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관광 명소의 탄생과 숙박 시설

1. 경성의 숙박 시설과 관광 명소

근대 여행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투어리즘(tourism)’이라고 할 수 있다. 투어리즘은 기획된 여행 코스를 안내에 따라 돌아보며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말하는데 ‘유람과 오락, 휴양, 보양’ 등의 의미가 포함된다.242)

이러한 근대 여행의 핵심적 요소인 ‘안락한 여행’은 ‘기획된 여행 코스’와 ‘교통 편의’ 그리고 ‘청결하고 설비를 갖춘 숙박 시설’을 통해 배가된다. 이러한 여행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83년(고종 20) 조선을 여행한 퍼시벨 로웰(Percival Lowell)은 당시 조선인들이 경치를 즐기고 감상하는 일에 열정적이지만 정작 여행에서 도로가 불편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여인숙(旅人宿)’이 없다는 점에 대해 불평한다.243) 조선시대 숙박 시설은 유숙(留宿), 민박(民泊), 역관(驛館), 원(院), 상관(商館), 영빈관(迎賓館), 객주(客主), 여각(旅客), 주막(酒幕) 등의 이름이 보이지만 여행자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의 숙박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던 주막은 막걸리 등과 안주를 판매하며 3, 4전에서 20전 정도를 받는데, 숙박료는 받지 않았으며 숙박할 때 목침(木枕)을 하나 줄 뿐 별도의 침구(寢具)가 없었다. 객주는 상인의 숙소로 물품을 보관하고 위탁 판매, 중개 등을 겸한 곳이다. 보행객주(步行客主)는 숙박업을 전문으로 하는데, 주막보다는 고상한 곳으로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儒生) 등이 이용하였다.244) 대개 조선시대 관리들이 여행을 할 때는 동류(同類)의 집에서 숙박하거나 방문한 고을 관리의 집에서 머무는 게 상례였다. 1917년에 남부 지방을 여행한 이광수(李光洙)가 객주에서 머물렀을 때 이부자리조차 없다고 불평한 것이245) 시사하듯이 여행자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숙박 시설은 오랫동안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고 있었다.246)

<객주>   
19세기 말에 김준근(金俊根)이 객줏집을 그린 풍속화이다.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며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상인 또는 그런 집을 말한다. 특히 보행객주는 숙박업을 전문으로 하였고 주막보다 격이 높았다.

근대 여행의 중요 요소인 ‘기획된 여행 코스’의 등장은 철도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점차 ‘관광 명소(觀光名所)’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신문사와 조선 총독부 철도국(鐵道局)이다. 당시 사람들은 언론 단체가 기획하는 관광단 모집이나 도시에서 개최되는 박람회(博覽會)나 공진회(共進會) 선전에 마음이 설레어 여행을 나서기 시작한다. 또 대규모 여행단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청소년들의 단체 여행인 수학여행(修學旅行)이다.

과연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 풍경은 어떠하였을까? 전통시대의 여행과 구별되는 근대 여행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당시의 숙박 시설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으며, 여행자를 사로잡는 관광 명소로는 어떤 곳이 있었을까? 여행자들은 여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리고 그 여행 문화 속에 작동한 식민성(植民性)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자 이제 일제 강점기의 여행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손탁 호텔 전경>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내한한 손탁이 1895년에 고종에게 정동에 있는 한 가옥을 하사받아 외인의 집회소(集會所)로 사용하다가 1902년 10월에 2층 양관을 신축하여 지은 서구식 호텔로 정통의 러시아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위는 전경을, 아래는 내부의 식당을 찍은 사진엽서이다.
<손탁 호텔 식당>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호텔의 효시는 1888년(고종 25) 일본인 와리지가라 타로(掘力太郞)가 인천에 세운 대불(大佛) 호텔이고, 서울에는 일본인 마쓰모토(松本卯一)가 1895년(고종 32)에 세운 파성관(巴城館) 여관이 있었다.247) 서울에 있던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손탁(孫澤) 호텔이다. 손탁(Antoinette Sontag, 한국명 손탁·송다기(宋多奇), 1854∼1925)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의 가족으로 1885년(고종 22)에 내한하여 한러 외교와 궁중의 서구식 의식주 문화 정착에 많은 영향을 끼친 여성이다. 그녀는 1898년(광무 2) 정동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편에 있는 황실 소유의 벽돌 건물을 하사받아 호텔로 개조하여 1902년 10월에 개업하였다.248) 건축 설계는 러시아 건축 기사 사바틴(A.J.Seredin-Sabartin)이 담당하였고, 욕실이 딸린 객실 25실과 대소 연회장을 갖추었으며, 프랑스 요리를 주요 메뉴로 하면서 대한제국의 관용(官用) 호텔로 이용되었다.249) 손탁 호텔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독일인 손탁 양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갖는 조선 왕실의 가정교사였다. 고종에게 하사받은 서소문의 저택은 당시 조선인 정객(政客)의 왕래가 빈번하고 밤늦게까지 전등이 켜 있었다. 한일 합방 전 일본 정부는 독일인 가정교사는 필요 없다고 하여 그녀에게 3년간의 봉급으로 3만 원을 주고 독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후 손탁 저택은 당시 파라스 호텔의250) 주인인 프랑스 인 포엘 씨에게 양도되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후 조선으로 여행하는 자는 경성의 손탁 호텔에 투숙하였다. 1912년에 총독부는 이를 관영으로 하려고 8만 원으로 매수하고자 하였으나 팔지 않았으므로 새로이 조선 호텔을 장곡천정(長谷川町)에 건설하였다. …… 그러나 유럽 전쟁으로 남편 포엘은 전선에 나가게 되고 호텔은 매월 5,000원의 적자를 보게 되어 (1915년) 8월 19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였다.251)

