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5. 군사 훈련장으로 바뀐 운동장

교련, 배우면서 싸우자

10월 유신의 핵심 모토인 한국적 민주주의란 물질적 차원에서는 산업화를 추구하여도 정신적 차원에서는 한국적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보적 차원에서 혼란을 낳는 민주주의적 질서를 중단하고 기존의 전통적 가치를 되살려 보전하려 했다. 이 한국적 가치의 복원은 성별화되어서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에 남성의 이상형으로는 이순신이, 여성의 이상형으로는 신사임당이 선택되어 정책적으로 부각되었다. 전사로서의 남성과 전통적 모성성을 강조하는 여성이 1970년대 이상적 남녀의 성질과 역할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일관된 여성 정책의 목표는 모성성을 강조하고 전통적 역할의 틀을 유지하면서 국가를 위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의식 무장을 꾀하는 것이었다. 군사 훈련과 신사임당을 모델로 한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교육을 복합적으로 시행하였던 것은 애국적 주체로서 여성의 사회화와 국민화를 꾀하는 동시에 여성이 모성성의 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수호체로서 기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264)

교련은 “배우면서 싸우는 투철한 방공 민주 정신을 함양하고, 국가 방위의 기본자세를 확립하여 국방 교육을 일상 생활화한다.”는 목적 아래 1969년 2월 19일 시작하여 1970년 모든 여학교에까지 확대되었다. 교련을 배우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1.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반공(反共) 통일에 투철(透徹)한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을 기른다.

2. 군사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시키고 강인한 체력을 배양하여 국토 방위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3. 단체 훈련을 통하여 규율 생활을 익히고 단결심을 굳게 함으로써 활 달한 기풍과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를 기른다.

<교련 검열>   
1980년대에 학교 운동장에서 교련 검열을 받는 광경으로, 질서 정연한 모습이 마치 군인들을 보는 듯하다. 교련은 1970년부터 모든 여학교로 확대되었고, 교련 사열은 학교의 중요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교사와 학생은 많은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남녀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었고 비상시를 대비해 모든 국민은 준전시 상태에서 만반의 준비를 끝마쳐야만 하였다. 학생은 ‘싸우면서 배우는’ 호국 대열에 참여하였으며, 학교 조직은 병영화되었다. 교련복은 교복만큼이나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인식시키는 중요한 표시가 되었다.

입학식을 하고 1학년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예쁜 우리들에게 입혀졌던 군복 비슷한 교련복과 사열, 열병 들이다. 교련 시간에는 간호를 위한 붕대 감기, 응급 처치 등의 실습을 서로 행하였으며, 틈나는 대로 군가에 맞추어 군대식으로 기초 훈련을 받으면서 방공 연습을 하였다. 군가를 부르다가 체육 선생님의 ‘반동 시작’ 구호에 맞추어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오른팔을 흔들어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소풍을 갈 때도 봄 소풍에는 교복을 입고 가고 가을 소풍에는 교련복을 입고 교련 모자를 쓰고 갔다.265)

1972년부터 해마다 학교별로 교련 검열이 실시되는 한편 여의도 광장에서 고교 교련 합동 사열 및 실기 대회가 열렸다. 교련 검열에 대비한 훈련을 하느라 많은 학생이 방과 후에도 운동장에서 군인처럼 군사 교육을 받곤 하였다. 여학생도 국가 안보를 위한 중요한 구성원임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교련 검열을 일주일 앞두고는 오전 수업만하고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 오전에 예행연습을 할 때는 목소리가 잘 안 나와서 무척 걱정을 했습니다. 오후에 전 대대원이 운동장에 집합, 완전히 정돈을 했습니다. …… 앞에 서 있는데 긴장이 되어서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열병을 할 때 각 열마다 한 줄로 똑바로 맞을 때마다, 저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리더니 열병이 완전히 끝났을 때는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분열할 때는 저도 놀랐답니다. 연습할 때는 90도 각도까지 올라가지 않던 팔이 90도 이상으로 잘 올라가더군요. 마지막으로 평가 때 검열관으로부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겠더군요.266)

