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물 교류
조일 양국 간에 사절단의 활발한 왕래는 자연히 문물 교류의 통로가 되었다. 문물 교류 면에서는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데, 일본에 전수된 대표적인 문물로는 고려 대장경을 비롯한 불교 서적, 범종 등 불교 문화재였다. 그 밖에 일부 유교 서적과 문집류 등도 요청에 따라 증여하였다.26) 예를 들면, 세조대에는 쓰시마 섬 도주와 거추사의 요청에 따라 나옹 화상(懶翁和尙)의 영정, 불상, 불구(佛具)와 함께 사서오경(四書五經), 『삼체시(三體詩)』 등을 기증하였다.27) 성종대에는 일본 국왕사의 요청에 따라 『논어』, 『맹자』, 『득효방(得效方)』, 『동파(東坡)』, 『두시(杜詩)』, 『황산곡(黃山谷)』, 『시학대성(詩學大成)』 등의 유교 서적과 시집을 증여하였다.28)
그 가운데서도 수량적으로 가장 많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대장경(大藏經)이었다. 고려 대장경은 불전(佛典)을 망라한 가장 우수한 불경(佛經)으로 유명하며 당시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구청한 것은 고려 말기부터이다. 즉, 1388년(우왕 14) 일본 국왕사 슌오쿠 묘하(春屋妙葩)와 1389년(창왕 1)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이 요청한 것을 비롯하여 공민왕대에는 무로마치 막부에서도 요청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은 대장경 구청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조선 초기 일본 국왕사가 올 때에는 예외 없이 대장경을 구청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막부에서 한 번에 7,000축의 대장경을 구청하였고, 심지어 대장경의 원판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1443년(세종 25)의 통신사행에 대한 회례사를 막부에서는 ‘청경사(請經使)’라고 할 정도로 대장경 구청에 적극적이었다. 막부뿐 아니라 호족과 쓰시마 섬 도주 등이 앞 다퉈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대장경의 하사를 요청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에 실려 있는 일본의 대장경 요청 기록을 보면, 150여 년간에 걸쳐 총 82회의 구청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태조대부터 1539년(중종 34)까지 일본 국왕사가 29회, 호족 등 제추사가 53회 구청하였다.29) 시기적으로는 조선 초기와 세조대에 많았다. 태종대까지 26년간 27회의 구청이 있었으며, 세조대와 성종대에는 19회에 달하였다. 특히 세조는 대장경 구청에 잘 응해 주어 일본에서는 그를 ‘불심 천자(佛心天子)’라고 불렀다. 조선은 일본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하기 위해 초기에는 대장경 사급(賜給) 요청을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가 날로 지나치고 대장경 운반에 따른 비용도 적지 않게 들자 선별적으로 사급하였다. 82회의 요청 가운데 조선에서 요구를 들어준 것은 일본 국왕사가 22회이고, 제추사는 24회였다. 일본 국왕사에 대해서는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지만 제추사의 경우 절반 이상은 거절한 셈이다.
일본이 이렇게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장경을 요청한 이유는 일본 불교계의 문화적 욕구와 정치적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불교는 무로마치시대에 들어와 산간 불교(山間佛敎)에서 민간 불교(民間佛敎)로 변모하여 많은 사찰이 새롭게 건립되었고, 내란 중에 소실된 사찰을 재건하는 일도 많았다. 이때 그들은 새로운 사찰에 대장경이나 고려 범종을 비치해 두고자 하였다. 고려 대장경에 대한 선망이라는 문화적 욕구 외에도 고려 대장경은 막부나 호족의 권위 확립에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승려들이 막부의 외교 문서를 기초하고 외교 사절로서 활약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조선 전기에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 문화재는 당시 일본 불교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30)
한편 조선의 사절단은 일본에서 『경사유제(經史類題)』 20권, 『백편상서(百編尙書)』, 『시인옥설(詩人玉屑)』 등의 서적과 일본 지도를 가져왔다.31) 또한 사행원들을 통해 동남아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와 중국 물화(物貨)가 일본 국내에서 유통되는 사정 등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행 무역을 통해 일본 물품 및 동남아 물품도 진상품으로 들어오는 등 동남아 제국과 문물을 교류하는 통로의 하나가 되었다.
기술 면에서도 상당히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할 때 다양한 기술자와 재능인도 동행하여 기술 교류를 시도하였다. 이들을 사절단에 포함시킨 목적이 기술 도입을 위한 것인지 전파를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들을 중심으로 기술 교류가 있었던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32) 일본에서도 철공(鐵工), 취련동철자(吹鍊銅鐵者), 석유황채자(石硫黃採者), 선장(船匠), 철장(鐵匠) 등의 기술자가 사절단을 따라왔다. 또 향화 왜인 중에도 기술자가 적지 않게 있었다.33) 이들이 조선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들을 통해 관련 기술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통신사행원들을 통해서도 일본 기술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수차(水車) 이용법, 조선법(造船法), 조검법(造劍法), 왜지 조작법(倭紙造作法), 초철법(炒鐵法) 등이다.34) 태종대와 세종대에 대일 교섭의 실무자로 활약한 이예는 일본의 화포, 병선(兵船), 수차(水車)의 장단점을 조선 것과 비교하면서 우수한 요소를 적극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통신사 박서생(朴瑞生)도 사행을 다녀온 후 세종에게 보고하면서 일본의 시장 발달상과 화폐 유통의 편리성을 소개하면서 당시 부진하였던 조선의 상업, 광공업의 후진성을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35)
26) | 이현종, 앞의 책, 320∼3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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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세조실록』 권17, 세조 5년 8월 임신 ; 권32, 세조 10년 1월 임술 ; 권41 세조 13년 1월 을해. |
28) | 『성종실록』 권231, 성종 20년 8월 신해. |
29) | 나종우, 「조선 전기 한일 문화 교류에 대한 연구-고려 대장경의 일본 전수를 중심으로-」, 『용암 차문섭 교수 화갑 기념 사학 논총』, 1989, 327쪽. |
30) | 田中健夫, 「中世東アジアにおける國際認識の形成」, 『對外關係と國際交流』, 思文閣出版, 1982, 188쪽. |
31) | 『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2월 임신 ; 권80, 세종 20년 2월 계유 ; 권41 세종 10년 7월 신해. |
32) | 조정에서 우수한 기술자를 파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논의가 있었던 사실을 보면 기술 과시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권101, 성종 10년 10월 계축). |
33) | 『세종실록』 권1, 세종 원년 8월 신묘 ; 권84, 세종 21년 2월 을사 ; 『명종실록』 권25, 명종 14년 6월 갑자. |
34) | 이현종, 앞의 책, 325∼329쪽. |
35) | 『세종실록』 권46, 세종 11년 12월 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