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2. 우리 무기는 우리식에 맞게잠자던 무기의 부활

19세기 무기 개발의 한계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의 국가 방위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본격적인 침략이 다가오고 있던 때에 국방력 강화가 절박하였으나 당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런 탓으로 중앙 상비군 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지방군도 약화되었다. 이에 전국 각지의 산성, 감영, 병기고에 일정한 양의 무기와 탄약 등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보면 당시의 각 군영에 보관되어 있는 무기 명세가 있다.298) 이를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훈련도감의 군기 명세(요약)

조총 8,239자루(행용총 7,946/ 별조총 154/ 장조총 50/ 대조총 56/ 동사대조총 32/ 흑골조총 1)/ 천보총 4자루/ 마상총(기병총) 205자루/ 동포 119문/ 호준포 17문/ 순환포 10문/ 홍이포 2문/ 자모포 65문(4호 15, 5호 50)/ 자포 335개/ 동소총 11자루/ 삼혈총 153자루/ 연철환 180만 9,792개/ 능철 3,131개/ 활 10,558부/ 화전통 5,566부/ 대발화 122개/ 중발화 262개/ 거마창 348개/ 화차 121량.

② 금위영의 군기 명세(요약)

조총 13,638자루(대조총 2/ 중장조총 8/ 별조총 1,028/ 왜조총 1/ 호별조총 49)/ 마상총 1자루/ 삼합총 1자루/ 유불랑기 1문/ 철불랑기 1문/ 자포 5개/ 천보총 4자루/ 순환포 3문/ 위원포 79문/ 승자동포 2문/ 불랑기 60문/ 동포 10문/ 분화통 604문/ 이화통 797문/ 연환 260만 4,999개/ 화차 56량/ 차총 30자루/ 정철일화봉총 45자루/ 유일화봉총 45자루/ 능철 13,500개/ 활 6,781부/ 궁노 239부/ 화전 1,872부/ 소발화 246개/ 거마창 455대/ 풍안경 530개/ 천리경 1개.

③ 어영청의 군기 명세(요약)

조총 6,488자루(왜조총 14/ 별장총 48/ 대장총 1/ 대총 2/ 당조총 1/ 황자총 1/ 승자총 2/ 동조총 1/ 마상총 1/ 호제총 30)/ 단총 598자루/ 천보총 1자루/ 4호유불랑기 10문/ 5호유불랑기 50문/ 자모포 2문/ 철자포 2개/ 호준포 1문/ 순환포 3문/ 동포 116문/ 동삼혈포 12문/ 철삼혈포 58문/ 이화통 200문/ 화차 10량/ 체철총 220자루/ 유일화봉총 90자루/ 정철일화봉총 90자루/ 능철 3,2167개/ 활 11,924부/ 궁노기 119장/ 화전 3,419부/ 전차 51량(5륜전차 5/ 양륜전차 20/ 독륜전차 26)/ 위원포 79문.

④ 총융청의 군기 명세(요지)

조총 5,523자루/ 순환포 4문/ 1와포 1문/ 화전 487부/ 활 1,091부/ 궁노기 69장/ 능철 1만 7,329개.

⑤ 북한산성 훈, 금, 어, 승창의 군기 명세(요약)

조총 8,266자루/ 대장총 300자루/ 나팔별총 10자루/ 중총 54자루/ 삼혈총 15자루/ 무쇠대포 67문/ 동포 10문/ 자모포 626문/ 철불랑기 60문/ 철자포 3,982개/ 단가포 54문/ 체철총 179자루/ 유불랑기 415문/ 연환 133만 5,216개/ 수철환 9,446개/ 화전 2,494부/ 천리경 1개.

이상에서 보면 다섯 개 군영에 보관되어 있던 전체 병기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조총이었는데, 모두 4만 2154자루였다. 기본 조총과 규격이 다른 별조총, 장조총, 대조총 등은 4만 5000자루였다. 이 비규격 조총 중에서 수량이 많은 것은 단총 598자루, 체철총 399자루, 대장총 301자루였다. 다음으로 마상총 207자루, 일화봉총 270자루, 차총 30자루, 천보총 9자루였다.

