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5. 어가 행렬을 통해서 본 왕실의 권위어가 행렬과 왕실의 권위 상징

국왕의 상징인 둑과 교룡기의 등장

어가 행렬에서 국왕이 등장하는 것을 알리는 대표적인 상징이 둑과 교룡기이다. 둑은 어가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 깃발로, 큰 창에 소의 꼬리를 달거나 또는 창에 삭모(槊毛)를 달아서 만들며, 말을 탄 장교 한 사람이 이를 받들고 간다. 교룡기는 어가 행렬에서 둑 다음에 서는 큰 기로, 누런 바탕의 기면에 용틀임과 구름을 채색으로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을 상징하는 붉은 헝겊이 달려 있다. 깃대의 머리에는 세 갈래의 창날이 있고 그 밑에 붉은 삭모가 달렸다. 군복을 입은 말 탄 장교가 잡고 4명의 군사가 깃대에 맨 줄을 한 가닥씩 잡아당기는 모습이다. 둑과 교룡기는 국왕의 어가인 대가(大駕)가 나타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데, 둑과 교룡기의 등장 이후 행렬의 숫자가 훨씬 늘어나고 모습도 더욱 화려해짐은 화면에서 금방 느낄 수 있다. 서서히 본격적인 어가 행렬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룡기 부분 행렬>   
어가 선도 행렬을 뒤이어 독과 교룡기, 각종 의장기와 의장물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왼쪽부터 앞의 금군별감을 이어 교련관(3명)-독-교룡기-주작기-황룡기-보마(2필)-상서원 관리와 내시(2명)-의대(衣襨)-상서원 관리와 내시-천하태평기-교의(交椅, 의자)-각답(脚踏, 받침)-군왕천세기의 순으로 행진하고 있다. 주작기부터 좌우 측면에는 가구선인기·봉황기·홍문대기 등의 의장기, 표골타와 웅골타, 등자(鐙子)·장도(粧刀)·입과(立瓜)·횡과(橫瓜)·작자(斫子)·월부(鉞斧) 등의 의장물이 행렬의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교룡기 다음의 중앙에는 주작기(朱雀旗)와 황룡기(黃龍旗)를 든 사람이 나타나고, 이어서 어보를 실은 보마(寶馬) 2필(갈색 1필, 흰색 1필)이 따른다. 궁중의 옥새·부패(符牌)·절월(節鉞)을 관장하는 관청인 상서원(尙瑞院) 관리가 중앙에 등장하는 것도 어보의 중요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보마와 상서원 관리, 내시가 가는 좌측과 우측에는 각종 의장기 행렬이 화려하게 등장하여 어가 행렬의 화려함을 더해 준다.

<백호기>   
대오방기(大五方旗)의 하나로, 본래 진영(陣營) 오른쪽 문에 세워서 우군(右軍)을 지휘하는 데 사용하였다. 어가 행렬의 의장기로도 사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화면의 측면에 드러난 깃발은 가구선인기(駕龜仙人旗),151) 봉황기(鳳凰旗), 홍문대기(紅門大旗), 백호기(白虎旗), 현무기(玄武旗), 정사기(丁巳旗), 정미기(丁未旗), 정축기(丁丑旗), 백택기(白澤旗), 백학기(白鶴旗), 삼각기(三角旗), 용마기(龍馬旗) 등이다. 깃발 뒤에는 표골타(豹骨朶)와 웅골타(熊骨朶)가 보인다. 표골타는 붉은 칠을 한 봉에 머리를 둥글게 하여 표범가죽을 씌운 의장이며, 웅골타는 표골타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표범가죽 대신에 곰가죽을 씌운 것이다.

