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04. 청화 반상기를 수놓은 길상문

다양한 실용기명과 중화풍 양식의 유행

19세기 조선백자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분위기 탓인지 기존의 제작 기법 이외에 상형과 투각, 양각뿐 아니라 향로나 병에 고리를 다는 중화풍의 양식이 유행하였다. 18세기 중국 자기에서 유행하던 단색의 코발트 유자기를 모방하여 청화안료를 그릇 전면에 바른 청화채 백자들이 제작된 것 역시 좋은 예이다. 단지 중국 자기는 유약 자체를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청유를 시유한 것에 반해 조선백자는 청화를 이용하여 색을 내려한 것이 다르다.

중국의 단색유를 모방하려는 경향은 청유 뿐 아니라 산화동을 이용한 홍색유 분위기의 자기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중국의 상회 자기를 모방한 청화와 철화, 동화의 혼용이 상대적으로 빈번해졌다. 이런 중화풍 모방 경향이 심화된 것은 왕실을 비롯한 수요층이 분원자기보다는 중국 자기를 더욱 선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장식뿐 아니라 그릇의 기형이나 문양 역시 모방 경향이 강하여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백자양각매화문청채각병>   
19세기 들어 눈에 띄는 장식 중 하나는 중국의 단색유자기를 모방하여 그릇 전면을 청채나 홍채하는 것이다. 또한, 양각이나 투각 등의 조각 장식도 장식성을 높이기 위해 이전보다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 병은 매화와 모란 문양은 양각을 하고 여백은 전부 청채를 한 것으로, 19세기 중국 자기 모방 성향을 잘 보여준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9세기.]
<백자 문방구류>   
조선시대 사대부의 상징인 문방구는 19세기에 접어들면 다양하게 생산된다. 기형과 문양에서 장식성이 강조되었고, 이 중 투각기법과 같은 이전에 보이진 않던 기법이 사용되었다. 연적과 필통 뿐 아니라 묵호, 필세, 필가 등 이전보다 다양한 종류의 백자로 제작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9세기.]

19세기 사용된 그릇의 종류는 앞에서 살펴본 고종 21년(1884) 공표된 『분원자기공소절목』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353) 절목에 명기된 그릇들을 보면 완과 사발, 보아, 접시 등을 비롯해서 대·중·소 크기에 따른 분류까지 합하여 근 100여 가지에 이른다. 음식과 관련된 대접·사발·보아·조치와 같은 각종 식기와 강판(薑板), 19세기 들어 확고하게 상품으로 자리 잡은 흡연을 위한 담뱃대 같은 생활용구, 필통과 연적뿐 아니라 필세와 필가 등으로 제작 폭이 넓어진 문방구 등 이 시기 그릇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 가를 알 수 있다.

<청화백자 담뱃대>   
조선 중기 이후에 시작된 흡연은 그 중독성 탓에 후기에 들어 크게 유행하였고, 담배는 조선의 중요한 상품 작물로 자리 잡았다. 술과 더불어 담배는 사치와 풍속 교정을 위해 영·정조기에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지만 왕실에서도 필요한 물건이었고, 이미 기호식품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이처럼 청백색의 유색에 쌍희(囍)자를 시문한 청화백자 담뱃대가 등장하였다.[일본 고려미술관, 조선 19세기, 지름 2.6㎝.]
<백자‘낙동김셔방댁항’명항아리>   
조선 후기 서울 사대부 집안에서 과실주나 게장 등을 담을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는 바닥에 갈색 산화철로 ‘낙동김셔방댁항’이라 적혀 있다. 이를 한문으로 옮겨보면 ‘駱洞金書房宅 茶禮缸’ 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례는 머루, 다래와 같은 과실로 다래항은 바로 다래로 술을 담근 항아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19세기 생활용품으로 사용된 백자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몸통이 직립하고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의 항아리는 이 시기 자주 발견된다.[간송미술관, 조선 19세기, 높이 22㎝.]

특히, 연적의 경우 다양한 모티프를 본 떠 제작되었는데 잉어, 해태, 학, 감, 복숭아, 금강산, 원형, 사각, 부채, 가옥 등이 그 예다. 이들 다양한 상형 연적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이들 연적이 일상 생활용기로서뿐 아니라 장식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 다. 이 중에는 중국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담하고 질박한 조선풍 디자인을 하고 있다. 중화풍 양식의 홍수 속에서도 투박하지만 소박하게 조형된 것은 이 시대 백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미적 가치를 떠나 실제 조선 주택의 생활공간에서 목가구와의 조화와 상차림에는 화려한 일본이나 중국 그릇보다는 조선백자가 한결 어울릴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로운 음식의 출현과 식습관에 따라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우유를 담아 마시던 제호탕항(醍醐湯缸), 경옥고를 담았던 항아리, 기름병 등이 새롭게 선을 보였다. 반상기의 경우도 기본이 되는 오첩에서 칠첩과 구첩, 십이첩까지 판매되고 있었으며 청화백자와 양각백자, 순백자 등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결국 전통적인 제기와 식기, 문방구, 화장용구 이외에도 다양한 생활용구가 제작되었다.354)

