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정재의 재정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의 영향으로 이 시기에는 악공과 기생이 포로가 되거나 죽은 자가 많았다. 여기에 임진왜란 이후에 지속적으로 여기의 혁파가 제기된 것, 인조가 즉위한 후 장악원 여기인 경기(京妓)를 혁파하는116) 등 일련의 정책으로 궁중 정재는 쇠퇴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악의 쇠퇴는 무동 정재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어, 이 시기의 진연·진찬에서 여령 정재(女伶呈才)의 비중이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무동 정재의 비중이 높아졌다.
1624년(인조 2) 10월에 10년 동안 유폐되어 고통을 겪은 인목 대비를 위로하기 위한 진풍정에서 여악을 다시 썼음이 확인되지만,117) 『조선왕조실록』에는 여악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여악의 혁파를 주장하는 기록이 지속적 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내연(內宴)에서는 여기가, 외연(外宴)에서는 무동이 정재를 공연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118)
임금이 장악원 제조 윤득화(尹得和)를 불러 하교하기를 “외연에 비로소 무동을 썼는데, 1작(爵)에는 초무(初舞)이고, 2작에는 아박(牙拍)이고, 3작에는 향발(響鈸)이고, 4작에는 무고(舞鼓)이고, 5작에는 광수무(廣袖舞)이고, 6작에는 다시 향발이고, 7작에는 다시 광수무를 추었으니, 이는 선조 이후 100년 가깝게 기악(妓樂)을 정지하고 무동을 쓴 새로운 제도다. 이로써 『악학궤범』에 실어 후일 상고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119)
송방송(宋芳松)은 앞의 인용문에 보이는 ‘초무-아박-향발-무고-광수무’의 외연 무동의 정재 공연 구조가 숙종 연간에 확립된 것으로 보고, 『숙종실록』의 1706년(숙종 32) 8월 27일의 인정전 외연과 무동 정재, 1714년 (숙종 40) 9월 19일의 숭정전 외연, 1719년(숙종 45) 경현당 외연, 1744년(영조 20) 숭정전 외연 등에서 공연된 무동 정재와 그 순서를 근거로 제시하였다.120) 그러나 1작부터 9작까지 공연된 정재의 전체 구조가 가지는 특징, 이 시기 9작 이후 예외 없이 처용무로 정재가 마무리되는 이유, 여러 정재 중 8작과 9작에서 향발과 광수무가 반복되는 이유, 또 5작과 8작에서 공연된 향발의 반주가 보허자령과 여민락령으로 서로 다른데, 반주가 달라짐에 따라 정재무의 춤사위나 공연 방식에는 차이가 없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여기서 무동이 공연한 초무와 광수무가 처음 보이는데,121) 무동의 초무와 광수무 공연은 1706년(숙종 32)의 인정전 외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122)
임진왜란 이전과 구별되는 이 시기 궁중 정재의 또 다른 특징은 장악원 소속의 여기 대신 전국에서 선상된 향기(鄕妓)가 궁중 정재에 참여했고, 공연 후 이들이 곧 귀향했다는 점이다. 선상기에 관한 기록은 조선 전기에도 가끔 보이지만, 1744년(영조 20)에 거행된 광명전(光明殿) 내연에 참여한 선상기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처용무에 참여했던 선상기의 출신은 안동·경주·상주 등 경상도로 한정되어 있는데, 1829년에 내진찬을 위해 각 도의 관찰사에게 보낸 공문의 기록과 관련지어 볼 때, 처용무를 위한 선상기는 경상도라는 특정 지역에서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처용가의 발상지가 경상도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처럼 내연에서의 궁중 정재가 선상기에 의해 공연되는 전통은 경기(京妓) 혁파와 관련된 것이지만,123)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왕실 재정이 궁핍해진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 여령 정재를 담당하던 여기의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선상기들이 궁중 정재 공연 전반에 참여하고, 의녀와 침선비가 주로 의장(儀仗)을 드는 역할을 담당했는데,124) 그 비중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125) 이러한 변화 역시 왕실 재정의 궁핍에 따라 장악원에서 정재에 필요 한 여기를 모두 수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재를 추는 기녀는 선상기로 충당하되,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시킴으로써 선상기의 수를 줄여 궁중 정재에 필요한 국가 경비를 전체적으로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1682년(숙종 8)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하고, 1743년(영조 19) 『악학궤범』을 다시 간행한 전통을 이어 1777년(정조 원년)에는 악기도감(樂器都監)을 두었다. 1784년(정조 8)에는 왕이 친히 악원에게 명하여 여러 악생과 무공을 거느리고 뜰에서 배우게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국왕의 관심 속에 궁중 정재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했던 조선의 악무는 이 시기에 다시 정비되어 순조 때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16) | 『인조실록』 권1, 인조 원년 3월 23일 계축. |
---|---|
117) | 『인조실록』 권7, 인조 2년 10월 9일 경인. |
118) | 송방송은 광해군 때 외연에 여악이 사용되었고, 인조대에 왕세자 책례 후 회백관례(會百官禮)와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환영 잔치에서 무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외연에서의 무동 정재는 인조 때부터 정립되어 늦어도 숙종 연간에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다(송방송, 「숙종 말 영조 초의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 『한국 음악사 논총』, 민속원, 1999, 167쪽과 176쪽). |
119) | 『영조실록』 권58, 영조 19년 9월 19일 무술. |
120) | 송방송, 「숙종 말 영조 초의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 『한국 음악사 논총』, 민속원, 1999, 176∼177쪽. |
121) | 조선 초 『악학궤범』에 여기에 의한 초무와 광수무가 보인다. 이에 대하여 송방송은 동일한 명칭이라는 점 때문에 무동과 여기의 초무와 광수무를 같은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무동의 초무와 광수무는 양 난 이후에 새로 창작된 정재로 보았다(송방송, 「숙종 말 영조 초의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 『한국 음악사 논총』, 민속원, 1999, 167∼176쪽). |
122) | 『숙종실록』 권44, 숙종 32년 8월 27일 임자, “인정전에서 진연(進宴)하여 아홉 번 술잔을 돌리고 파했다. …… 연잉군(延礽君)이 셋째 잔을 바치고 임금이 잔을 드니, 음악은 오운개서조곡(五雲開瑞朝曲)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초무를 추었다. …… 동평위 정재륜이 일곱째 잔을 바치고 임금이 잔을 드니 음악은 보허자령을 연주하고 무동이 들어와 광수(廣袖)를 추었다.” |
123)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 연향과 여악 연구』, 민속원, 2001, 222∼232쪽. |
124) | 1795년(정조 19) 윤2월에 거행된 내진찬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경기(京妓), 경여령(京女伶)’으로 불렸던 의녀와 침선비가 이때 처음으로 의물차비(儀物差備)가 아닌 정재여령(呈才女伶)으로서 정재무를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1744년(영조 20) 내진연에서 선상기(選上妓)들로 구성된 여령 정재와는 다른 모습인데, 정조 19년 이전에도 의녀와 침선비가 정재를 추었을 가능성이 있다(김종수, 앞의 책, 259∼281쪽). |
125) | 『원행을묘정리의궤』(1797)에서는 약 50% 정도를 차지하던 것이 1892년(임인진찬)의 내연에서는 여령 정재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