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조선시대의 벼농사와 쌀

2. 벼농사 확산과 인구 증가

조선시대 내내 총 경작 면적 자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총 경작 면적 중 논의 비중은 18세기 이후로 크게 늘었다. 반면에 밭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논의 확대가 일반 백성들도 결국 주식으로 쌀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면 실제로 18세기 이후 논의 확대, 즉 밭의 논으로의 대체는 사회 전체적으로 얼마나 인구 증가를 가져왔을까?

조선시대 벼농사 확대와 인구 증가 문제를 언급하기 전에, 전통 사회에서 토지와 인구의 관계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전통 사회에서 인구 증가로 발생하는 농업의 변화는 대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190) 첫째 단계에서는 경작지가 아니었던 땅이 새롭게 경작지로 바뀐다. 이때 인구압(人口壓)의 정도에 비례해서 경작지가 확장된다. 물론 새 경작지를 만드는 데는 해당 시기 농업 기술상의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대개 전통 사회에서 농업 기술은 느리게 발전하므로, 어떤 시기에 농업 기술은 일정하게 주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둘째 단계에서는 이제 남아도는 땅이 거의 없으므로, 같은 땅에서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리기 위한 신기술이 보급된다. 예를 들어 시비법(施肥法)을 발전시켜서 몇 년에 한 번씩 밖에 농사를 짓 지 못하던 땅에서, 매년 농사를 짓는 방법을 발전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191)

앞서 말하였듯이 크게 보면 조선시대 농업은 이미 경작지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인구 증가에 대처하는 단계에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새로 개간한 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조선 초기에 연작상경(連作常耕) 단계, 즉 전체 경작지 중에서 매년 농사짓는 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단계에 있었다.192)

여기에 더해서 한 가지 명확히 할 것은, 조선은 거의 완전한 농경 사회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매우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조선의 인구 문제를 생각할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선시대에 농업은 자원을 활용하는 가장 압도적인 사회적 방식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떤 사회나 그 사회의 최대 인구 규모는 그 사회가 쓸 수 있는 자원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기존 자원을 새롭게 이용하는 방법이나 새로운 자원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모든 사회는 어떤 절대적 인구 증가의 한계를 갖게 된다. 조선시대에 농업 이외의 다른 산업, 즉 다른 방식의 자원 이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조선시대에 대한 엄밀한 역사 인구학적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193) 일반적 인구사 연구의 성과를 통해서 조선시대 인구의 대체적인 윤곽과 흐름은 포착할 수 있다.194)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건국(1392)부터 임진왜란(1592)까지는 대체로 인구가 증가한다. 조선 초의 인구 수준은 대략 600만 내지 700만 정도였고, 16세기 중반 무렵에 최고조의 증가를 보여 준다. 이 시기 인구는 900만에서 1,000만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6세기 중반까지 착실히 증가하던 인구는 16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정체 상태를 맞는다. 이 1,000만 정도의 인구는 밭농사 중심의 조선 전기 농업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댓값이었다.

임진왜란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인구수는 큰 폭으로 감소한다. 그 이유 는 당연히 왜란(1592∼1600)과 호란(1627, 1637) 때문이다. 잇단 전쟁에 따라 줄어들었던 인구는 대략 17세기 중반 혹은 후반에 이르러 16세기 말의 수준으로 회복된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시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여, 18세기 후반 조선의 전체 인구는 대략 1,500만 전후에 도달한 것 같다. 이 시기의 인구 증가 속도는 조선시대 전체로 볼 때도 가장 빨랐다. 19세기 인구 양상에 대해서는 정체하였거나 약간 줄어들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약간 증가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모내기>   
18세기에 그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 중의 모내기 장면이다. 중국풍으로 그렸지만 당시의 모내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모내기가 일반화되고, 논의 면적이 늘어나면서 벼농사가 확산되자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인구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의 인구는 실제로 16세기 중반의 인구와 비슷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확인하였듯이, 이 시기까지는 총 경작 면적 중에서 논이 차지한 비중이 이전 시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 벼농사 확대의 기술적 조건이었던 모내기가 일반화되고, 총경작지 중에서 밭이 줄어들고 논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그러한 인구 증가야말로 벼농사 확대의 궁극적 결과였다. 16세기 중반 최대 1,000만 정도의 인구가 조선 전기 밭농사의 최종적 결과였다면, 19세기 1,500만 전후의 인구는 16세기와 거의 변함없는 총경작지에서 벼농사 확대가 가져온 최종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8세기 이후 벼농사 확대는 기존 조선 인구를 거의 50%까지 증가시켰다.

