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1. 구중심처 들여다보기

조선의 양궐 체제

조선시대에 왕이 살던 궁궐은 경복궁 이외에도 4개가 더 있었다. 동쪽에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서쪽에 경희궁(慶喜宮)과 덕수궁(德壽宮)이 그것인데, 이를 합쳐 우리는 5대 궁궐이라 일컫는다. 위치나 방향에 따라 동궐(東闕)과 서궐(西闕)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들 5대 궁궐이 조선 왕조와 흥망성쇠를 함께하였다.

시대마다 여러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법궁(法宮)이라 한다. 이곳에는 왕실 생활공간뿐 아니라, 백관의 조회(朝會)를 받거나 외국 사신을 맞는 등 공식적인 활동 공간이 고루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화재나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혹은 국왕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 집무를 보거나 머물고자 할 때 쓰는 별도의 궁궐이 필요하였다. 그런 용도의 궁궐이 바로 이궁(離宮)이다. 이궁은 법궁보다 격이 한 단계 낮지만, 국왕의 공식 활동 공간이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어야 했다. 따라서 이궁이라 하여 법궁에 크게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법궁과 이궁을 동시에 운영한 궁궐 운영에 대해 흔히들 양궐 체제(兩闕體制)라 부른다.61) 조선 건국 이후 태종이 창덕궁을 새로 지으면서 조선의 양궐 체제가 시작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보위에 오른 정종은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묘인 제릉(齊陵)을 참배하러 갔다가 개경(開京)에 눌러앉아 버렸다. 일종의 환도(還都)였던 셈이다. 그 후에 집권한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려 하자 신료들의 반대가 거칠게 일었다. 어디로 천도를 해야 하는가를 놓고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동전을 던져 점을 친 끝에 개경과 무악(毋岳)을 잠재우고 한양 재천도가 결정되었다. 이때 새로 지은 궁궐이 창덕궁이었고,62) 이궁 역할은 시작되었다. 일설에는 정도전과 이복동생을 살해한 현장인 경복궁이 싫어 창덕궁을 새로 조성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창덕궁 전경>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1405년(태종 5) 완공한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복구를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고 1647년(인조 25)에야 복구가 완료되었다.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법궁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런 후 재위 18년의 집권을 끝으로 태종이 물러난 곳이 수강궁(壽康宮)이었다. 후에 성종은 수강궁을 수리하여 한때 대궐의 안주인이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처소로 삼았다. 창경궁이라 새로 이름 짓고 궁궐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63) 그러나 왕이 이곳에서 일정기간 상주하 며 정사를 처리한 적은 없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창경궁은 아직 정식 왕궁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창경궁이 완성됨으로써 조선 전기 양궐 체제가 완성되었다고들 한다.

<경복궁도>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이 황폐한 경복궁을 묘사한 그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은 흥선 대원군이 1865년에 중건을 시작할 때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렇듯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이 법궁이었고, 창덕궁이나 창경궁이 이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법궁인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자,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를 대신해 법궁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이제는 경덕궁(敬德宮, 현 서울 역사 박물관 자리)이 이궁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지은 경덕궁은 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법궁 역할을 맡았던 경복궁이 불타 버리자 조선 후기 내내 궁궐 문제로 바람 잘 날 없었다. 불탄 궁궐을 중건할 여력조차 없었기에 벌어진 사태였다. 한 집안에 가장이 우뚝 서서 중심을 잡아야 하듯이,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수를 두어 경복궁을 중건한 것도 조선 왕실을 상징하던 진정한 법궁을 재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물의 상징성만 찾았을 뿐 실제로 왕실의 힘을 너끈히 보여 주지는 못하였다.

<궁궐 화재를 막는 부적>   
2001년 근정전 중수 공사 때 발견되었는데, ‘龍’ 자 1,000여 자로 ‘水’ 자를 메웠다. 예로부터 신비한 동물인 용은 불도 다스린다고 믿었다.

조선 말기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게 국권을 유지하는 상황 속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터지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는 수모를 겪었고, 이제는 경운궁(慶運宮)이 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덕수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궁궐이 바로 경운궁이었다. 고종이 죽고 순종이 황위를 이어받을 즈음에 고종의 궁호를 따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경운궁 현판>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 현판으로, 고종 황제의 어필이다. 임진왜란 후 ‘정릉동(貞陵洞) 행궁’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창덕궁이 중건되자 광해군이 이곳을 떠나며 경운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굳이 연원을 따지자면 덕수궁은 궁이 아니라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사저(私邸)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蒙塵)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불타 버려 마땅히 기거할 데가 없자 임시 숙소로 정한 곳이었다. 이런 경운궁이고 보면, 아마도 허약하였던 조선을 지켜보던 안타까움도 함께하였을 것이 뻔하다. 고종을 이은 순종은 창덕궁에서 집무를 보았지만, 3년이 채 못 되어 망국의 비운을 맛보야 했다.

이상에서 법궁과 이궁의 역할을 살펴보았지만, 왕이 어느 곳에서 정식으로 집무를 보았는가에 따라 명암이 갈렸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박홍갑
61)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62)『태종실록』 권10, 태종 5년 10월 정해(25일).
63)『성종실록』 권152, 성종 14년 3월 을미(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