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조선 전기 농업 발달과 농촌 사회 그리고 농민2. 농지 개간과 수리 시설 축조

제언의 수축과 관리

조선 정부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리 시설을 마련하고 이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또한 향촌 사회의 지배층과 농민들도 제언(堤堰) 등의 수리 시설을 축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조정에서는 제언의 수축과 관리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화성 서호>   
1799년(정조 23)에 만든 저수지로 경기도 수원에 있다. 당시 축만제(祝萬堤)라 이름을 붙였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호(西湖)로 불리게 되었다. 정조대에 축만제를 축조하고 아래쪽 들판에 물을 대었는데, 그 들판을 서둔(西屯)이라고 불렀다. 제언의 축조와 진황지의 개간은 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도 저수지의 축조는 마찬가지로 새로운 몽리답(蒙利畓)을 만들어 내었다.

1395년(태조 4) 도평의사사에서 전(前) 낭장(郎將) 정분(鄭芬)의 진언(陳言)에 근거하여 제언 관련 규정을 만들었다.361) 이에 따르면 제언의 구성 요소에서 특히 수구(水口)를 강조하였다. 돌로 만든 수로인 석구(石溝)를 설치하는데, 석구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수통(水桶)을 설치하고, 바깥쪽에는 나무로 만든 목조(木槽)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언 구조는 제언에 가두어 둔 물을 잘 활용하는 데 적합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8도 군현의 면 (面) 지역에 임명된 권농관은 권농뿐 아니라 수구와 같은 제언의 구조물 관리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서호>   
1920년대에 서호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시대 서호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제언 수축에서 수구 같은 구조물과 더불어 중요한 요소는 오래도록 제언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과 제언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몽리(蒙利, 수리 시설에 의해 물을 받음) 면적이 넓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제언의 견고함과 충분한 규모로 표현할 수 있는데, 태종대 제언 전문 관료로 활약한 이은(李殷)은 이를 ‘견완고후(堅完高厚)’로 나타냈다.362)

제언을 수축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내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363) 각 도와 군현에 명령을 내려 제언을 만들어 활용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내어 보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제언을 수축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는 일은 곧 경작지를 확보하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제언을 통해 가경지(可耕地)를 넓히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언 수축이 경지 확보와 깊이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둔전 경영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제언 수축을 지시하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14년(태종 14) 태종은 강화(江華) 둔전 경영을 지시하면서 한 해 전에 제언을 수축하여 가경지를 확보한 것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었다.364)

8도 군현에 산재해 있는 제언의 관리는 군현의 목민(牧民)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수령이 담당하였다. 수령은 농정책의 실무를 맡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제언의 관리와 보수, 수축, 신축 등의 책무를 짊어졌다. 태종대에 만든 수령 포폄(褒貶) 규정을 보면 농상을 권장하는 것과 더불어 제언 수축 여부 역시 수령의 군현 통치 성적을 매기는 주요한 기준에 포함되어 있었다.365) 수령과 더불어 권농관이 바로 제언의 관리, 보수의 책무를 같이 짊어지고 있었다. 권농관은 제언 수축을 장려하는 임무뿐 아니라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언에 설수(雪水)를 가두어 두는 일도 맡고 있었다.366)

[필자] 염정섭
361)『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7월 신유.
362)『태종실록』 권17, 태종 9년 1월 신미.
363)『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6월 경술.
364)『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9월 병술.
365)『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 12월 을사.
366)『세조실록』 권2, 세조 1년 9월 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