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1장 세계에 비친 우리나라 고대의 이미지

1. 중국 정사에 보이는 우리 민족의 이미지

동아시아 각국은 영토 팽창에 따른 외연적 확대를 통해 ‘정복’과 ‘투쟁 과정을 반복하면서 주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치적·종족적·문화적 차별 인식을 형성하며 자민족 중심주의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형성된 타자 인식은 타민족과 국가에 대한 우월감 혹은 열등감으로 나타나고 국가적 차원의 대외 인식으로 환원되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이란 고대 중국인이 형성한 자민족 중심의 세계 질서 구성 원리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중(中)은 지리적·문화적으로 ‘중앙’을 의미하며, 화(華)는 ‘찬란한 문화’라는 뜻이다. 이것은 중하(中夏)라고도 하는데, 하(夏)는 전설상 중국 최초의 국가 명칭인 동시에 크다는 의미인 대(大)와 통하며 한족(漢族)을 미화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중화, 중하 등의 명칭은 문화 수준이 낮고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전제한다. 이를 통해 고대 중국인의 지리적 의식과 세계관은 중화인 중국과 비중국 또는 중국과 중외(中外)의 이중적 개념으로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민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정립(定立)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민족을 차별하고 배척하여야만 했다. 그 결과 고대 중국인은 세계의 중심에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중화가 존재하고, 중국의 주변 지역에는 천자(天子)의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오랑캐인 이(夷)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지리적·방위적 개념을 토대로 동서남북 사방에 거주하던 주변 민족을 사이(四夷), 즉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일컬으며 차별하고 배척하였다.

<중국과 주변 세계>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개념도로 기준 시점은 청나라 시기이다.

사이 가운데 동이는 중국의 서북부에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한 종족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산둥 반도(山東半島) 쪽으로, 다른 한 갈래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발해만(渤海灣)을 따라 요동(遼東)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동이는 산둥 반도에서부터 화이수이 강(淮水) 유역에 거주하였던 우이(嵎夷), 회이(淮夷), 내이(萊夷), 서융(徐戎) 등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에서는 발해, 황해를 둘러싼 황허(黃河) 강, 랴오허(遼河) 강, 대동강 등의 충적지(沖積地)에 분포하여 살던 종족을 말한다.

이러한 일종의 선민사상(選民思想)은 주변국과의 통교(通交)에도 반영되어 한민족이 주변국과 대외 관계를 개시할 때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대외 관계는 당시의 정세와 양국의 필요성이라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성립하는데도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일방적 관념으로 일원화하는 타자 인식을 형성하였다.

<표> 중국 정사에 보이는 우리나라 고대 관련 내용
서명 수록 열전 편찬 시기 수록 내용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기원전 91년 고조선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1세기 말∼
2세기 초
고조선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432년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3세기 말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
진서(晉書) 동이열전(東夷列傳) 646년 부여, 마한, 진한, 숙신
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488년 고구려, 백제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537년 이전 고구려, 백제, 가라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636년 고구려, 백제, 신라
위서(魏書) 열전(列傳) 554년 고구려, 백제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636년 고구려, 백제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659년 고구려, 백제, 신라
북사(北史) 열전(列傳) 659년 고구려, 백제, 신라, 물길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656년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945년 고구려, 백제, 신라
북적열전(北狄列傳) 말갈, 발해말갈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1060년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북적열전(北狄列傳) 흑수말갈, 발해

이상과 같은 중국의 인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중국 정사(中國正史)이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편찬한 역사서인 중국 정사는 24사(史) 혹은 25사(史)라고도 부른다. 24사는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가 정한 중국 왕조의 정사인 24사를 말하는 것으로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부터 명나라까지의 역사서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에 편찬한 『신원사(新元史)』나 『청사고(淸史稿)』를 더하여 25사라고도 하고, 둘 다 포함하여 26사라고도 부른다.