조선 후기에 벼농사가 확대될 수 있었던 기술적 조건은 모내기였다. 이 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었다.195) 그런데 17세기와 18세기에 모내기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졌다.196) 17세기의 모내기는 김매는 횟수를 줄여서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중시되었다. 모내기를 하면 직파법에 비해서 논에 풀이 덜나고, 또 이미 난 풀을 뽑기도 수월하였다. 이렇게 17세기의 모내기가 노동 생산성 향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은, 왜란과 호란 이후의 인구 감소 때문이었다. 줄어든 노동력으로 벼농사를 지으려면 품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의 도입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모내기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이었다.

18세기에는 모내기의 성격이 크게 바뀐다. 모내기의 성격이 노동 생산성을 위한 농법에서 토지 생산성을 위한 농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즉, 품을 아끼려던 것에서, 품이 많이 들어도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더 내려는 쪽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사실 18세기에는 더 이상 노동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면서 호당(戶當) 평균 경작지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197) 적은 땅에서 더 많은 소출을 내야,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모내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에 조정에서도 모내기를 허용하자는 주장과 금지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이때 우하영(禹夏永, 1714∼1812)과 같은 농촌 지식인은 전국에 걸친 철저한 관행 조사를 통해서 모내기와 수원(水源)의 관계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수원이 전혀 없거나 부족한 천수답(天水沓)에서 오히려 모내기가 필요하였다. 우하영은 모내기를 하지 않으면 논을 아주 버리게 되므로 모내기가 유리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이 당시 조선의 많은 논은 모내기가 아니면, 벼농사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이미 밭농사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는 상태였기에, 모내기가 아니면 농사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우하영이 전하는 현실은, 모내기는 반드시 수원이 있어야 가능한 농법이라고 알려졌던 이전의 상식과 정반대의 내용이었다.

이런 모내기 성격 변화의 배경에는, 이것을 주도한 계층의 변동이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내내 중앙 정부가 주도한 치수 행정에 의한 토지 생산성 증가폭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주와 농민들이 추진한 소규모 수리 사업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실제로 16세기에 제언이나 보의 확충을 통해서 벼농사를 확대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17세기 이후 벼농사를 확대하던 층 역시 대농층(大農層)과 신흥 지주층(新興地主層)이었다. 또 18세기에 모내기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던 사람들은,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서 생존 위기에 내몰렸던 소농민층이었다. 논에서 단위 면적당 토지 생산성이 가장 발전하였던 때가 바로 18세기였다.198) 물론 이들이 모내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모내기 자체의 지속적인 기술 개발이 있었다. 물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모를 낼 수 있는 방법(건앙법)의 개발이나, 새로운 시비법 개발에 의한 산출량 증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 위기에 내몰리면서 어떻게든 농사를 지으려던 대다수 소농층이 기울인 간고(艱苦)한 노력이다. 이들이야말로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논 면적 확대와 쌀의 주식화(主食化), 그리고 빠른 인구 증가를 이루어냈던 주인공이다.199)

[필자] 이정철
190)토니 미첼(Tony Michell), 「조선시대 인구 변동과 경제사」, 『부산사학』 17, 부산사학회, 1989, 98쪽. 인구와 농업 기술의 관계에 관해서는 Ester Boserup의 연구가 도움이 된다(Population and technological chan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191)이 두 가지 방법이 언제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방법은 단계적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공존하였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당대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192)이호철, 『조선 전기 농업 경제사』, 한길사, 1986.
193)미야지마 히로시, 「한국 인구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대동문화연구』 46,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4.
194)이 중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권태억·신용하, 「조선 왕조 시대 인구 추정에 관한 일 연구」, 『동아문화』 14,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77 ; 이영구·이호철, 「조선시대 인구 규모 추계」(Ⅰ·Ⅱ), 『경영 사학』 3, 한국경영사학회, 1988 ; 토니 미첼, 앞의 글 ; 고수환·이영구, 「조선 후기의 인구 변동과 농업 생산 양식」, 『사회 과학 논총』 12, 안동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0 등을 들 수 있다.
195)대표적이면서도 선구적인 연구로는 김용섭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김용섭, 「조선 후기의 수도작 기술」,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2 ,일조각, 1974.
196)고수환·이영구, 「조선 후기의 인구 변동과 농업 생산 양식」, 『사회 과학 논총』 12, 안동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0, 40쪽.
197)이호철, 「조선 후기 농업과 사회 발전의 역사적 성격」, 『경북대 농학지』 13,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1995, 3쪽.
198)이호철, 앞의 글, 1989, 215쪽.
199)국가 전체적으로 단위 면적당 인구 밀도는 1550년부터 1825년까지 68% 증가한다. 삼남만을 따지면 107%가 상승한 셈이다(이호철, 앞의 글, 1995,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