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2장 시간의 측정과 보시2. 시제와 시보, 그리고 시간에 대한 통제

시보, 인정과 파루

동아시아 사회에서 시계의 운영과 시보는 국가적 차원에서 고대부터 계속 있어 왔던 일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일자(日者)’, 백제에는 ‘일관(日官)’이라는 해시계를 관리하던 관원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718년(성덕왕 17) 누각(漏閣)을 처음 만들고, 누각전이라는 관리 부서와 담당자인 누각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이는 물시계를 설치하고 시간 측정과 시보를 하였음을 말한다. 신라 혜공왕 때인 765∼779년에는 청동으로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을 만들었는데, 이 종이 바로 ‘신혼 대종(晨昏大鐘)’이었다. 신혼 대종이란 밤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말한다. 낮 동안의 생활을 마감하고 통행 금지가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고대 제왕들은 시간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시보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선명력(宣明曆)이라는 역법을 썼는데, 이 역법을 통하여 삼국시대보다 더 체계적으로 시간의 측정과 시보를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 태조의 명으로 한양 한복판에 종루(鐘樓)를 짓고, 큰 종(大鐘)을 걸어 놓고 시간을 알리도록 하였다. 삼국시대 이래의 신혼 대종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종로의 종각(鐘閣)은 바로 이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전근대 사회 속에서 가장 중요한 시보는 인정(人定, 또는 인경)과 파루(罷漏, 또는 바라)였다. 도성 문을 일제히 닫아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면서 강력하게 밤 시간을 통제하는 상징적 제도였기 때문이다.65) 고대부터 신혼 대종으로 중요하게 알리던 시간이 바로 이 통행 금지 시간이었다. 보통 인정은 초경 3점에 종을 28번 치고, 파루는 북을 33번 쳤다.66) 물론 이러한 제도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특히, 인정에 종을 치는 제도는 고대부터 행해지던 제도였지만, 파루 제도는 조선 초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1414년(태종 14) 6월 이전에는 5경 초점에 시보하다가, 이후부터 5경 3점으로 바뀌었다. 또한, 1423년(세종 5)에는 인정은 1경 3점 말에 종을 치고, 파루는 5경 3점 말에 치던 것을 3점 초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바뀌었는데, 1469년(예종 1)에는 파루 때 북을 33회 치던 것을 종으로 바꾸었다.

28번과 33번의 종을 쳐서 밤 시간의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인정과 파루, 즉 초경 3점과 5경 3점 그사이에도 계속 시간을 알렸다. 1469년(예종 1)에 정해진 ‘당종법(撞鐘法)’에 의하면, 인정 이후 매 경과 점마다 경의 수와 점의 수대로 북과 징을 각각 쳤다. 예를 들어 2경 3점이 되면 북 2회, 징 3회를 치고, 이를 다섯 차례 반복하였다. 이렇게 인정부터 파루까지 밤새도록 치면 295회의 북 소리와 303회의 징 소리가 한양 도성 안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밤새 울리는 징과 북 소리에 맞추어 군사나 숙직자들이 순찰을 돌거나 교대를 하였다. ‘순작법(巡綽法)’과 ‘순라(巡邏)’가 그것인데, 순작법은 의금부(義禁府)에서 3경에 순찰을 도는 것을 말한다. 순라는 1628년(인조 6)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경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2경에는 금위영(禁衛營)에서, 3경에는 훈련도감에서, 4경에는 어영청(御營廳)에서, 5경에는 어영청 소속의 입직 군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소위 ‘순라꾼’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와 비슷하게 ‘좌경법(坐更法)’ 제도도 있었다. 순작법과 함께 태종 때부터 행해진 듯한데, 한성부 소속의 숙직자들이 지역과 시간(즉 경(更)으로 시간을 나눔)을 나누어 도적 방비 차원에서 순찰을 돌았다.