중국 왕조가 랴오허 강 이동의 여러 민족과 직접 접촉한 것은 진한 통일 제국 이후이다. 특히 한 무제(漢武帝)의 고조선 정벌과 4군 설치는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견문(見聞)을 대거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족 출신의 관리, 군인, 상인 등이 옛 고조선 지역에 와서 살거나 교류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세기에 편찬한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실린 다음과 같은 이 지역의 미풍양속(美風良俗)도 그 견문의 일부였을 것이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武帝) 때 설치한 (군으로) 모두 조선(朝鮮), 예(濊), 맥(貊), 구려(句麗) 만이(蠻夷)의 (지역이다). 은도(殷道)가 쇠하자 기자(箕子)는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 농경, 양잠, 옷감 짜기를 가르쳤으니 (처음) 낙랑과 조선의 백성에게는 범금(犯禁) 8조가 있었다. …… 이 때문에 백성은 끝내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아 문을 닫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잘 지키고 음란함이 없었다. 농사짓는 백성도 음식을 먹을 때 (예를 갖추어) 두(豆)와 변(籩)을 사용하고, 도읍의 백성은 (중국 군현의) 이(吏)와 내군(內郡)에서 (왕래하는) 상인을 본받아 왕왕 음식을 들 때 배기(杯器)를 사용하기도 한다. …… 군을 처음 설치할 때 이(吏)는 요동에서 선발하였는데, 이는 백성이 (재물을) 폐장(閉藏)하지 않는 것을 보았으나, 상인이 왕래하면서 밤에 도적질을 하니 그 풍속이 조금씩 각박해져 지금은 (그 범금이) 60여 조에 이른다. 정말 귀하구나! 어질고 현명한 (군자의) 교화는! 그러나 동이의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삼방(三方) 밖의 (이적과는) 다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뗏목을 띄워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려고 하였다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1)

이와 같이 평화롭고 안정된 예의(禮義)의 세계 ‘동이’에 대한 관념은 3세기 초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의 재건에 이은 고구려 정벌 시 ‘동이’ 세계의 법속(法俗)을 두루 견문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술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도 계승되었으며, 5세기 중엽에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은 「위지」의 내용과 관점을 거의 그대로 답습(踏襲)하였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술된 각 집단의 문화적 수준은 서로 달랐다. 특히 숙신(肅愼, 고대 중국의 동북 지방에 살았던 퉁구스계 민족의 명칭)의 후신(後身) 읍루(挹婁, 연해주(沿海州) 지방에서 헤이룽 강(黑龍江) 하류 또는 쑹화 강(松花江) 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고대 민족)의 경제생활은 낙후하고 불결하였을 뿐 아니라, 상습적으로 이웃 나라를 약탈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동이’에 대한 높은 평가와는 무관한 존재라는 것도 명시하였다. 이것은 「위지」가 ‘동이’를 크게 선진 예맥계(濊貊系)와 후진 숙신계(읍루, 물길, 말갈)로 구분한 것인데, 역대 문헌들은 대체로 이 관념을 계승하였다.

