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

왕실의 불교 신앙

조선 초기의 국왕들도 불교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불교 사찰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여 새 왕조의 재정적 기반으로 삼기도 하였지만, 왕실의 불사(佛事)나 개인적 신앙에는 열심인 경우가 많았다. 태조 는 물론 정종, 태종, 세종도 모두 겉으로는 유교를 존중하고 장려하면서 안으로는 불교를 믿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석왕사>   
조선 후기에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 일대를 묘사한 그림이다. 석왕사는 고려 말에 무학 대사(無學大師)가 근처 토굴에서 수행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꿈을 풀어 준 것을 인연으로 태조가 크게 창건하였다고 한다. 서산 대사(西山大師)가 지은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 따르면, 태조는 즉위 전부터 석왕사를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 삼아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개설하였고, 각종 전각을 지을 정도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태조는 재위 기간 동안 전국 여러 곳에 사찰을 창건하였고, 사대부 관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억불책(抑佛策)을 실시하지 않았다. 1398년(태조 7) 이후 권좌에서 밀려나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는 태종의 불교 억제책에 반발하기도 하였다. 정종도 불교를 배척하는 사대부 관료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1400년(정종 2) 경연(經筵)에서 하륜(河崙)이 불교가 귀신과 다를 바 없이 허탄한 것이라고 하자, 정종은 귀신이 허망한 것이 아님을 자신의 경험을 들어 설명하고, 불교의 자비 불살생(不殺生)과 유교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이치가 서로 가깝다고 하였다.142) 종교적 신비를 허망한 것으로 보지 않고 유교적 이념과 불교의 교리를 조화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은 유교를 신봉하는 군주로 자처하였고, 여러 가지 억불책을 시 행하여 조선 초기 군주들 중에서 불교를 가장 강하게 배척한 왕으로 인식되었다. 1405년(태종 5) 11월에는 전국의 불교 사찰을 242개소만 남겨 두고 그 외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군자감(軍資監)과 전농시(典農寺)로 환수하는 억불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도 왕실에 우환이 있을 때는 궁궐에서 불사를 열었고, 태조나 왕비가 위독하였을 때는 스스로 불공(佛供)을 올리기도 하였다. 태종은 국가의 통치에서는 불교의 기능을 배척하였지만, 종교적 성격과 기능은 인정하였다. 곧, 불교가 나랏일에 관여하지 않는 한 불교 본래의 자비 정신과 부처의 권능은 인정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漢)나라 이래로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1,000여 년이 되었다. 역대 제왕들 중에는 이를 존숭하여 믿은 이도 있었고, 혹은 훼방하여 배척한 이도 있었고, 또 믿지도 않고 훼방하지도 않아 그 하는 대로 내버려둔 이도 있었다. 이는 여러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서 지금 모두 상고할 수 있다. 나는 화나 복을 두려워하거나 부처에게 아첨하는 자가 아니다. 즉위하던 처음에 일관(日官)이 “아무 절은 그대로 두어야 하고, 아무 절은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므로, 그 말을 신용하여 즉시 시행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니, 불씨(佛氏)의 무리가 비록 이단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자비를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 또 이미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 입산(出家入山)케 하였으니, 국가의 일에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143)

세종은 치세(治世) 초기에 태종대에 남겨 둔 사원의 노비를 모두 혁파하고 불교 교단을 선교 양종(禪敎兩宗)으로 축소 통합하는 등 불교 억제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말기에는 불교에 대한 숭배의 태도가 과도하여 신하들의 반발을 샀다. 세종은 치세 중반 이후에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을 중건하는 등 많은 불사를 행하였고, 승려의 도첩을 남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사리각을 중건하는 동안 부처의 사리 곧 불골(佛骨)을 궁중에 안치하기도 하였다.144) 이는 바로 당나라의 한유(韓愈, 768∼824)가 ‘불골표(佛骨表)’에서 비난한 것이었다. 신하들이 이를 근거로 불교를 숭배하면 국운이 쇠한다는 논리로 세종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역대 군왕으로서 불교를 숭배해서 치세가 오래 간 분도 있었고, 혹은 불교를 배척하여 국운을 더욱 재촉한 분도 있었다. 초급 관료들이 어찌 화복(禍福)과 존망의 이치를 알겠는가.” 하고 힐책하였다.145)