당시 손탁 호텔은 경성에 있는 유일한 호텔로 내외 귀현(貴顯)들이 구미(歐美) 여행의 도중 조선에 들를 때는 반드시 머무는 숙박 시설이었다.252)

1912년 부산과 신의주에는 정거장 여관(停車場旅館)이 개업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경성에서는 손탁 호텔 외에 이렇다 할 호텔은 아직 없었다.253) 그래서 조선 총독부는 이를 매수하려다가 실패하자 장곡천정(현재 소공동)에 새로운 호텔을 건축하였다. 1913년에 착공하여 1914년 10월에 준공한 것이 바로 조선 호텔이다. 설비는 순 서양식으로 하여 귀빈실 4실, 특별실 10실, 상등실 27실, 보통실 13실로 모두 54객실에 100명 정도의 투숙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부대시설로 음악당, 대식당, 독서실, 끽연실, 바 등을 갖추고 있었다.254)

조선 호텔은 자동차 두 대를 비치하여 정거장 및 호텔 간의 여객을 송영(送迎)하였고, 투숙객이 경성 시내를 구경하는 교통편으로도 제공하였다. 세탁과 이발도 호텔이 직영하였고, 대부분의 객실에 목욕탕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당구장도 있었다. 대식당 연회는 250명, 입식(立式)일 경우는 500명 을 수용할 수 있었다. 호텔은 유럽 일류 호텔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고 하며 맨발로 식당에 들어가는 행위, 양복을 입었는데 구두를 신지 않았다든가, 예기(藝妓)를 데리고 들어가 소란을 피운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금지되어 있었다. 단, 예기라고 해도 손님인 경우에는 크게 환영받는다고 선전되었다.255) 조선 호텔의 요리는 주로 서양식으로 프랑스 요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본고장의 서양인도 칭찬해 마지않는 수준으로 식당은 항상 붐비는 편이었다.256)

<조선 호텔 전경>   
1914년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환구단을 헐고 지은 4층 규모의 근대식 호텔이다. 당시 경성에서는 분에 넘친다고 할 정도로 세련되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위는 전경을, 아래는 호텔 내부의 콘서트홀을 찍은 사진이다.
<조선 호텔 콘서트홀>   

조선 호텔은 워낙 숙박료가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 외국인이나 상류층 인사가 전용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호텔은 숙박이 아니어도 서구의 신문화를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일반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선풍기를 쏘이며 얼음에 채워 둔 맥주를 마시거나257) 신혼 첫날밤을 근사하게 보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로258) 선망되었다. 전국 기자단의 전국 대회나 지식인의 간담회 개최 때도 우쭐댈 수 있는 장소였으며, 동경에서 갓 돌아온 대학 강사는 조선 호텔의 댄스홀에서 아가씨에게 연애를 걸기도 하였다.259)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년 6월 5일자에는 조선 호텔에 ‘로쓰-ㅅ가덴’이 개장하였음을 알리는 사진이 게재되었고, 1924년 5월 28일자에는 6월 1일부터 일반에게 개방하고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1926년 6월 10일부터 9월 20일까지는 로즈 가든을 개장하고 다과권(茶菓券) 30전으로 다과와 함께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 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8월 12일부터 8월 31일까지 부산 스테이션 호텔에서 루프 가든을 개장하여 같은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여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260)