전통시대 중국인에게 ‘선진과 발전’ 내지 ‘문화’는 곧 중국적 예교(禮敎)와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삼방(三方, 서융, 남만, 북적)의 이적과 달리 ‘동이’를 높이 평가한 것은 실제 ‘동이’의 세계에서 중국과 유사한 농경 문화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청대까지 편찬한 중국 정사의 ‘동이’ 관계 기록은 ‘동이’가 중국의 선진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용해 발전한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며, 결코 과장한 것이 아니다. 각종 제도와 학술과 종교(불교와 도교), 농경·양잠·공예 등의 생산 기술, 혼례와 상례 및 세시 풍속(歲時風俗), 심지어 술과 안주, 오락 놀이까지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즐겼다. 이로 인해 동이는 중국 경내(境內)의 일부와 다름없는 수준에 도달하였고, 다른 이적과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따르면 동(東)은 목(木)이며, 목과 연계된 계 절은 봄, 상(常)은 인(仁), 색은 청(靑), 정(情)은 희(喜)이며, 봄(春)의 덕(德)은 생(生)이다. 『후한서』는 이 논리를 원용(援用)하여 ‘동이’의 천성이 필연적으로 유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예맥은 북적일 수 없으며 동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이에게 유가(儒家)의 최고 덕목인 인(仁)을 배정한 것은 언뜻 보면 그들을 최고의 종족으로 격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현인’들은 이런 주장을 막기 위하여 ‘토왕론(土王論)’을 준비하였다.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1770년(영조 46)에 위백규(魏伯珪)가 그린 것을 1822년(순조 22)에 목판 채색본으로 만든 지도이다. 평양 보통문(普通門) 앞에 문묘(文廟)·단군전(檀君殿)과 함께 기자전(箕子殿)이 있다. 1325년(충숙왕 12)에 기자를 제사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기자사(箕子祠)의 본전을 1430년(세종 12)에 중건한 후에 기자전이라 불렀고, 1612년(광해군 4)에 숭인전(崇仁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왼쪽 성 밖에는 기자가 경영하였다는 정전(井田)이 그려져 있다. 전통시대에 중국과 우리나라 지식인은 기자 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알았고,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명을 중국 현인이 열어 주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중앙의 토덕(土德)을 통해서만 동이의 ‘인’을 발휘할 수 있고, 토의 세덕(歲德)이 사방을 복속시키는 근원이라는 것은 음양오행설 역시 주변 민족에 대한 중국 지배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역설하는 논리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이적의 사회에 성인이 있을 수 없다면, 동이의 교화를 위한 중국 성인의 동이행(東夷行)이 필요할 것이다. ‘기자(箕子)의 조선행’은 바로 이 논리를 충족하기 위한 적합한 고리였다.

‘조선’이라는 국호와 ‘기자 조선’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3세기 초반 제 (齊)나라가 연(燕)나라와 대결하는 상황에서 배후에 있는 예맥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 책략의 일환으로 조작(造作)해 주었으나 쉽게 정착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한서』 「지리지」에 이 개념이 명확히 제시된 것은 무제의 정벌과 그 지역에 대한 군현 통치(郡縣統治)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후 ‘기자 조선’은 전통시대에 중국과 우리나라 지식인이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 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한민족의 역사와 문명이 중국의 현인(賢人) 기자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관념을 굳혔다.

조선 왕(朝鮮王) 위만(衛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의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복속시켰다.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蠻夷)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 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의 군장(君長)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 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견(入見)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2)

이와 같이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 이전 조선 왕의 출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시대 연나라의 전성기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을 통제하였으며,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나라 초에 동북으로 피신한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 1,000여 명을 규합하여 조선을 탈취한 후 주변의 소읍과 진번 등을 복속시키며 위세를 떨쳤다는 것을 명기하였다. 「조선열전」 역시 주변국의 건설에 중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마천>   
1525년(중종 20)에 궁궐에 전해지던 역대 제왕(帝王), 명신(名臣), 성현(聖賢) 등의 초상을 기초로 편찬한 『역대도상(歷代圖像)』을 조선 후기에 임모(臨模)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사마천 화상이다.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위만 이전 조선 왕의 출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한 다음 중국에서 온 망명자를 규합하여 세력을 떨쳤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주변국 건설에 중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한편 중국이 삼국 왕의 관작(官爵)에다가 소멸한 중국 고군(故郡)의 군공(郡公) 또는 군왕(郡王)의 작명(爵名)을 포함시킨 것은, 고군을 현재 영유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왕을 형식상 중국의 내신(內臣)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재확인하면서 신속(臣屬)을 요구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3) 보이는 삼한(三韓) 지역이 실제 중국 군현의 역사가 거의 없던 지역이었다면, 삼국 전체에 대한 고군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특히 백제의 전 영역을 대방군의 고지로, 신라 전체를 낙랑군의 고지로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삼한과 삼국의 상승 관계를 억지로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백제와 마한, 신라와 진한 또는 변한의 관계는 일단 인정할 수 있지만, 고구려를 삼한의 하나와 연결하는 것은 사실상 억지 이다.

