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4. 내시

내시가 되는 길

고대 중국에서는 중죄인을 끔찍한 오형(五刑)으로 다스렸는데, 그 중에서 남녀 생식기를 자르거나 유폐시키는 궁형(宮刑)이란 게 있었다. 성기를 절단한 환부에서 살이 부패하여 오랫동안 썩는 냄새가 났기에 이를 부형(腐刑)이라고도 불렀다. 거세당한 자가 탈 없이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통하지 않게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렇듯 밀폐된 방을 누에치는 방과 닮았다고 해서 잠실(蠶室)이라도 하였다. 한 무제에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司馬遷)이 잠실에 갇혀 『사기(史記)』를 완성하였다고 하여, 위대한 역사책 『사기』를 『잠사(蠶史)』라 별칭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내시는 인기 높은 직업이었다. 내시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거세하는 자궁(自宮)이 성행할 정도였고, 또 국가에서 공인한 거세 전문 시술자 도자장(刀子匠)이 성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의 몸에서 잘려 나간 음경(陰莖)이나 음낭(陰囊)을 밀봉하여 말렸다가 승진할 때 제시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니, 중국의 내시 제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측면이 많다.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는 관례가 생겼다는 것은 가짜 내시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내시는 특수 사정 때문에 강제적으로 거세된 자, 사고로 거세된 자, 선천적으로 타고 난 자, 자궁자 혹은 준자궁자(準自宮者)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116)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궁형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국가에서 강제로 거세한 경우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고로 인한 것은 주로 어린아이가 변을 보다 개에게 물린 경우가 많았다. 자궁은 명주실을 어린 아이의 고추에 칭칭 감아 피가 통하지 않게 한 후 저절로 썩어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렇듯 거세되면 남자 기능을 상실하여 얼굴빛이 하얗고 수염이 나지 않으며, 둔부와 다리에 피하 지방이 느는 등 여성스런 신체 구조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중기까지는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자들을 내시로 충당하였다 한다.117) 따라서 이때까지는 내시를 충당하기 위하여 강제로 거세하는 행위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내시가 되는 자는 일반 서민이거나 대개 천한 자의 후손이었다. 그러니 정식 관직도 받지 못하는 천한 직업이었는데, 의종 때에 와서 정함과 백선연(白善淵) 같은 환관에게 문반직(文班職)을 제수한 일이 있었다. 대간(臺諫)의 반대가 있자 의종이 밥을 굶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였으니, 이때부터 서서히 환관의 폐가 나타날 조짐을 보인 것이다.

당시 정함이 받았던 관직은 참상(參上)의 관직도 아니었으나, 그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원종 때 내시 민세충(閔世沖)에게 조관 6품인 참상관을 제수하면서 관례가 깨지기 시작하였다. 왕이 어렸을 때 두 번이나 병을 고쳐 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공민왕에 이르러 내시를 문하부·추밀원의 양부와 무반 8위 반열에까지 참여시켰다. 그러다가 결국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왕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사단을 벌일 정도로118) 큰 폐해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부터 우리나라 내시의 역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이 나타났다. 원 간섭기에 원나라 세조에게 바쳤던 고려인 환관이 천자 조서(詔書)를 받들고 사신으로 자주 왔기 때문이다. 충렬왕의 비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가 자기 아버지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 환관 몇 명을 바친 일이 있는데, 원나라에서 수완과 재주를 부린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기 가족의 요역(徭役) 면제나 친족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식을 고자로 만들거나 스스로 거세하는 자궁이 유행처럼 번졌다. 충렬왕 때 최세연(崔世延)은 마누라 투기가 너무 심해 자궁한 후 내시가 된 인물이었다.119) 권력을 쥔 내시에게 매를 맞아 억울한 심정으로 자궁한 이가 있는가 하면, 과도한 세금 징수를 이기지 못해 자궁한 자도 생겨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사로이 거세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하였고, 중국처럼 출세하려고 내시가 된 기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내시를 보내라는 입공(入貢) 요구가 있을 때도 선천적인 고자를 우선 선발하였다. 이는 고려 말에 내시의 폐해를 절감한 사대부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조선 초기 명나라가 내시 입공 요구를 끈질기게 요구하였다는 점에서120)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로 거세시킨 예도 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내시도 가문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아이를 양자로 삼는 일이 많았는데, 같은 성씨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성 양자(異姓養子)를 통해 가계를 계승하였다. 양자로 입양된 어린 내시는 궁중에서 생활하며 내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 내시 1명 당 4∼5명의 양자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는데, 명종 때는 그 수를 초월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121) 18세기에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 내시부에 의하면, 궁중 내에 어린 내시 90명을 두었다고 한다.

어린 내시가 입궁하면 자질을 시험하였는데, 주로 인내력에 관한 것이었다. 모진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어야만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들어온 어린 내시를 소수(小豎) 혹은 소환(小宦)이라 하였는데, 일종의 견습 내시인 셈이다. 궁궐 청소와 잔심부름, 때로 는 대전에서 왕을 모시는 중요한 임무까지도 실습한 내시는 비상시 비밀 통로를 통해 왕을 업고 탈출하는 연습을 하였다고도 전한다.

[필자] 박홍갑
116)이우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 『사학 연구』 1, 한국사 학회, 1958.
117)『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118)『고려사』 권75, 지29, 선거(選擧)3, 전주(銓注).
119)『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120)『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6월 무진(24일) ; 『태종실록』 권7, 태종 4년 5월 병인(26일) ;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 4월 신미(6일).
121)『명종실록』 권33, 명종 21년 8월 신유(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