<로즈 가든 개원 기사>   
『동아일보』 1924년 5월 28일자에 조선 호텔 로즈 가든 개원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편 1926년 8월 13일부터 조선 호텔에 있던 온돌 가옥을 개조하고 실내 장식 및 난방 등을 순 조선식으로 하고 각 실의 사용 요금을 징수하여 연회 등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261) 이러한 조선 전통 문화의 채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1930년에 일본에서 국제 관광국이 설립된 후 국제적으로 ‘대일본 제국’의 관광을 장려하였는데, 1938년에 발행된 『관광 강화 자료(觀光講話資料)』에는 관광 사업에 대해 “여행을 매개로 하여 조국 인식, 지조 함양, 건강 증진, 심신 단련 등에 기여하게 함과 아울러 하늘이 부여한 그 토지의 매력과 조상이 전해 준 문화 습속을 계발하고 선전하여 그 결과 관광객을 다수 유치하여 그 지역을 점점 번영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증진시키는 것”262)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호텔에 조선 전통 건축 양식이 도입된 것도 조선의 전통 문화를 새롭게 배치하여 상품화함으로써 외국인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기획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표> 철도국 직영 주요 호텔 투숙객 수
호텔
연도
조선 호텔 부산 호텔 신의주 호텔 평양 호텔 온정리 호텔 장안사 호텔
1926 4,068 1,011 506 2,008 239 337
1927 3,803 1,066 432 2,097 202 444
✽『大正十五年昭和元年度年譜』, 朝鮮總督府 鐵道局, 1926 및 『昭和二年度年譜』, 朝鮮總督府 鐵道局, 1927에서 정리.

표 ‘철도국 직영 주요 호텔 투숙객 수’는 1926년과 1927년의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직영하는 전국의 주요 호텔에 투숙한 인원수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온정리 호텔과 장안사 호텔이 여름 한 철에만 영업하는 호텔임을 감안하더라도 단연 경성의 투숙객 수가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경성에서 박람회가 열린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기간에는 각 방면에서 여객이 경성으로 몰려들어 조선 호텔은 한때 만원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263) 그런데 일제 강점기 숙박 관련 자료를 보면 구식(歐式)과 미식(米式)이라는 용어가 눈에 띈다. 구식은 유럽식으로 객실만을 제공하는 방식을 말하며, 미식은 미국식으로 객실 대여와 함께 식사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조선 호텔도 구식과 미식을 각각 운영하였다. 당시 조선 호텔과 평양·부산·신의주 소재 철도국 직영 호텔의 요금은 표 ‘주요 호텔 이용료’와 같다.

<표> 주요 호텔 이용료
이용료 조선 호텔 평양 철도 호텔 부산 정거장 호텔 신의주 정거장 호텔
숙박비 미식 9원 이상 8원 이상 8원 50전 이상 서양식으로 평양철도 호텔과 같음
구식 3원 이상 3원 이상 3원 50전 이상
일본식 - 2원 50전 이상
(식사 포함) 6원 이상
-
식비 아침 1원 70전 1원 50전 (일)2원 1원 50전
점심 2원 50전 2원 (일)2원 50전 2원
저녁 3원 2원 50전 (일)3원 2원 50전
✽(일) : 일본식
✽✽ 龜岡榮吉,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會, 1926에서 정리.
<평양 철도 호텔>   
1925년에 개장하여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한 철도 호텔 가운데 가장 늦게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영 호텔이 거의 없었고, 조선 총독부 철도국이 경성, 부산, 신의주, 금강산 등지에서 호텔을 운영하였다.