인정과 파루, 그리고 매 경·점 때마다 밤새 종·북·징을 쳐야 했기 때문에 시보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밤새 숙직하면서 제때에 맞추어 알려야 했고, 도성 전체에서 들을 수 있도록 하여야 했다. 시간에 맞는 시보, 즉 북과 징을 제때에 치지 못하는 일도 간혹 일어났다. 『추관지(秋官志)』에 는 1791년(정조 15)에 2경 1점을 초경 2점으로 잘못 알고 북과 징을 친 담당 관원들이 문책을 받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자격루(自擊漏)’를 만든 동기도 그러한 착오를 줄이려던 이유가 컸다.

<한양도(漢陽圖)>   
위백규(魏伯珪, 1727∼1798)의 『환영지(寰瀛誌)』에 실려 있는 지도이다. 한양의 한복판에 종을 쳐서 시각을 알리던 종루(鐘樓)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경복궁 내부에는 조선 초 종합 천문대 격이던 ‘간의대(簡儀臺)’도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의 자격루에서 시작된 시보가 광화문의 대종고를 거쳐 광화문 앞 육조 거리를 통과해 종루에 이르는 전달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또한, 착오는 궁궐 안에 있는 표준 물시계(자격루)를 보고 종루까지 알리는 과정에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착오를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달 체계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일단 궁궐 안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이 물시계를 보고 시각을 알리면, 광화문에 있는 대종고(大鐘鼓)에서 종과 북 소리로 시각을 알렸다. 광화문의 대종고와 종루 사이에는 여러 군데에 금고(金鼓)를 설치해서 잘 전달되도록 하였다. 즉, 광화문의 대종고에서 병조장문(兵曹墻門), 월차소행랑(月差所行廊), 수진방(壽進坊) 동구(洞口)의 병문(屛門)에 각각 설치한 금고 소리를 통해 종루로 전해졌다. 종루에 있는 종지기는 이렇게 전달되는 소리를 잘 듣고 인정과 파루, 그리고 매 경·점 때마다 온 도성에 들리도록 종·북·징을 크게 울렸다.67)

종루에서 울리는 소리가 도성 전체, 나아가 도성 근처 거주민들에게까 지 들리는지도 문제였다. 실제로 도성 밖에 거주하는 관리들이 종 소리나 북 소리를 잘 듣지 못해 제때에 출근하지 못하고,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성문 개폐 시간을 놓쳐 처벌을 받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서 도성 밖에까지 들리도록 동대문과 남대문에 각각 종을 설치하여 도성 밖의 거주민이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종이 세 군데에서 울리면서 오히려 혼동된다는 지적이 많아 곧 폐지되었다.

종 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북과 징 소리는 더욱 멀리까지 들리지 않았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은 인정과 파루 사이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순라꾼에게 들키면 경수소(警守所)로 잡혀가서 날이 새면 곤장을 맞았다. 처음에는 초경 때 잡혀도 50대를 맞을 정도로 심하였으나, 나중에는 초경과 5경에는 10대, 2경과 4경에는 20대, 3경에는 30대를 맞았다. 이 정도로 통행 금지가 엄격하였고 그만큼 도성 전체에 북과 징 소리가 잘 들려야 했다. 이를 위해 ‘전루소(傳漏所)’를 도성 내 여러 곳에 설치하고, 각 전루소마다 전루군 두 명이 북을 두드리게 하였다. 이 전루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궁궐 주변을 중심으로 모두 18곳이나 설치하였는데, 이 소리를 듣고 순라꾼들이 착오 없이 교대를 할 수 있었다.68)