기원전 2세기 말까지 중국 문헌에서 확인되는 한반도와 동북 지역의 명칭은 ‘진국(辰國)’뿐이며, 한(韓)은 전한 말 이후에 등장하는데, 성좌 분야설(星座分野說)에 따르면 ‘진(辰)’과 ‘한(韓)’은 모두 은(殷)나라와 관련된 명칭이다. 중국이 이 지역에 이례적으로 미칭(美稱)인 진과 한을 부여한 것은 그들이 본래 은나라에 속하는 변방 종족이었고, 따라서 기자 조선의 고지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대한 신속을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나라 영토에서 발전한 백제와 신라 왕에게 사여(賜與)한 관작에 ‘대방군공(왕)’과 ‘낙랑군공(왕)’을 각각 포함한 것은 중국이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포석(布石)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조작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첫째, 삼국의 동질성을 강조한다. 『양서(梁書)』 이하의 정사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의 동원동근(同源同根) 관계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 한편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동원 관계를 직접 명시한 예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서(隋書)』 「신라전」의 기록은 결국 삼국의 동원 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위(魏)나라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때 옥저 방면으로 도망한 고구려인이 신라를 세웠고, 이로 인해 신라에는 중국,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살고 있었다. 또한 풍속(風俗), 형정(刑政), 의복도 대체로 고구려, 백제와 같고, 신라왕은 본래 백제인이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주장하였던 것이다.

둘째, 두우(杜佑)가 저술한 『통전(通典)』에서4) 고구려는 조선 땅을 차지한 반면 백제와 신라는 삼한 땅을 나눈 것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삼국’과 동일시된 중국인의 ‘삼한’은 삼국의 동질성 내지 동원 관계를 설정한 뒤 그것을 통합한 단일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곧 조선의 통합-4군 시대의 분열-고구려의 통합으로 이어지는 ‘예맥 세계’의 역사를 조선-4군 시대 예맥계와 한계(韓系) 제국의 분립-삼국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바꾸는 결과가 되었다. 즉, 예맥과 한나라의 동근(同根)이 견강부회(牽强附會)되면서 조선-예맥계와 한계의 분열-삼국이라는 동원동근의 분화와 통합의 계보가 도출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삼한과 삼국의 등치는 삼한을 고군의 일부로 편입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속권을 주장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것은 삼국을 통합 또는 부분적으로 계승한 어떤 세력도 한반도 남부의 옛 삼한 지역을 제외한 옛 삼국의 영토, 특히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봉쇄할 수 있었다.

『통전』에 따르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은 모두 당나라의 정벌 결과였고, 그 과정에 전혀 공헌하지 않은 신라는 유망(流亡)한 약간의 고구려 유민과 백제의 고지, 그 유민 일부를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고구려의 전 영토와 유민을 차지한 발해를 단지 말갈로 표현함으로써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를 철저히 배제한 것도 『통전』의 또 다른 ‘공헌’이었다.

이에 비해 오대(五代) 후진(後晉)에서 편찬한 『구당서(舊唐書)』가 흑수말갈과 발해말갈을 모두 북적(北狄)으로 분류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옛 영토가 ‘동이 세계’에서 ‘북적(北狄) 세계’로 넘어갔음을 천명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당서』도 신라와 당나라가 모두 점거하지 못한 고구려 고지를 ‘동이 예맥계’가 계승하였다는 주장을 원천 봉쇄한 것이 분명하다.