중앙에는 천하태평기(天下太平旗)나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처럼 왕실의 영원한 번성을 기원하는 의장기가 등장한다. 천하태평기와 군왕천세기가 보이는 행렬의 가장자리에는 깃발과 각종 의장물이 등장한다. 명령을 전달하는 깃발인 영자기(令字旗)를 비롯하여, 금자기(金字旗)·가서봉(哥舒棒)·은등자(銀鐙子)·금등자(金鐙子)·금장도(金粧刀)·은장도(銀粧刀)·주작당(朱雀幢)·청룡당(靑龍幢)·금립과(金立瓜)·은립과(銀立瓜)·금횡과(金橫瓜)·은횡과(銀橫瓜)·금작자(金斫子)·은작자(銀斫子)·뇌(牢)·정절(旌節)·정(旌)·금월부(金鉞斧)·은월부(銀鉞斧)·봉선(鳳扇)·작선(雀扇)·용선(龍扇) 등 각종 의장물이 행사의 화려함과 함께 왕실의 존엄성과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부채를 귀한 사람에게 주는 상징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어가 행렬에도 등장한 것이다.152)

의장기 중에서 금월부, 은월부처럼 도끼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 역시 왕의 권위와 관계가 깊다. 도끼는 선사시대 이래로 남성 노동 내지 활동을 상징하였다. 도끼를 사용하여 나무를 베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주로 남성이었다. 동양에서 선사시대 이래로 남성 위주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 역사를 주도해 온 왕을 비롯하여 사(士), 부(父) 등의 한자도 도끼의 상형 문자(象形文字)라는 점은 도끼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 준다. 도끼는 조선시대 왕의 물리적 강제력을 상징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의미하였다. 전쟁이 발생하면 왕은 출정하는 장수에게 도끼를 내려 주었는데, 이는 왕의 생사여탈권을 그 장수에게 이양한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또한 도끼가 왕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왕이라는 글자 자체의 어원과 관계가 있다. 즉 ‘왕(王)’이라는 한자가 도끼의 모습을 본뜬 상형 문자이기 때문이다. 도끼 자체는 대상물을 자르는 도끼의 날과 그 반대쪽의 도끼머리 그리고 중간에 도끼 자루를 끼우는 구멍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세 부분의 모습을 형용한 글자가 바로 왕이라는 것이다.153)

<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의(扆) 그림을 옮겨 그린 것이다. 의는 왕의 임종 장소에 설치하는 병풍이다. 왕을 상징하는 붉은색 도끼 무늬를 수놓았다.

도끼는 왕을 상징하는 문양으로도 자주 썼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왕은 즉위식이나 종묘 또는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아홉 가지 문양이 들어간 신성한 옷인 구장복을 입었는데, 그 문양 중에는 도끼도 들어 있었다. 아홉 가지 문양 중 도끼 문양을 보(黼, 반흑반백(半黑半白)의 빛으로 자루가 없는 도끼 모양을 수놓은 것)라 하였고, 보는 악에 대한 징벌권(懲罰權) 내지 생사여탈권을 상징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료나 유생이 도끼를 짊어지고 대궐 앞에 가서 상소문을 올린 경우가 있었는데,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왕의 생사여탈권을 의미하는 도끼로 자신을 죽여도 좋다는 상징적 행위였다.154) 그 밖에 도끼 문양은 왕이 사용하는 병풍, 방석 등에도 썼다. 왕이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를 때쯤에도 붉은 도끼 무늬를 수놓은 병풍을 둘렀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왕의 권위를 지키려 한 것이다.

[필자] 신병주
151)의장기의 하나로 흰 바탕에 도관을 쓴 신선이 거북을 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도교적인 색채가 풍긴다.
152)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부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에 보인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은 사신 편에 대화살(竹箭)과 함께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인 공작선(孔雀扇)을 보냈다. 부채가 귀한 사람에게 주는 상징물로도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조선시대 주요 왕실 행사에는 부채가 꼭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부채는 외국에도 인기가 있었다.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부채는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몽고 등지에 국교품(國交品)으로 전달되었다. 명나라 사신들은 특히 조선의 부채에 관심을 보였다. 1622년(광해군 14)에는 명나라 사신에게 백선(白扇) 224자루, 유선(油扇, 기름 먹인 부채) 1,830자루를 준 기록이 보인다. 일본의 도쿠가와시대에는 조선 부채를 모방하여 조선골선(朝鮮骨扇)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153)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 기획, 1998, 75∼76쪽.
154)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 출판, 2001, 5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