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5장 소리의 기록, 음반사3.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1945년∼1960년대 중반 유성기 음반

1896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 사람이 녹음한 유성기 음반은 7,000종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서양 음악 유성기 음반은 대개 12인치 크기로, 우리 음악 유성기 음반은 대부분 10인치 크기로 제작되었다. 12인치 크기의 서양 음악 유성기 음반은 한 면에 약 4∼5분 정도 녹음되어 있으며, 10인치 크기의 우리 음악 유성기 음반은 한 면에 상대적으로 적은 약 3분 정도가 녹음되어 있다. 우리 음악 유성기 음반은 특수한 경우에만 12인치 크기로 제작되었고 동요, 동화, 동화극 등 아동반의 경우에는 8인치 크기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유성기 음반은 근현대 우리 문화 예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이다. 광복 이전의 우리 음악 관계 동영상 자료로는 극장 개봉용 영화 일부와 일본, 미국 등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찍어 간 영화 필름 몇 가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광복 이전의 음악 등 우리 문화 예술 전반을 이해하려면 현재로서는 장르의 다양성으로나 자료의 양적인 측면에서나 유성기 음반이 첫손 꼽히는 연구 대상이 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에는 유성기 음반이 아니면 전설적인 음악가의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음반은 현재 유일하게 남은 타임머신과도 같은 존재로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옛 음반을 활발히 복각하고 있다. 그런데 복각 음반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음질이다. 즉, 복각 음반은 대부분 유성기 음반의 마스터 테이프라 할 수 있는 원반이 없어서 중고 유성기 음반으로 복각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음질이 감상의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다행히 일제 강점기에 가장 많은 양의 우리 문화 예술 음반을 제작한 일본 콜롬비아 음반 회사와 빅타 음반 회사의 원반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고, 우리나라 음반 회사가 그 원반 녹음을 들여와서 수십 년 전의 음악을 비교적 깨끗한 음질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는 일본의 직배 음반 회사 체제에서 벗어났고 이때부터 자력으로 음반을 제작하면서 음반 산업이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광복 직후 우리나라에는 레코드 프레스 공장이 한 군데도 없었다. 왜냐하면 1940년대 초반까지도 녹음은 대개 일본에서 이루어졌고 서울에는 1937년 오케이 레코드가 다옥동(현재 다동)에, 1940년대 들어서 폴리도르 레코드가 충무로 3가에, 콜롬비아 레코드가 인현동(일본인 전용극장 대정관 자리)에 설치한 간이 녹음실만이 일부 있었을 뿐 프레스 공정은 모두 일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40년대 후반의 아리랑 음반>   
미국 음반 회사에서 발매한 아리랑 유성기 음반으로, 1940년대 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현제명과 함께 양악식 가곡 분야에서 맹활약했던 성악가 이금봉이 함께 녹음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다. 광복 후 음반 제작 시설이 미비했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 음반 산업의 첫 걸음은 오케이 레코드 사장의 매부뻘 되는 김성흠이 일제 강점기 말 일본에 건너가서 습득한 레코드 원판 제조 기술과 프레스 공법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김성흠은 일본에서 배운 기술로 기름 짜는 압축기를 개조하여 레코드 프레스를 만들고 원초적인 방법으로 유성기 음반을 제작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에는 음반 원료가 귀하였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생산된 유성기 음반을 수집하여 중고 유성기 음반 표면을 녹이고 그 위에 새로운 소리 골을 새기는 식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녹음 기술, 표지 디자인, 인쇄 기술이 매우 조잡하였다. 이때 제작된 음반은 생산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아주 희귀하며 신문이나 음반 표지 광고에서만 확인되는 음반이 많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나온 특별반은 일본 음반 회사에 위탁하여 제작해 오기도 하였다. 한 사례를 들면 6·25 전쟁 전후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주식회사 삼화 교역사(株式會社三和交易社) EL-1001-A·B 문교부 공인(文敎部公認) 교육용(敎育用) 레코-드’254) 음반의 표면 기록에 의하면 일본 빅타 음반 회사에서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유성기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코로나 레코드, 서울 레코드, 고려 레코드, 오아시스 레코드, 킹스타 레코드, 신세기 레코드(신신 레코드), 도미도 레코드, 유니버살 레코드, 노벨 레코드, 대성 레코드, 백조 레코드, 문교 레코드, 서라벌 레코드, 아세아 레코드, 오케이 레코드, 럭키 레코드, 오리엔트 레코드, 스타 레코드, 스파르타 레코드, 신동아 레코드, 실버스타 레코드, 아리랑 레코드, 평화 레코드, 힛트 레코드, 미도파 음반 공사, 은성 레코드, 삼성 레코드, 평화 레코드 등이 있다.

<1960년대 축음기>   
1960년대에 사용하던 축음기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중반까지 유성기 음반을 계속 발매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에 전축보다 유성기가 훨씬 많이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제작된 유성기 음반은 대부분 가요였고 국악은 드물었다. 그리고 국악 중에서는 민요가 주로 취입되었다. 광복 후 음반 회사 가운데 오아시스 레코드, 킹스타 레코드, 신세기 레코드, 도미도 레코드, 유니버살 레코드가 국악 유성기 음반을 가장 많이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오아시스 레코드, 킹스타 레코드, 신세기 레코드는 민요뿐 아니라 불교 음악, 무속 음악, 풍물, 산조, 시조 등 여러 장르의 국악 음반을 제작하는 열성을 보였다. 특히 킹스타 레코드는 해외 소개용 국악 음반까지 제작한 바 있다.

우리나라 유성기 음반은 초기 장시간 음반(LP) 시대(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발매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축(電蓄)보다 유성기가 훨씬 많이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 유성기 음반은 장시간 음반에 밀려 음반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유성기 음반은 1,000장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국악 음반은 350장가량, 나머지는 대중 가요일 것으로 추측된다.255)

<전축>   
1960∼1970년대에 인기를 끈 천일사의 별표 전축이다. 테이프 플레이어, 라디오, 앰프 일체형 본체에 장시간 음반 재생용 턴 테이블을 올려 놓았다. ‘전축(電蓄)’은 ‘전기 축음기’의 준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전축과 녹음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필자] 노재명
254)노재명 소장. 유성기 음반 관리 번호 MIPSP-0011∼0019.
255)노재명, 『판소리 음반 걸작선』, 삼호 출판사, 1997, 7∼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