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4장 조선 후기 새로운 농사 기술과 상품 작물, 농민 지위의 변화1. 인구 증가

첫아이를 낳는 연령

김인섭가의 아들과 사위는 결혼식을 치른 다음 이틀이나 사흘 정도 신부와 함께 생활하다가 신부를 친정에 남겨 두고 혼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하여도 신랑이 결혼 후 신부 집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경우가 간혹 있었으나 19세기가 되면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단성의 인구사 자료는 그러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과 민적에 등재되는 사례를 살펴보면 1678년 22명, 1717년 23명, 1759년 21 명, 1789년 9명, 1820년 1명, 1860년 1명, 1909∼1924년 2명이다.

<우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로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신랑 집으로 오는 모습을 그렸다. 신부가 신랑 집으로 오는 것을 우귀(于歸)라 한다. 조선 후기에는 신부가 결혼식를 치른 뒤 친정집에 일정 기간 머물렀다가 우귀하였다.

김인섭가의 딸과 며느리는 혼례 후 6∼9달 정도 친정에 머물렀다. 이 같이 결혼 후 신부가 곧바로 시댁으로 가지 않고, 일정 정도 친정에 머무는 관습은 16세기까지 유지되어 오던 결혼 문화의 유제(遺制)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결혼 후 신랑 신부가 일정 기간을 떨어져 지내는 풍습은 신랑 신부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신부 집에서 생활하던 풍습에서 결혼 후 곧바로 신랑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풍습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부가 친정에 머무는 동안 신랑과 신부는 가끔씩 잠자리를 같이하기도 하였다. 신랑은 본가(本家)로 돌아온 뒤 신부가 시댁으로 올 때까지 대체로 몇 차례 처가를 다녀왔다. 김인섭가의 경우 신랑이 세 차례 신부 집을 방문하였으며, 한 번 방문 때 통상 열흘에서 보름 정도 머물다가 돌아왔다. 비록 신부가 시댁으로 오기 전에 신부와 신랑이 몇 차례 잠자리를 같이하였으나 임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인섭가의 며느리는 시댁으로 온 지 1∼2년이 지난 뒤에 아이를 낳았다.

친정에서 첫 아이를 낳은 다음 시댁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단성에서 약 150㎞ 떨어진 경상도 상주의 사례이다.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남긴 『청대일기(淸臺日記)』532)에서 확인된다. 그는 1706년(숙종 32) 3월 19일 에 첫 부인을 사별하고, 같은 해 12월 30일에 두 번째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결혼식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부인은 결혼식 후 10개월이 넘도록 친정에 머물다가 1707년 10월 13일에야 권상일의 집안으로 왔다. 그의 며느리 또한 결혼 후 오랫동안 친정에 머물렀다. 권상일의 아들은 1725년(영조 1) 2월 8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으나 며느리는 결혼식 후 2년 6개월 정도 친정에 머물다가 친정에서 낳은 아이와 함께 1727년 7월 22일에야 비로소 시댁으로 왔다. 권상일의 손녀 또한 결혼 후 몇 달 동안 친정에 머물렀다. 그녀는 1748년(영조 24) 4월 8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11월 8일 시댁으로 떠났다.

<초도호연 부분>   
19세기에 그린 평생도 가운데 초도호연(初度弧宴) 부분이다. 조선 후기 양반가의 첫돌잔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김인섭가의 며느리들은 대개 시댁으로 온 지 한두 해 뒤에 첫 아이를 낳았고, 초산 연령은 21∼22세였다.

김인섭가의 여성들은 19세에 결혼하였으므로 초산 연령은 21∼22세가 된다. 18∼19세기 단성 지역 여성의 초산 연령은 어떠하였을까? 안타깝게도 단성 호적을 통해서는 그들의 초산 연령을 확인할 수 없다. 조선시대 단성 지역 여성의 초산 연령은 20세기 초 단성 지역 민적에서 확인되는 여성 의 초산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즉 18세기와 20세기 단성 지역 여성의 초혼 연령이 거의 비슷하였기 때문에 초산 연령 역시 비슷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단성 민적에서 1923년 연말까지 초혼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여성은 모두 667명이며, 그들의 초혼 연령은 17.4세였다. 초혼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여성 가운데 초산 연령을 알 수 있는 여성은 모두 처 혹은 며느리이다. 즉 딸은 결혼한 후 시댁 민적에 입적되기 때문에 그들의 초산 연령을 확인할 수 없다. 처와 며느리 339명 가운데 초산 연령이 확인되는 여성은 221명이며, 초산 연령은 21.7세이다. 단성 지역 여성은 결혼 후 4.3년이 지난 뒤에 초산을 하였던 것이다.

단성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혼 후부터 초산까지의 기간은 중국 만주, 일본 간토(關東) 지역의 기간과 비슷하고, 서유럽에 비해서는 훨씬 길다. 무슨 이유 때문에 단성 지역 여성은 결혼 후 4.3년이 지나서야 초산을 하였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터이지만 두 가지 요인이 주된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나이가 어려 임신할 수 없거나 임신 가능성이 낮은 여성이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5∼1936년 우리나라 여공(女工)의 초경 연령이 16.1세였음을533) 감안하면 15세 이하의 여성이 부부 관계를 갖더라도 임신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할 수 있다. 1909∼1923년 사이 단성 지역에서 초혼이 확인되는 여성 가운데 15세 이하가 24.6%였다.