한편 경성에 있는 그 밖의 숙박 시설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경성에서 숙박업이 활기를 띠게 된 계기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일까지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 물산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부터이다. 1910년대 일본인이 경영하던 여관과 호텔은 남산 방면에 밀집해 있었는데, 표 ‘1910년대 경성의 일본인 경영 숙박 시설’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표> 1910년대 경성의 일본인 경영 숙박 시설
명칭 규모 및 요금 위치 특징
천진루(天眞樓) -서양풍의 건물
-1박 3원에서 5원
남산정 1정목(南山町一丁目) 유명인이나 부자들이 숙박하였으나 최근은 쇠락. 그 대신 여주인이 남대문역까지 송영. 과거의 영광을 배경으로 다소 오만한 여관. 1주일 숙박 시에는 여중(女中)에게 20원, 차대(茶代)로 30원 정도가 관행.
경성 호텔 -일본식과 서양식이 가미된 건물
-붉은 벽돌 건물이 식당으로, 200∼300명의 연회 가능
남산정 2정목 총독부로 가는 길 좌측에 위치 조선 호텔에 투숙하는 것이 비싸니까 다소 싼 곳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적합. 일반적인 여관과 다른 것은 없으나 ‘호텔’이라고 하니 버터 냄새 나는 식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여관으로서는 경성 일류이지만 그다지 설비는 갖추어지지 못하다. 그 대신 천진루처럼 오만하지 않고 차대도 비싸지 않으므로 숙박하기 쉬운 곳이다.
파성관(巴城館) -일본식과 서양식 절충 건물
-일본식 방 19개, 서양식 방 3개
남산정 2정목 넓은 식당이 있고 언제든 연회가 가능하나 서양식은 별로 맛이 없다. 방도 넓고 음식도 맛있는 편이다. 젊은 종업원이 14명. 손님은 관리나 실업가가 많다. 경성에서는 제일류로 손꼽히는 여관이다. 천진루와 달리 이 여관은 손님에 대한 접대가 정중하고 방문객에게도 정중하다.
우라오(浦尾) 여관 일본식과 서양식 절충 건물 본정(本町) 2정목 할머니 주인이 매우 친절. 손님은 중류 사회나 상인이 많다. 단골손님이 많은 것 같다.
야마모토(山本) 여관   본정 2정목 손님은 실업가가 60%, 관리가 40%. 목욕탕 설비가 우수.
시라누이(不知火) 여관 객실은 25개. 객실이 하나하나 떨어져 있어 서 꽤 경비가 듦 조일정(朝日町) 2정목 손님은 은행원, 회사원이 주 고객. 서양식 세면대와 탁상 전화기가 처음으로 설치된 숙박 시설. 1920년 화재로 전소된 다음 1921년 12월에 신축 낙성하였다. 난방 장치를 하여 겨울에도 쾌적함을 자랑거리로 꼽았다.
✽旅鳥手記, 「京城の旅館評判記」, 『朝鮮及滿洲』 99號, 1915.10 ; 『朝鮮公論』 1922年 1月號, 通卷 106號, 40쪽에서 작성.
<경성 관광 안내도>   
경성 관광 협회가 발행한 접이식 관광 안내서의 앞면에 실린 지도이다. 뒷면에는 경성의 명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실려 있다. 붉은색 둥근 점이 여관을 표시하는 기호이고, 흰색으로 테두리를 표시한 것이 표 ‘1910년대 경성의 일본인 숙박 시설’에서 소개한 곳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 일류 여관의 요금은 1934년의 경우, 1박 2식에 6, 7원 정도이며, 이류 여관은 4, 5원 정도였다.264) 1929년 당시 경성에 일본인 경영 여관은 73개, 조선인 경영 여관은 351개가 있었다.265) 그러나 다음과 같은 1936년 잡지 기사를 보면 대표적인 조선 여관으로는 전동 여관(典東旅館)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류 호텔과 견주기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그래도 조선 정취가 올르는 호텔이나 고급 여관을 찻자면 겨우 잇다는 것이 견지동의 전동 여관-이 여관은 역사가 오래어서 유명한 기독교의 스타- 박사 등 몃몃 분도 유숙한 적이 잇기는 하나 그 가옥 구조라든지 정원의 천석(泉石)이라든지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 범절(凡節)이라든지 침구 모든 것이 조선을 유람 나오는 영·미국 신사 숙녀를 만족히 영접하도록 되지 못하고 수삼 년 전에 식도원(食道園)하든 안순환(安淳煥) 씨의 별장을 개조하여서 하는 광교다릿까의 중앙 호텔로 말할지라도 집은 비교적 드놉고 깨긋하나 모든 구조가 일류 호텔이라 할 수 업섯다. 그 밧게 명동 호텔 무슨 여관 모도다 40만이 사는 반도 대표 도시에 자랑할 숙사(宿舍)는 못 되엇다.266)

이러한 가운데 1930년대 후반에 들어 경성에서 순 조선식 호텔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추진한 주인공은 김옥교(金玉嬌)라는267) 여성이었는데, 국내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는 경성에서 순 조선식 호텔이 없음을 통감하고 60만 원의 출자금으로 호텔을 짓고자 한 것이다. 호텔 이름은 천향각(天香閣)으로 1936년 말부터 사간정(司諫町)에 2,000여 평의 부지를 사서 건축을 시작하였다가 일단 중일 전쟁으로 중단하였다.268)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정이 명확하지 않지만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941년 1월 16일자에 천향각 호텔에서 새로 부임한 이시카와 종로 경찰서 서장과 만찬이 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269) 완공하여 영업을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씨의 회고에도 광복 후 천향각 호텔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어서270) 광복 이후까지도 호텔 영업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일제 강점기에 경성에 여행 온 이들이 여관을 찾는 모습을 쫓아가 보자. 1917년에 발표된 여행 소설 『경성 유람기(京城遊覽記)』의 주인공으로, 함흥에서 여행 온 이 승지(李承旨)는 경성의 명물인 조선 호텔은 비싼 숙박료 때문에 조선인 여행자와는 인연이 먼 곳이라고 하였다.

경성의 여관은 별로 합당한 곳이 없다 하야도 가(可)하니,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은 모두 보행객주에 지나지 못하여 가히 여관이라 할 만한 곳이 없고, 시내에 제일 되는 여관은 다만 철도 여관 조선 호텔뿐이오나, 그 여관은 그 건물의 미려함과 풍경의 절승(絶勝)이며 그 설비의 장대함으로 말할진대, 실로 프랑스 파리에도 그만한 여관이 드물다 하겠으되, 그 설비에 따라 숙박료가 비싼 고로 조선 사람의 형세로는 감히 숙박할 생각을 염두에도 두지 못할 것이오, 그 다음에는 내지(內地, 일본) 사람의 여관이 가히 유숙할 만하외다.271)

<여관 광고>   
『매일신보』 1915년 7월 20일자에 실린 종로에 있던 조선 여관과 전국 각지의 여관 광고이다.

