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사미
쌀은 국가나 국왕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 공신(功臣)이나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장수에게 지급되는 물품이 쌀이었다. 국가에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 내리는 하사품(下賜米)이었다. 고려에 귀순(歸順)한 외국인에게도 하사되었다. 국왕 이 지방을 행차하면서 쌀을 하사하여 은혜를 베푸는 경우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을 때,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 쌀이었다. 국가에서 특별히 경축할 만한 일은 많았다. 국왕의 즉위, 왕비와의 결혼, 중국으로부터의 책봉(冊封) 등등. 경축일에는 이를 상징할 만한 국가의 조처가 수반될 때 그 경사스러움을 더욱 드러낼 수 있게 마련이다. 숙종이 즉위할 때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숙종은 즉위 과정이 특별하였다. 선대(先代) 국왕인 헌종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재위한 지 약 1년 5개월 만에 왕위를 숙부인 계림공(鷄林公) 희(熙)에게 양위(讓位)하였고, 그 과정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모종의 갈등이 개재(介在)하여 있었을 것이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이어받은 계림공 희가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의 즉위 과정이 그러하였기에 혹시 있을 불만 세력이나 적대 세력을 무마할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숙종은 즉위 직후 대대적인 은혜를 베푼다. 죄수를 사면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덕호(德號)를 덧붙여 주고 백성으로 나이 80이상인 자, 병이 심하게 걸린 자(篤癈疾者),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孝子), 순손(順孫), 환과(鰥寡), 고독(孤獨) 등에게 물품을 하사한다. 또 여러 군인에게 쌀과 포를 나누어 주었다.117) 숙종의 즉위를 하늘도 인정한 것일까. 1098년(숙종 3)에는 상서로운 현상도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광군(靈光郡)과 관내(管內) 군현에서 벼가 두 번씩이나 수확되는 경사가 있었다.118)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나라에서 쌀을 나누어 주는 것은 숙종대만이 아니라 여러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무신 정권이 탄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174년(명종 4) 무신 정권에 저항하는 반란이 서경(西京: 평양)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그것으로, 약 1년 동안 전국을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한 사건이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역시 은전(恩典)을 대규모로 베풀었다. 죄수 사면, 명산대천에 호를 덧붙이고, 서경 반란 진압에 동원된 군사들에게 쌀 1석씩을 하사하였다.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