밤 시간의 통제와 시보가 엄격하게 이루어진 데 비하면, 낮 시간의 시보는 그렇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오정에 광화문에서 ‘오고(午鼓)’라 하여 북을 쳐서 정오 시각을 알렸다. 광화문 앞이라면 정부의 여러 부서가 늘어서 있는 육조 거리로, 주로 관료들을 대상으로 오고를 울린 듯하다. 따라서 백성들에 대한 낮 시간의 통제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와 같은 시보 체제는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큰 틀은 이어졌다. 창덕궁을 조영한 후 새로이 보루각을 세운다거나, 임진왜란으로 종루가 불타 없어지자 다소 규모가 작은 종각을 새로 지은 변화가 있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 오던, 인정과 파루를 근간으로 하는 시보 체제는 고종 때에 이르러 크게 바뀌었다. 즉, 1884년(고종 21)부터는 인정과 파루 때에 종 을 치는 것과 함께 오정·인정·파루 때에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에서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지난날 “정오에 오포가 울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1895년(고종 32) 10월 29일부터 인정과 파루, 그리고 경·점 때에 종·북·징을 치는 제도는 중지되었다.69)

<평양 대동문 부근>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에 보이는 대동문 부근이다. 대동문에 ‘읍호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성문 앞의 거리를 지나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평양에서는 읍호루에 큰 종을 걸어 두고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

이상 살펴본 내용은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의 시보였다. 지방에서는 어떠하였을까?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어느 정도 시보가 이루어졌다. 평양의 예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조선 초기부터 평양에는 시보를 관장하는 누각원(漏刻院)이 있었고, 대동문(大同門) 읍호루(揖灝樓)에 큰 종을 걸어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 후대에 가면 한양에서처럼 평양 한복판에 종루를 세워 시간을 알리기도 하였다. 경주와 개성에서도 봉덕사(奉德寺)와 연복사(演福寺)의 종을 울려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 건국 시조들의 어진(御眞)이 모셔진 전주에는 국초부터 읍성의 4대문에 종을 걸어 놓고 쳤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강화와 수원 등 중요한 수도권 도시에서도 인정과 파루의 시보가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방 도시와 함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현이나 국경 지대에서도 시보가 이루어졌다. 이곳들은 오히려 지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하게 시간의 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437년(세종 19) 수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창제한 시계들, 즉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현주일구(懸珠日晷), 그리고 물시계인 행루(行漏)와 물시계 사용 안내 책자인 『누주통의(漏籌通義)』 등을 국경 지대 군사 도시에 보냈던 일은 그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잘 알려 준다. 심지어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을 파견하여 물시계의 관리와 측정 방법 등을 가르치도록 할 정도였다. 국경 지역뿐 아니라 충청남도 보령의 충청 수영과 경상 좌병영이 있던 울산에도 종루를 두고 인정과 파루 제도를 적용하였다.

이 밖에 일반 군현에서는 시보가 어떻게 지켜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아마도 한양의 물시계와 같이 정밀한 시계가 있어서 정확한 시간에 성문을 열고 닫았을 것 같지는 않다. 해가 진 후 적당한 시간이 경과하고, 날이 밝아 해 뜨기 전에 적당히 신호를 보내어 성문을 열고 닫았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분초를 다투며 정확히 시간을 따질 절박한 이유도 없었다. 군현 수령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은 더더욱 그러하였다.

[필자] 문중양
65)도성 문은 인정과 파루 때 닫고 열지만, 궁성 문은 그에 앞서 초저녁(初昏)에 닫고 해 뜰 때(平明) 열었다고 한다. 『경국대전』 권4, 병전(兵典), 문개폐(門開閉).
66)28번은 별자리 28수(宿)를, 33번은 불교의 우주론에 나오는 33천(天)을 의미한다.
67)광화문 대종고에서 종루에 이르는 시보 전달 체계는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병술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또 전달 체계가 구축되기 이전 조선 초기에는 종루에 물시계를 직접 설치하고 의금부에서 관리, 시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나 1437년(세종 19)에 비로소 경복궁 내에 물시계를 설치하고, 전문 부서인 서운관과 그 관원들이 운영·관리하였다고 한다.
68)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연식, 「조선시대의 시간과 일상생활」, 『역사와 현실』 37, 한국역사연구회, 2000, 268∼271쪽을 참조할 것.
69)이와 같은 시보와 전달 체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남문현, 앞의 책, 65∼69쪽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