그렇지만 조선에 거주하던 일반 일본인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조선 호텔이 상류층의 전유물(專有物)임을 꼬집은 글에서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

조선 호텔이라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지어 놓고 벽안주발(碧眼朱髮)의 모당(毛唐, 서양인)이나 모씨(某氏)라고 하는 직함(職銜)을 가진 소위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나 콤마 이하의 주민에게는 간이식당(簡易食堂) 하나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272)

『경성 유람기』의 이 승지는 결국 동행한 학생의 안내로 경성의 조선인 거리에 해당하는 북촌(北村)에 위치한 여관을 숙소로 잡는다. 학생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청진동 중흥 여관을 “방도 청결하고 음식도 정갈하며 위치가 중앙이라 출입이 편리”하다고273)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경성에 여행 온 이들은 무엇을 구경하였을까? 이 승지는 기차를 타고 탄성을 토해 내면서 경성 여행을 시작하는데,274) 청량리역에 내려 전차를 타고 동대문과 종로를 거친 후 종 각을 구경하고 숙소에 든다. 그 과정에서 경성의 학교, 병원과 치과, 종교, 유명한 건축물과 관청의 위치를 소개한다. 이튿날 경성을 두루 살피며 남대문 시장과 박문 서관(博文書館), 파고다(탑골) 공원을 들러 저녁에는 우미관(優美館)에서 활동사진을 구경한 후 명월관(明月館)에서 식사를 하였다.275) 십여 년 만에 경성을 찾았다는 이 승지는 파고다 공원에 들어가서는 경성에 공원이 몇 곳이나 되는가를 물어 공원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276) 그리고 우미관에서 활동사진을 관람하면서 “사진을 영사하는 곳에 태서(泰西, 서양)의 풍물이며 백인종의 활동하는 풍경이 실로 이 승지의 고루한 안목을 놀랠 뿐”이었다. 그 다음에는 경성의 연극장(演劇場)에도 흥미를 보인다. 조선 요리점 명월관에 대해서는 “명월관은 조선 요리의 원조로 화려한 누대와 성대한 설비가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극찬하였다.

<파고다 공원>   
1910년경에 촬영한 파고다 공원 사진이다. 원래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자리인데, 1897년(광무 1) 영국인 고문 브라운의 설계로 공원으로 꾸몄다.
<명월관 광고>   
동아일보사 사옥 신축 축하 광고로 『동아일보』 1927년 4월 30일자에 실은 명월관 광고이다. 조선 명물 요리를 앞세우고 있다.

당시 경성의 음식점을 보면 일본 요리점으로는 지요모토(千代本)·교기꾸(京喜久)·지소세(千歲)·하쿠스이(白水)·가게쓰(花月)·남산장(南山莊) 등이, 조선 요리점으로는 명월관·식도원 등이, 중국 요리점으로는 금 곡원(金谷園)·봉래각(蓬萊閣)·아서원(雅敍園) 등이 있었다.277) 일요일에 이 승지는 창경궁(昌慶宮) 동물원을 구경하고 다음과 같이 감탄하였다.

<창경원 수금실>   
일제 강점기에 창경원의 수금실(水禽室)을 구경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엽서이다. 일제는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전락시켰다.

아프리카 고향을 떠나 만 리 밖에 손이 된 하마는 전신을 물속에 숨기고 얼굴만 수면에 내놓아 눈을 껌적이고 코를 벌룩거리는 모양, 참 장관이라 하겠으며…… 코끼리…… 사자…… 어리석은 곰, 미련한 도야지, 늑대…… 여우…… 캉가루…… 노루…… 산양…… 고슴도치…… 빛 좋은 공작…… 각각 자기의 장점을 자랑하야 혹은 날아내리고 혹 날아오르는 광경은 실로 한번 구경할 만한 바이더라.