교련 검열은 학교의 연례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장학사를 비롯해 외부 인사가 오게 되고 행사는 준비된 절차에 따라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보폭이란 행진하고 있는 사람의 앞의 발뒤축에서부터 뒤의 발뒤축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바른걸음일 때의 보폭은 76㎝, 옆걸음과 뒷걸음의 보폭은 30㎝, 반걸음은 38㎝이다.”267) 걸음걸이 하나도 절도와 각도를 맞추어 통일성이 있어야 하였다. 교련 검열에서 강조된 것은 절대시된 집단적 질서, 균질화된 개인성, 위계질서에 대한 반발 없는 복종, 그리고 적에 대한 강한 저항심 등이었다.268)

남학생은 교련에서 제식 훈련, 총검술, M1 소총, 전술학 등을 중점적으 로 배운 반면 여학생은 제식 훈련뿐 아니라 골절 처치, 환자 간호, 응급 처치, 공중 보건, 환자 운반법, 화생방 등을 배웠다. 남자 고등학교용 『학교 교련 교범』에서는 교련 교육의 목적을 “군사 교육은 군사 교리에 따라 기본 원리를 충분히 반복 연마한 후에 야전에서 변화하는 여러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창의와 응용을 위주로 훈련하는 것”269)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여자 고등학교용 학교 교련 교범』에서는 국토 방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여학생의 군사 교육은 전시 전후방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학생의 기능과 체질을 고려하여 적절히 실시되어야 할 것”270)이라고 하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진 교련 교육의 내용에서는 공산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켜 내는 데 남녀의 구분은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의 성별 역할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교련 검열 중인 여학생>   
군복을 입은 교련 장학사 앞에서 교련 검열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총검술 훈련을 받는 남학생과 달리 붕대 처치를 주로 하는 여학생의 모습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성별 역할 구분은 고교 교련 합동 훈련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국군의 날 행사의 축소판이었던 이 훈련은 1만 6000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실시되었다. 얼룩무늬 교련복 차림의 남녀 학생들은 분열식을 끝내고 서울역 → 신세계 백화점 → 퇴계로 → 장충 공원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철도 고등학교 학생 등 남학생들은 총검술을 보였으며, 경기고와 서울 여상 1,200명은 매스 게임을, 홍익 여고생은 고적퍼레이드를 펼쳤다.271) 마치 국군의 날 행사의 축소판이었을 뿐 아니라 남학생과 여학생에게는 다른 역할이 부여되었다.

교련 수업은 결국 학교에서 학생에게 군사 훈련을 시킨 것이다. 이러한 군사 훈련을 통해 학교 조직이 병영화되었을 뿐 아니라 학생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켰다.

[필자] 김정화
264)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163∼164쪽.
265)김정숙(44회), “44회 백합들의 회상”, 『경북 여고 70년사』, 경북 여자 고등학교, 1999, 490쪽.
266)“교련 검열을 마치고”(대대장 강영순), 『영등』 9호, 1972 : 『영등포 50년사』, 영등포 여자 고등학교 , 2003, 96쪽, 재인용.
267)대한민국 재향 군인회, 『여자 고등학교용 학교 교련 교범』, 1977, 15쪽.
268)김은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논리와 가부장성」,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2, 119쪽 : 『한국 여성 문화사』 2, 숙명 여자 대학교 출판부, 2005, 278쪽 재인용.
269)대한민국 재향 군인회, 『고등학교용 학교 교련 교범』, 1977, 9쪽.
270)대한민국 재향 군인회, 『여자 고등학교용 학교 교련 교범』, 1977, 9쪽.
271)손인수, 『한국 교육 운동사』 3, 문음사, 1994, 178∼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