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화조와 사군자에 담은 사대부의 이상3. 생활 속의 화조와 사군자

도자의 문양

[필자] 백인산

화조나 사군자가 도자의 문양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 상감 청자이다. 고려청자에 등장하는 화조나 사군자 문양은 대나무, 매화, 국화, 버드나무, 포도 등의 초목과 학, 오리 같은 조류가 주종을 이루는데, 대체로 도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장식적인 효과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림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도공(陶工)들이 직접 문양을 그리면서,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진 듯하다. 참외 모양 화병이나 오리 모양의 연적과 같이 동식물의 형상을 본뜬 기형(器形)의 정교함에 비하여, 문양의 수준이 크게 못 미치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 백자에 시문(施文)된 화조나 사군자 문양은 고려시대 청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량과 품격을 보여 주며, 그 소재 또한 훨씬 다채롭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회화 발전에서 기인하나, 직접적으로는 도공이 아닌 전문 화원들이 문양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청화백자매죽문호>   
크기, 기형, 문양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조선 초기 청화 백자의 대표작이다. 이 시기 도자의 문양 소재로 애용되던 매화와 대나무가 시문되었는데, 사실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구현해 낸 정치한 필치가 인상적이다.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   
구륵과 몰골을 적절히 섞어 쓴 능숙한 필치로 매화와 더불어 삼청(三淸)으로 꼽히던 소나무와 대나무를 화면 가득 시문하였다. 완성도 높은 문양과 더불어 제작 시기를 명시한 명문은 그 가치를 한층 높여 준다.

조선시대 도자의 화조나 사군자 문양의 유행과 발전은 조선 초기의 청화 백자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이 시기 청화 백자의 문양으로는 삼청(三淸)으로 불리며 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왔던 송죽매(松竹梅)가 대종을 이룬다. 매화나 대나무에 새가 첨가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지만, 그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매화와 대나무를 소재로 한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의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와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린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홍치이년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二年銘松竹文壺)가 대표작이다. 두 작품 모두 경직된 필치, 도안과 같은 형태 등 다소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종이나 비단과 같이 평면의 화폭이 아닌 입체면과 제한된 공간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전문 화가가 아니고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합리적인 구도와 사실적인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대나무의 정교한 잎맥, 매화의 다양한 형태, 옹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포착한 매화나무와 소나무의 둥치 등에서 사실적인 표현에 진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장식성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이 내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륵(鉤勒)으로 윤곽선을 잡아 내고 청화(靑華)로 그 내부를 채우는 구륵 전채 기법이나, 여백을 최소화하고 밀도 있게 경물을 배치한 화면 구성 등에서 강한 장식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 청화 백자의 문양은 사군자 계열의 소재를 적극 활용하여, 사대부들의 관념적인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사실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궁정이나 귀족 취향의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장식성이 중시되어, 조선 초기 사대부 문화의 양면성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이후에 제작된 청화 백자의 문양은 초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동경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매화와 대나무를 조화시킨 소재의 운용 이나,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15세기 초반의 청화 백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나무의 묘사를 살펴보면 윤곽선이 없는 몰골의 기법을 구사하여 전체적인 미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화면의 구성 또한 도자의 장식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상하의 장식 문양대를 생략하면서 여백을 충분히 확보하여 늘어난 공간을 여유롭게 운용하였다. 빠른 속도의 일필로 쳐나간 필치 역시, 서예적인 필치와 표일(飄逸)한 의취를 추구하는 문인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미감에 좀 더 근접해 있다.

<청화백자매죽문호>   
동체 전면에 시문된 대나무와 매화는 필치, 구성, 포치 등에서 수묵 사군자화에 뒤지지 않은 회화성과 표일한 취상을 보여 주고 있다. 단순한 장식을 위한 도자 문양의 한계를 넘어선 수작이다.
<백자철화시명매죽문호>   
항아리 양면에 매화 등걸과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를 그렸는데, 여유로운 화면 구성, 활달하고 경쾌한 필치, 농담의 적절한 대비와 조화가 돋보인다. 문양과 함께 시문된 시구를 통해 시화 일치를 도모하였다.