이 승지는 경성 여행의 매듭을 선물 구입으로 맺었는데, 이왕직 미술 공장(李王職美術工場)과 동아 연초 주식회사(東亞煙草株式會社)를 방문하고 종로 경성 상회에서 비단을 바꾸고, 영원 상점에서 화장품을 사서 귀향 준비를 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이 한 경성 여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8년에 조선을 여행한 나이토(內藤久寬)는 조선 호텔에 투숙하고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의 초대를 받아 창덕궁(昌德宮)에서 오찬을 하고, 식후에는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과 동물원 등을 참관한다. 박물관은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 위치하여 1910년 10월에 진열을 끝내고 1911년 1월 1일부터 공개하였다. 1910년 3월 식물원 설비도 완성하였다. 나이토는 박물관에 대해 1만 2230여 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식물원과 동물원은 모두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소개하였다.278)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왕가 미술 제품 판매점에 들러 기념으로 정묵(精墨)을 몇 개 구입하였다. 밤에는 고쿠부의 만찬 초대를 받아 조선 요리점 명월관에 갔다. 연회에는 다섯 명의 기생이 나와서 장구를 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기생의 이름은 ‘매홍’, ‘월향’ 등이었다고 한다. 다음날 저녁은 미쓰이 물산(三井物産) 경성 지점 다카노(高野省三)의 초대로 일본 요리점 지요모토에서 먹었다. 이곳은 일본풍의 훌륭한 건물로 주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데리고 온 여성이고 예기도 많았는데, 의상이 훌륭하여 도쿄의 신바시(新橋) 주변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고 소감을 밝혔다.279) 나이토와 이 승지의 경성 여행에서 숙박한 곳이나 들른 음식점은 차이가 있으나 그들이 관람하는 장소나 여행의 마무리를 선물 구입에 두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명월관>   
일제 강점기에 명월관을 촬영한 사진엽서이다. 명월관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요릿집이자 기생집이었다. 순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설립하였고, 여기에 궁중 연회에 참여했던 기생들이 오게 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그 밖에 경성의 명소로 눈길을 끄는 것은 루나 파크라고 소개된 황금 유원(黃金遊園)이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3년 6월 22일자에 게재된 광고에는 원 내에는 큰 폭포가 있고 동물실, 운동 기구, 불가사의 동굴, 안경실, 박물실, 끽다점(喫茶店) 등 설비가 있으며 개원 시간은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이며 일요일이나 제일(祭日)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개장한다고 하였다. 신납량지(新納凉地)로 소개된 이곳은 황금정 4정목(黃金町四丁目)에 있었다고 하는데, 같은 일자 신문에는 이에 대한 기사도 게재되었다.

<황금 유원 광고>   
『매일신보』 1913년 6월 22일자에 실린 황금 유원(루나 파크) 광고이다. 경성 황금정 4정목에 있던 황금 유원을 조선에서 유일한 여름철의 낙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놀기도 좋고 구경도 좋고 보지 못하던 것이 많다고

경성 남부 산림동에 있는 황금 유원에서는 대규모의 루나 파크(공원과 같은 것)를 설비하여 일전부터 개연(開演)하였는데 입장료는 3전에 지나지 않으므로 입장하는 사람이 비상히 많으며 일반 설비가 모두 주밀한즉 불가사의굴이라 하는 곳 가장 이상한 바고, □□의 이치를 이용하여 기묘한 구경이 굴 안에 많이 있으며 그 밖에도 폭포, 운동장 등의 설비가 있고 그 근처에는 조선 연극과 활동사진을 흥행하여 매일 사람이 답지한다는데 개원시간은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요, 일요와 제일에는 오전 10시에 개장한다더라.280)

유원지는 여가와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근대인의 상상력의 공간으로, 19세기 후반에 만국 박람회(萬國博覽會)의 부산물로서 탄생하였다. 원래는 유럽 상류층의 개인 정원에서 밤을 새워 연회를 개최하던 풍습에서 유래하였으나 근대에 이를 시민이 두루 향유할 것을 주창하면서 발달하였다.281) 어뮤즈 파크, 혹은 테마 파크라고도 하였다. 루나 파크는 월세계(月世界)라는 뜻인데 그야말로 밤에 개장하는 유원지였던 것이다. 1910년대 경성에서는 대중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과 활동사진관에 이어 유원지도 등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박람회장>   
광화문 위에서 조선 박람회장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엽서이다. 조선 박람회는 1929년에 경복궁 후원 일대 10만여 평에서 열렸는데, 이와 같은 박람회의 개최는 대중의 여행 심리를 자극하였다.

한편 또 다른 여행객의 모습을 살펴보자. 1929년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別乾坤)』에는 박람회 구경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아저씨 서울 구경 갓다 오섯지요? 그래 서울 구경이 대개 엇덧습딋가? 물론 굉장하섯슬걸이오.”