둘째, 결혼 후 상당 기간이 지난 다음부터 부부가 지속적인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출산이 그만큼 늦어졌다. 김인섭가와 권상일가의 사례에 보았듯이 여성은 결혼 후 상당 기간 혼자 지내면서 가끔씩 찾아오는 남편과 성관계를 가졌다. 결혼하고 나서 신랑 신부가 상당 기간 떨어져 지내는 관습은 20세기 초까지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자료 상태로는 신랑 신부가 결혼 후 떨어져 있는 기간이 신분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났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20세기 전반에 결혼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분에534) 따라 신랑 신부가 결혼 후 떨어져 있는 기간이 차이가 났다고 한다. 김인섭가나 권상일가 같은 상층(上層) 신분에 속한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 비해 결혼 후 배우자와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대체로 더 길었다고 한다.535) 결혼식 후 신랑 신부가 일정 기간 동안 떨어져 생활하는 중·하층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19세기에는 기혼녀의 친정과 시댁의 위치가 신분에 따라 큰 차이가 없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상층의 결혼 문화를 추종하던 중·하층이 적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한편 단성 여성의 출산은 계절에 따라 심한 편차를 보였다. 도표 ‘단성 지역 주민의 출생월’에서 볼 수 있듯이 1년 중 출산율이 가장 높은 달은 1월이고, 출산율은 그 이후 6월 달까지 계속 하락하다가 7월부터 다시 상승한다. 이러한 사실은 임신율이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임신율은 따뜻한 3∼4월에 가장 높고 농사철이 시작되면 서서히 낮아진다. 고된 농사일로 인해 여성의 임신율이 낮아졌던 것이다. 낮아지던 임신율은 농사가 끝나는 9∼10월부터 다시 상승한다. 농사로 인한 체력이 소모가 줄어들어 임신율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렇듯 농사가 주된 산업을 차지하던 시대에는 농번기와 농한기의 임신율이 큰 차이를 보였다.

<표> 18∼19세기 단성 지역 기혼녀의 친정 위치
단위 : 명
신분
지역
상층 중층 하층 합계
같은 마을(同洞) 210(4.6) 423(7.5) 93(11.2) 726(6.6)
같은 면(同面) 192(4.2) 222(3.9) 46(5.5) 460(4.2)
같은 군(同郡) 445(9.7) 392(6.9) 63(7.6) 900(8.1)
불명(不明) 3723(81.5) 4622(81.7) 632(75.9) 8977(81.2)
합계 4570(100) 5659(100) 833(100) 11062(100)
✽①18∼19세기 자료(경상도 단성현 호적 대장 전산 CD,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6)
  ②20세기 자료(경상도 산청군 신등면 제적부. 신등면 사무소 보관본)
✽(  ) 안의 수치는 백분율임.
<단성 지역 주민의 출생월(1925년 이전)>   
✽① 18∼19세기 자료(경상도 단성현 호적 대장 전산 CD,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2006)② 20세기 자료(경상도 산청군 신등면 제적부. 신등면 사무소 보관본)

이처럼 18∼19세기 단성 지역 여성은 어린 10대 후반에 첫 결혼을 하여 20대 초반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중·하층에서는 과부의 재혼도 비교적 활발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조선 후기 농촌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17∼18세기에 인구 증가를 경험한 중국과 일본의 결혼 문화를 살펴보면 신빙성이 더욱 높아진다. 17∼18세기에 일본 여성은 20.5세,536) 중국은 16∼18세에537) 초혼을 하고, 그로부터 4년 정도 지난 뒤에 첫 아이를 낳았다.538)

[필자] 김건태
532)권상일(權相一), 『청대일기(淸臺日記)』, 국사 편찬 위원회, 2003.
533)박희진, 「양반의 혼인 연령」, 『경제 사학』 40, 경제 사학회, 2006.
534)우리나라에서 신분제는 법적으로는 1894년에 폐지되었으나, 실제 생활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535)조선시대 신분은 세 층으로 분류되는데, 군역(軍役)이 잠시 면제된 사람은 상층, 군역을 지는 사람은 중층, 군역의 의무가 없는 노비는 하층에 속하였다. 한편 상·중층의 여자는 결혼 전에는 부모의 신분을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신분을 따랐다.
536)速水融, 『歷史人口學で見た日本』, 文春新書, 2001.
537)로이드 E. 이스트만, 이승휘 옮김,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돌베개, 1999.
538)JAMES LEE AND CAMERON CAMPBEL, FATE AND FORTUNE - Social organization and population behavior in Liaon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 鬼頭宏, 「宗門改帳と懷妊書上帳」, 『近代移行期の人口と歷史}』 速水融 編著, ミネルヴァ書房,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