송대에 편찬한 『신당서(新唐書)』는 삼국 통일 과정에서 적어도 백제의 영토는 신라가 주체적으로 획득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또 발해말갈전을 발해전으로 고쳤으나, 북적으로 분류하였을 뿐 아니라 발해를 ‘고구려에 의지하여 좇은 속말말갈(粟末靺鞨)’로 새로 고쳐 쓴 것은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는 개념이 초래할 수 있는 논란의 여지를 없애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확실히 여타 이적과 다른 한민족(동이)은 결국 독자 국가를 재형성하면서 중국 군현을 축출하였고,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소중화(小中華)’를 건설해 나갔다. 이것은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군현 지배 욕구를 더욱 자극하였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조공·책봉 체제로 이 지역에 대한 안전 막을 구축하는 한편 ‘신속천하(臣屬天下)’의 이념을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동이’도 발전을 위해 중국 선진 문화가 필요하여 일단 이 외교 형식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불평등한 이 평화 공존은 본질상 쌍방 간의 이해와 세력 균형에 따라 성하고 쇠할 수밖에 없었다. ‘동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그 방식을 모색하는 것은 중국 왕조의 중요한 과제였고, 이 과제는 제국을 움직이는 황제와 관료 사대부의 몫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경(經)과 사(史)는 바로 이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조직한 지식의 체계였으며, 지배층은 경사의 학습을 통해 제국의 이념과 그 이해를 충실히 대변할 수 있는 능력과 신념을 배양하였다. 경의 해석을 엄격히 통제하였는데, 송대까지 사서(史書)의 사찬(私撰)을 금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이 ‘동이’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었을지라도 이것을 ‘중국인의 교화’로 주장한 것은 “성인(聖人)은 중국에만 있을 수 있고 성인의 교화를 통해서만 인성(人性)이 완성된다.”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성인론(聖人論)으로 ‘동이’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여타 이적과 다른 ‘동이의 문명화(중국화)’를 적극 평가한 것은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예교화된 ‘동이’는 당연히 중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한 포석이기도 하였다.

예맥 세계 역사의 시원(始原)에 기자 조선을 설정하고, 예맥과 한나라를 동원동근 관계로 주장함으로써 삼국의 동원동근을 강조하며, ‘삼한’과 삼국의 등치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배제하는 한편, 발해와 말갈을 동이에서 북적으로 재분류함으로써 고구려의 고지를 ‘동이’에서 분리하였으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더욱 근원적으로 말소하기 위해 실체가 애매한 고구려 멸망 이후의 ‘고구려’를 반도 내로 밀어 넣고 고구려가 그것을 직접 계승한 이후 삼국 통일을 한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두 이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기자묘>   
평양에 있는 기자의 묘를 1907년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고려 숙종이 이곳을 찾아 제사를 지냈고, 조선 성종 때에 중수(重修)할 정도로 전통시대에는 기자의 묘로 믿었으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기자 조선의 설정에는 ‘동이의 문명화(중국화)’에 미친 중국의 역할 강조와 동이는 당연히 중국의 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었다.

중국 정사의 기록은 중국 천자의 당위적인 지배 범위를 ‘천하’로 상정하고 이민족 세계를 ‘천하’의 일부에 포함시켜 주변 민족의 역사를 사실상 중국 왕조사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한편 문화적으로 월등한 ‘중국’에 신속하여야 하는 야만 단계의 주변 민족상을 구축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록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던 주변 민족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 자료’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변 민족이 독자적인 사서를 편찬할 때도 중국 측의 기록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왜곡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심각한 문제는 현대 중국이 중국사의 범위를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족과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 민족’이라는 묘한 개념을 만들어 역사상의 주변 민족은 현재 ‘중화 민족’을 구성한 소수 민족의 조상이며 모두 한족의 ‘형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전통적인 천하관(天下觀)과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동북관(東北觀)’을 계승 발전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요동과 만주에서 활약하였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말갈, 발해 등의 역사가 모두 중국 소수 민족의 역사로서 ‘중화 민족’ 대역사의 일부로 편입된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에 동화, 흡수된 중국 소수 민족 가운데 흡수되지 않은 지류사(支流史)가 될 것이다. 따라서 ‘중화 문명’에 참여하지 못해 야만 또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집단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정사에 나타난 이상의 고대 한민족에 대한 이미지에 유의하여야 한다.

[필자] 윤재운
1)『한서(漢書)』 권28, 지리지(地理志)8 하.
2)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55.
3)『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30, 동이(東夷).
4)두우(杜佑), 『통전(通典)』 권185·186, 변방(邊防)1·2, 동이(東夷) 상(上)·하(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