“구경이고 뭐고 정신이 얼떨떨해서……. 무엇 무엇을 구경하엿는지 좀처럼 아라 낼 수가 업네. 그야말로 소경 단청 구경한 셈이 엿섯네. 그나마 혼자 가서 찬찬히 구경이나 하얏스면 좀 기억이나 남아 잇슬 터인데 단체-ㄴ가 뭔가 드러 가지고 밤낫 서로 꽁문이 붓잡고 쥐꼬리 잡이 내기만 하다가 구경은 다 놋처 버린 셈일세. 생각하면 분해 못살겟네. 공연히 돈만 업새고.”282)

그야말로 ‘단체 관광’의 존재 형태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다. 아울러 서울 단체 관광에서 박람회장을 비롯하여 왕이 사는 창덕궁의 후원까지 구경하는 ‘광영’을 누렸지만 돈은 많이 쓰고 실속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지적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박람회장에 모두 합하야 다섯 번 드러가 보고 총독부 청사와 박물관도 보고 조선 신궁(朝鮮神宮)과 진고개 구경하고 동물원과 식물원 구경하고 한강 철교와 용산 차고 구경하고 장충단 공원과 빠고다 공원 구경하고 조선 극장과 단성사 구경하고 명월관에서 연회 한 번하고 종로 뒤에서 선술 한 번 먹고 뻐쓰와 택구시 서너 번 타 보고 일본 사람들의 가장행렬(假裝行列)을 구경하고 그리고는 또 뭐든가? 올치! 상품 진열관을 보고 경성일보사를 보고 미쓰코시란 일인의 큰 상점을 보앗다. 그리고는 또 업는가? 올치! 시골 사람으로는 더군다나 예전 갓흐면 명함도 못들일 창덕궁 비원을 보앗섯다. 불언궁중수(不言宮中樹)라든 그 지존의 지(地)를 보앗다. 그것도 한 광영일넌지? 그리고는 생각이 안이 난다. 구경은 이것뿐이다. 전후 9일 동안 차비 식비 잡비 아울너 78원 54전 쓰고 구경은 이것분이다. 생각하면 분한 노릇이다. 실속은 아모 것도 업는 그야말로 멍텅구리 헛물 켜기이엿다. 생각할사록 억울하다.283)

이 글은 이어서 “아모리 밧버도 사회적으로 유명한 유지(有志) 몃 분을 차저 보고 지방 사정과 아울러 그들의 정견(政見)이나 좀 듯고 왓더면 그 안이 조홧슬가.”라고 하여 단체 관광이 ‘보여 주는 것’을 그저 ‘보고’ 돈 쓰기만 하기 때문에 마음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한 말은 ‘관광’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여행자는 박람회를 다섯 번이나 들어갔다고 하는데 박람회의 개최는 확실히 대중의 여행 심리를 자극하였으며, 이를 매개로 하여 대중의 획일적인 여행 패턴과 소비와 획일적인 여행 감상이 구조화되는 ‘관광’은 더욱 촉진되었다.

