의 후신인 조선 총독부 의원과 경성 의학 전문학교 부속 병원, 용산 철도 병원, 나환자 요양소인 소록도 자혜 의원 등이 있었다. 공립 병원은 도별로 설치된 도자혜 의원으로, 1909년 전주·청주 두 곳으로 시작해 1937년에는 전국 41개소, 1942년에는 46개소로 확대되었다. 사립 병원은 1939년 시점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곳 46개,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 여덟 개, 다른 외국인이 운영하는 곳 22개였다. 관립과 공립 의원의 경우 일본인 의사가 절대 다수였고, 사립 의원은 조선인과 서양인 의사가 다수를 차지했다.

의학 교육의 측면에서는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의사 양성 기관으로 의과 대학 한 곳, 의학 전문학교 일곱 곳이 있었다. 대한 의원 부속 의학교가 조선 총독부 의원 부속 의학 강습소로 바뀌었다가, 1916년에 4년제 경성 의학 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세브란스 의학교 역시 4년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0년대에는 의과 대학 한 곳과 의학 전문학교 두 곳이 신설되었는데, 1926년에는 경성 제국 대학교 의학부, 1928년에 대구 의학 전문학교, 1929년에 평양 의학 전문학교가 새로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 말기인 1938년에 경성 여자 의학 전문학교가 생겼고, 1944년에 광주와 함흥에 의학 전문학교가 각각 문을 열었다. 의과 대학은 예과를 거쳐야 했으므로 의학 전문학교에 비하여 수업 과정이 2∼3년 더 길었으며, 전문학교가 주로 개업의(開業醫)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반면 의과 대학은 의사 양성과 함께 교육과 연구 인력 육성도 목표로 하였다.

<세브란스 병원>   
1900년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 (L. H. Severance)가 거액을 기부하여 1904년에 남대문 밖 조동에 신축한 병원이다. 전신은 알렌이 1885년에 세운 제중원이다.

이러한 의학 교육 기관들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는 대략 2000여 명의 조선인 의사가 양성되었다. 이는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 초기의 수십 명에 비하면 분명 많은 수이다. 그러나 이는 조 선의 전체 인구 규모에 비해서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일제는 다른 고급 인력과 마찬가지로 우민(愚民)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인 의사의 양성을 억제하였다. 특히 관립 학교는 교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학생도 절반 이상이 일본인으로, 조선인이 의학 전문학교나 의과 대학에 들어가기는 일본인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일례로 1943년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의 교수진과 학생 구성을 보면 일본인은 교수 67명에 학생 203명이었던 반면, 조선인은 교수 세 명에 학생 170명에 불과했다.

<해부학 실습>   
1910년대에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해부학 실습을 하는 모습이다.

3·1 운동 이후 식민 통치의 기조가 문화 통치로 바뀌면서 보건 의료 부문에도 단속 위주의 행정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전반적 양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일제 말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써먹을 수 있는 군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의료의 성격이 ‘국민 체위 향상’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약간 전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도로 1941년에 세워진 후생국은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내 폐지되었다. 전쟁 상황은 의학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1941년에는 의료 관계자 징용령이 내려져 의료 인력이 징발되었고, 이듬해에는 의사의 개업지 지정을 골자로 하는 국민 의료법이 공포되었다. 1944년에는 전시 체제를 강화하려는 조선 의료령이 제 정 공포되었다. 전시 상황에서 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일제는 약 배급을 통제하는 한편, 한약의 제조·보급·연구에 관심을 쏟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일제 강점기의 의학은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1910년과 1945년 사이에 의학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의학교들이 여럿 생겨났으며, 이를 통해 서양 의학을 공부한 의사와 병원 수도 증가했다. 이때 양성된 인력과 설립된 기관은 광복 후 우리나라 의료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식민지 한국에 세워진 학교의 수는 너무도 적었으며, 그나마 그곳에서 양성된 의사의 상당수는 일본인이었다. 의학 연구는 겨우 생색이나 낼 정도로 미약했고 연구와 교육은 거의 일본인이 장악했다.

현대식으로 건립된 소수의 병원과 의원은 다수의 조선인 피지배층이 아닌 소수의 식민 당국 지배층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정책적으로 한의학을 홀대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민간의 중추 의료로서 한의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발달한 서양 의료의 혜택을 기층 민중에까지 확대하려는 의지가 없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의에 애착을 보인 것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의 의료 정책은 얼마 되지 않는 식민 통치자를 위한 발달한 서양 의료 제공과 다수의 식민지 피지배 계층을 위한 한의학의 용인이라는 틀에서 진행되었다.

[필자]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