<내불당도(內佛堂圖)>   
16세기 중엽에 궁중에서의 숭불(崇佛)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궁궐의 한 전각(殿閣)을 법당(法堂)으로 만들어 안에 불상을 모신 것을 볼 수 있다. 본디 내불당은 1448년(세종 30)에 경복궁 안에 지은 것으로 건립 당시 유신(儒臣)과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 왕비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타계한 이후 불교 신앙에 깊이 빠졌다. 그는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여러 사찰을 돌며 재(齋)를 올리고, 1만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또 왕자들에게 사경(寫經)을 시키고,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만류하는 신하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그들을 비꼬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대들은 고금(古今)의 사리를 통달하여 불교를 배척하니 현명한 신하라 할 수 있고, 나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불법만을 존중해 믿으니 무식한 임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대들이 비록 번거롭게 굳이 청하지만 현명한 신하의 말이 반드시 무식한 임금에게는 부합하지 않을 것이며, 무식한 임금의 말이 현명한 신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146)

이러한 세종의 만년 불교 숭신(崇信)에는 수양 대군(首陽大君)과 안평 대군(安平大君) 두 아들의 영향이 컸다.147) 또 유명한 불교 신자였던 형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영향도 있었다. 특히 후에 세조가 된 수양 대군은 흥천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드릴 때 승려들 속에 섞여서 일을 주선하며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불교를 혹신(惑信)하였다. 그는 한때 “불교는 유교보다 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불교를 비판한 것은 불교를 깊이 알지 못한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48) 수양 대군은 일찍이 내불당에서 경찬회(慶讚會)를 할 때 성임(成任)에게 노골적으로 “너는 공자와 석가 중에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스스로 설명하기를, “석씨(釋氏)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라고 하기도 하였다.149)

<세조 어진>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세조의 어진이다. 이 그림은 불가(佛家)에서 그린 독특한 것으로, 일반적인 어진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 않다. 세조는 수양 대군 시절부터 많은 불사(佛事)를 주관하였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국역 간행하였다.

세조는 대군 시절에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는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다. 특히 1457년(세조 3)에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불경을 사경하기도 하였다. 1461년(세조 7)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경을 국역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등의 고승과 대신 윤사로(尹師路)·황수신(黃守身)·김수온(金守溫)·한계희(韓繼禧) 등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능엄경(楞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원각경(圓覺經)』 등의 언해본(諺解本)이 간행되었고, 『범망경(梵網經)』, 『지장경(地藏經)』 등도 간행되었다.

<수미 왕사 진영>   
세조대 승려인 수미 왕사의 진영이다. 수미는 세조가 추진한 불경 언해 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15세기 중엽에 도갑사(道岬寺)를 크게 중창하는 등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458년(세조 14)에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50질씩 인쇄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소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64년(세조 10)에는 서울의 옛 흥복사(興福寺)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1467년(세조 13) 원각사에 건립한 높이 12m의 대리석 석탑이다. 세조는 원각사 창건을 위해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설치하고, 큰 종을 주조하기 위해 전국에서 동(銅) 5만 근을 모으게 할 만큼 불교를 숭신하였다. 원각사는 연산군 때 폐사(廢寺)되었고, 지금은 탑과 비만 남아 있다.

이렇게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국가 통치의 입장에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개인 신앙으로 불교를 믿고 불사를 행하기도 하였다. 유교의 통치 이념이나 윤리 도덕에 못지않게 불교적 구원(救援)이나 기복(祈福)과 같은 종교적 요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주들의 태도는 당시 일반 사회의 불교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필자] 이영춘
142)『정종실록』 권3, 정종 2년 1월 10일 을해.
143)『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 11월 1일(임자).
144)『세종실록』 권117, 세종 29년 9월 24일(계축).
145)『세종실록』 권78, 세종 19년 7월 29일(정사).
146)『세종실록』 권111, 세종 28년 3월 28일(을미).
147)『세종실록』 권121, 세종 30년 8월 5일(무오).
148)『세종실록』 권125, 세종 31년 7월 1일(기묘).
149)『세종실록』 권122, 세종 30년 12월 5일(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