[필자] 윤소영
242)『大衆文化事典』, 東京, 弘文堂, 1991, 174쪽.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1장(황민호)의 글 참조.
243)퍼시벌 로웰, 조경철 옮김,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1, 55쪽.
244)今村鞆, 『朝鮮風俗集』, 斯道館, 1914, 270∼273쪽.
245)이광수, 「오도 답파 여행」, 『반도 강산 기행 문집』, 『이광수 걸작 선집』 제1권, 영창 서관(永昌書館), 1917 : 『한국 현대 수필집 자료 총서』 4권, 태학사, 1987.
246)이와 유사한 사정은 1920년대 여행기에도 보인다. 부산에서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은 여관이래기보다도 도야지 우리의 감이 있었다.”고 하여 일본인 여관에 비해 위생에 턱없이 부주의함을 지적하고 있고, 다른 지방의 경우도 대동소이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김성, 「혼돈, 4년 만에 고국에 와서」, 『개벽(開闢)』 39, 1923.9, 54쪽). 전라북도의 여관의 경우, 손에 대해 불친절하면서도 숙박비는 보통 1원 50전씩 또박또박(음식도 보통이고 침구도 불결하다)받는다고 지적한 글도 있다(거상찬, 「전라북도 답사기」, 『개벽』 64, 1925.12 참조).
247)『在朝鮮內地人紳士名鑑』, 朝鮮公論社, 1917, 364쪽.
248)김원모, 「미스 손탁과 손탁 호텔」, 『향토 서울』 56, 서울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1996 참조.
249)김원모, 앞의 글.
250)한경수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영문판 1904년 8월 4일자를 토대로 경운궁 건너편에 있었다고 지적한 ‘Hotel Palais’인 듯하다(한경수, 「한국 근대 전환기 관광(1880∼1940)」, 『관광학 연구』 29권 2호, 한국 관광학회, 2005, 450쪽).
251)「ソンタクホテルの女將植木お雪の半生記」, 『朝鮮公論』 1915年 9月號 : 한일 비교 문화 연구 센터 편, 『조선 공론』 영인 자료집 7권, 어문학사, 2007.
252)「ソンタクホテルの女將植木お雪の半生記」, 『朝鮮公論』 1915年 9月號.
253)「京城朝鮮ホテルの開業」, 『朝鮮公論』, 1914年 11月號, 53쪽.
254)「京城朝鮮ホテルの開業」, 『朝鮮公論』, 1914年 11月號, 53쪽.
255)「京城朝鮮ホテルの開業」, 『朝鮮公論』, 1914年 11月號, 54쪽.
256)京城府 敎育會, 『京城案內』, 1926, 34쪽.
257)성서학인(城西學人), 「서울의 녀름」, 『개벽』 38, 1923.8.
258)이서구(李瑞求), 「경성(京城)의 짜쓰, 서울 맛·서울 정조(情調)」, 『별건곤(別乾坤)』 23, 1929.9.
259)여기자(女記者), 「남자(男子)의 환락경(歡樂境), 카페 답파기(踏破記)」, 『별건곤』 53, 1932.7.
260)朝鮮總督府 鐵道局, 『大正十五年昭和元年度年譜』, 1926, 37쪽.
261)朝鮮總督府 鐵道局, 『大正十五年昭和元年度年譜』, 1926, 37쪽.
262)國際觀光局·鐵道省運輸局 共編, 『觀光講話資料』, 國際觀光局·鐵道省運輸局, 1938, 7쪽.
263)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四年度年譜』, 1929, 38쪽.
264)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旅行案內記』, 1934.
265)편집실, 「각 방면 각 기관, 경성 통계」, 『별건곤』 23, 개벽사, 1929년 9월 27일.
266)「60만 원(萬圓) 던저 호텔 짓는다는 김옥교(金玉嬌)란 엇든 여성(女性)인가」, 『삼천리(三千里)』 8권 1호, 1936년 1월 1일, 160∼161쪽.
267)김옥교는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이 기생이 되었는데, “소리 잘하고 춤 잘 추고 거문고 잘 타는 김옥교”라고 불리며 경성의 첫째가는 기생으로 명성이 높았다. 30대 초반에 전골 가게를 시작으로 음식업에 투신하여 마침내 ‘천향원(天香園)’이라는 요리점을 열어 당시 식도원이나 명월관과 명성을 다툴 정도로 성공하였다. 윤치호의 일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녀를 총명하고 매력적인 천향원의 경영자라고 적고 있다(윤치호,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1권, 1940년 11월 3일자, 국사 편찬 위원회, 1986).
268)김옥교(金玉嬌), 「60만 원(六十萬圓) 회사(會社)의 여사장(女社長) 자전(自傳), 천향각(天香閣) 호텔 김옥교 여사(女士)의 반생애(半生涯)」, 『삼천리』 10권 5호, 1938년 5월 1일.
269)윤치호, 『윤치호 일기』 11권, 1941년 1월 16일자, 국사 편찬 위원회, 1986.
270)노라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0회 아이엠 쏘리」, 『중앙일보』 2006년 12월 31일자.
271)벽종거사(碧鍾居士), 「경성 유람기(京城遊覽記)」, 『신문계(新文界)』 5권 2호, 1917.2(권보드래, 「자료 해제-경성 유람기-」, 『민족 문학사 연구』 16, 민족 문학사 학회, 2000 소수), 333쪽(이하 『경성 유람기』의 페이지는 이 논문의 페이지를 따랐다.).
272)北山叩天, 「京城より」, 『朝鮮及滿洲』 163號, 朝鮮及滿洲社, 1921.1.
273)벽종거사, 「경성유람기」, 『신문계』 5권 2호, 1917.2, 333쪽.
274)벽종거사, 「경성유람기」, 『신문계』 5권 2호, 1917.2, 325쪽.
275)벽종거사, 「경성유람기」, 『신문계』 5권 2호, 1917.2, 326쪽.
276)벽종거사, 「경성유람기」, 『신문계』 5권 2호, 1917.2, 326쪽.
277)1929년 당시에 경성에는 조선인 경영 요리점이 19, 일본인 경영 요리점이 66, 외국인 경영 요리점이 15군데 있었고, 음식점은 조선인 경영이 1,668, 일본인 경영이 517, 외국인 경영이 15군데 정도였다(「각 방면 각 기관, 경성 통계」, 『별건곤』 23, 1929년 9월 27일).
278)靑柳綱太郞, 『京城案內』, 朝鮮硏究會, 1913, 288∼291쪽.
279)內藤久寬, 『訪隣紀程』, 文光堂書店, 1918, 7∼12쪽.
280)「황금 유원(黃金遊園)의 별건곤(別乾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3년 6월 22일자.
281)『大衆文化事典』, 東京, 弘文堂, 1991, 809∼810쪽.
282)춘파(春坡), 「서울 구경 왓다가 니저 버리고 가는 것」, 『별건곤』 23, 1929년 9월 27일.
283)춘파, 「서울 구경 왓다가 니저 버리고 가는 것」, 『별건곤』 23, 1929년 9월 27일,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