16세기 청화 백자에서부터 문인화풍에 근접하기 시작한 사군자 문양은 17세기 접어들면서 더욱 가속화된다. 17세기에는 청화를 대신하여 철화가 유행했는데, 철화 백자에서도 여전히 사군자 문양이 선호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백자철화시명매죽문호(白磁鐵畵詩銘梅竹文壺)도 그중 하나이다. 항아리 양면에 매화 등걸과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를 그렸는데, 여유로운 화면 구성, 활달하고 경쾌한 필치, 농담의 적절한 대비와 조화가 돋보인다. 다소 투박하고 조야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문인화 특유의 야일(野逸)의 측면에서 본다면, 동경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매죽문호보다 한층 진전된 모습이다. “빈속은 만물을 용납하고, 흰 바탕은 하늘의 이루어짐을 드러내다.”라는 시구(詩句)는 시문된 문양과 함께, 문인 화 특유의 시화 일치를 도모하고, 아울러 도자의 기능에 대한 관념적 해석을 적절히 가하고 있다. 따라서 도자의 문양이 아닌 한 폭의 문인화로 보아도 모자람이 없다.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의 성숙으로 인해, 상징성과 의취를 중시하는 문인 취향의 사군자 화풍이 도자의 문양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철화 백자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작은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이다. 당당한 기형과 맑은 유색은 차치하더라도, 능숙한 필치와 통활한 구도, 치밀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포도 문양은 화폭에 그려 놓은 여느 포도에도 뒤지지 않는 빼어난 솜씨를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포도는 다자(多子)나 번성의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시문되었으나, 화가의 빼어난 필치와 감각으로 세속적인 상징성과 장식성이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는 황집중, 이계호(李繼祜, 1574∼1607), 홍수주(洪受疇, 1642∼1704) 등 포도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문인 화가들의 선구적인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자철화포도문호>   
당당한 기형과 맑은 유색도 빼어나지만, 능숙한 필치와 통활한 구도, 치밀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포도 문양은 단연 압권이다. 포도가 지니고 있는 다자와 번창이라는 세속적인 상징성은 화가의 빼어난 감각과 필치에서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여느 포도 그림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성취를 보여 준다.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난초와 국화, 나비, 벌 등이 한데 어우러진 초충 문양은 정선이나 김홍도의 초충도를 연상케 할 만큼 사실적이며, 서정적이다. 또한, 백자에 사용되던 모든 안료와 다양한 조각 기법이 결합되어 조선 백자 문양의 총화라 부를만하다.

도자의 문양은 18세기 이르면 화조, 초충(草蟲) 등이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사군자류에 치우친 17세기보다 소재 면에서 한결 다채로워졌고, 안료(顔料)의 운용을 비롯한 기법 면에서도 한층 발전된다. 조선 후기 백자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간송 미술관 소장의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초국화무늬병(靑華白磁陽刻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은 당당한 기형과 설백(雪白)의 유색, 격조 있는 문양이 압권이다. 특히, 이 병은 청화, 철화 등의 단일 안료를 통해 단색조로 구현된 이전의 도자 문양과는 달리, 백자에서 사용되는 모든 안료를 채색에 사용하였고, 여기에 다양한 조각 기법이 결합되어 조선 백자 문양의 총화(總華)라고 부를 만하다. 기법도 그렇거니와 난초, 국화, 나비, 벌 등이 한데 어우러진 초충 문양은 정선이나 김홍도의 초충도(草蟲圖)를 연상케 할 만큼 사실적이며 서정적이다. 조선 후기 사실적인 화조화풍이 도자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예이다.

조선 말기의 도자에서도 화조나 사군자는 가장 선호되던 문양 소재였다. 그러나 문화 말기적 현상을 드러내면서 예술적인 고양은 현저히 약화되고, 복락(福樂)을 바라는 길상적(吉祥的) 의미나 장식적인 효과를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재 면에서도 사군자류보다는 길상적 의미를 내포한 십장생이나 어해류(魚蟹類)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갔다. 장수의 염원을 담은 청화백자십장생문(靑華白磁十長生文) 접시나 등용문의 고사를 통해 등과의 소망을 담은 청화백자파어산수문(靑華白磁波魚山水文) 접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림 자체의 조형적 수준도 떨어지고, 그 의취나 품격도 퇴보하였지만, 이 역시 조선 말기 사대부나 새로이 문화 상층부로 편입된 일부 중인들의 지향과 미감을 반영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화조나 사군자는 조선시대 도자 문양의 가장 유력한 소재로 애용되었다. 개별 소재들의 상징성이나 조형적 특징이 도자기를 쓰고 완상하는 왕실 및 사대부들의 기호와 미감에 적절히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시기별로 소재의 선택 및 표현된 미감과 지향은 다소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도자 문양의 변천은 문화 주도 계층의 이념적 토대, 현실적 지향, 미의식 등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화조화나 사군자화의 전개 과정과도 일치하고 있다. 조선 사대부의 미술 문화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대부의 의식 및 변천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주요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필자] 백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