포는 불랑기 693문, 자포 4,324개이고 이와 별도로 유불랑기와 철불랑기를 합하여 537문, 보통 불랑기 60문이었다. 또 삼혈포도 비교적 수량이 많았는데 동삼혈포와 철삼혈포를 합하여 70문이었다. 그 밖에는 동포 255문, 위원포 158문, 대포 67문, 순환포 20문, 호준포 18문, 홍이포 2문 등이었다.

또 화차가 187량, 전차가 51량 있었다. 이 전차 중에는 다섯 바퀴 전차가 5량, 두 바퀴 전차가 20량, 독륜(獨輪) 전차가 26량 있었다.

그리고 화약 무기로는 이화통 997개, 분화통 604개, 화전 7,785부가 있었고, 대발화·증발화·소발화 합하여 630개가 있었다.

탄환류로는 연탄환 575만 개, 수철 탄환 9,446개가 있었다. 또 탄환이 터질 때 파편 역할을 하는 능철(菱鐵, 마름쇠) 6만 6127개가 있었다.

재래식 무기는 활 3만 354부, 거마창 803자루가 있었다. 기계식 활인 궁노기도 188부가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무기 상태를 살펴볼 때 병사들 개인 화기의 기본은 조총이며, 왜조총 1자루와 여진의 별조총 49자루를 제외한 4만 4000여 자루의 조총은 모두 국내에서 자체 생산한 것이었다. 포는 지난날의 전장식(前裝式)이 아니라 자모포, 불랑기 같은 후장식(後裝式)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또 화차와 전차가 많이 구비되어 있었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화전과 대발화, 중발화, 소발화 등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탄환은 납으로 만든 것이 575만 개였는데, 무쇠 탄환이 9,446개여서 당시 탄환의 기본이 납 탄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마름쇠를 쇄마탄(碎磨彈)처럼 화약과 함께 넣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이 시기에는 재래식 무기인 활, 쇠뇌, 창도 함께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기는 1812년(순조 12) 홍경래의 난 때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에서 관군이 실제 사용하였다. 당시 관군이 준비한 무기는 대완구, 자모포, 운제(雲梯, 사다리 차), 방신차(防身車, 몸을 막는 수레) 등을 들 수 있고, 농민군 측에서도 화약 무기를 사용하였다.299)

더불어 1867년(고종 4)에 신관호(申觀浩)에 의해 당시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에 대처하여 주민 스스로 방위하는 민보(民堡)의 설치300)뿐만 아니라, 자위대들이 손쉽게 만들어 쓸 수 있는 간단한 방어 무기인 뇌석(擂石), 약탕(藥湯), 회낭(灰囊), 분포(糞砲) 등의 제조법이 나오기도 하였다.301)

그러나 19세기 조선의 군대는 양적 질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중앙 군영은 있으나 징병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국고가 텅 비어 중앙 상비군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정은 지방군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현의 속오군이 대여섯 초(한 초는 120명) 이상은 되었지만, 아무런 양성 체계 없이 군적(軍籍)에만 편입시켜 놓아 모두 다 빈이름뿐이라고 한탄하는 것302)을 볼 때 19세기 초·중엽 지방군의 형편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 다. 이와 같이 상비 병력이 거의 없어졌고 군사 훈련도 중단된 상태에서 무기를 개발하고 발전시키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자] 장필기
298)『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 2·3.
299)『순조실록』 권15, 순조 12년 정월 경인 ; 2월 경오 및 임신.
300)신관호(申觀浩), 『민보집설(民堡輯說)』, 보제(堡制) 제2.
301)정약용(丁若鏞), 『민보의(民堡議)』, 민보수어지법(民堡守禦之法).
302)『고종실록』 권18, 고종 18년 3월 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