<청화백자연어문병>   
메기와 쏘가리, 잉어, 청어(鯖魚) 혹은 붕어 등은 원대(元代) 이후 청화백자 문양에 자주 사용된 것들로 청렴결백을 상징한다. 특히, 여기에 연꽃이 첨가되면 그 의미를 배가시킨다. 목이 길고 배가 볼록한 이 병의 문양들은 그 상징 의미를 제외하고라도 메기와 다른 물고기, 새 등이 원근과 크기를 무시한 채 구름 위를 같은 방향으로 자유스럽게 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19세기 분원 백자의 특이한 문양 묘사를 잘 보여준다.[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조선 19세기, 높이 28㎝.]

한편, 문양은 길상문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복록수를 상징하는 다양한 길상문들이 주를 이루었다. 도자의 속성상 길상문이 주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이 시기는 복록수를 문자화하여 노골적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이나 잉어, 부귀길상의 모란,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와 불수감(佛手柑) 등이 시문되었고 중국어의 동음이의(同音異義)어 방식에서 유래한 상징의미를 지니는 문양들도 있다. 예를 들어 연꽃은 연속의 ‘連’이나 첨렴의 ‘廉’을 상징하고, 복(福)과 발음이 같은 박쥐가 복(蝠)을 상징하는 것 등이다. 국화 역시 ‘菊’의 발음이 ‘吉’과 같아 길상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군자와 별개로 각종 사발·합 등에 단독으로 큼직하게 장식적으로 묘사되었다.

<청화백자함풍년제(咸豊年制)명다각접시>   
19세기 백자에 나타난 용의 모습은 머리가 커지거나 용트림이 과도한 모습을 보이는 등 과장되고 부자연스런 경우가 많다. 또한, 발톱의 수도 4개로, 이전의 5개에서 줄어들었다. 이 접시처럼 다각형에다 청의 연호까지 새긴 것은 더욱 중화풍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850년대 이후, 지름 21.3㎝.]
<운현명청화백자모란문항아리>   
19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운현(雲峴)’명 그릇들은 운현궁이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곳이어서 19세기 후반으로 편년이 가능하다. ‘운현’이라는 명문은 접시와 항아리, 대접 등 일상 생활 용기 등에 고루 시문되었다. 이 항아리는 구연부가 밖으로 경사졌고 몸체는 원통을 살짝 눌러놓은 듯한 이 시기 특유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절지 형태의 커다란 모란은 부귀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주전자와 병, 접시와 발 등에 두루 시문되었다.[일본 개인 소장, 조선 19세기 후반, 높이 21㎝.]
<청화백자동채십장생문다각병>   
양각 백자는 조선 말기 분원 백자의 가격을 적어놓은 『분원공소절목』에도 청화백자보다 가격이 비쌀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는 제작상의 어려움과 장식적 효과 때문이다. 이 병은 몸체와 구연부를 별도로 만들어 접합한 보기 드문 육각병이다. 양각으로 십장생을 조각하고 여백을 청채한 후 굽 부분을 산화동으로 채색하였다. 다각병은 19세기에 기존의 팔각 뿐 아니라 육각이나 다이아몬드 형태의 12각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9세기 후반, 높이 22.5㎝.]

문양의 필치는 아쉽게도 18세기와 비교할 때 격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는 왕실과 사대부 등 고급 수요층이 조선백자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그릇에 좀 더 관심을 두면서 화원에 의한 시문이 필요한 고급 백자의 수요가 줄고 이에 따라 장인들에 의한 문양 시문이 더 많아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문 방식은 대개 주제 문양과 종속문 등을 윤곽선 위주로 거칠고 신속하게 그리든가 공필(工筆)로 기하문 등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문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파격적인 구도와 배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시기 즐겨 그려진 십장생은 각각의 문양 소재 크기가 무시된 채 독립적으로 배치, 시문되어 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민화의 구도, 배치와 유사점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육중한 사슴, 금방이라도 물속을 헤집고 나와 하늘로 도약할 태세의 거대한 거북처럼 각각의 크기나 위치와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그려낸 동화의 세계가 19세기 청화백자에 펼쳐진 것은 이 시기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청화백자십장생문편호>   
편호는 조선 전기에도 제작되지만 후기로 가면 굽이 타원형으로 바뀌고 몸체는 두 장의 접시를 별도로 제작하여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중화풍의 반룡 등을 좌우 측면에 접합하여 장식성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이 편호에 나타나는 문양은 십장생의 모든 요소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사슴과 얼굴을 뒤로 돌린 거북에서 사실성을 뛰어넘은 19세기 조선백자만의 멋을 느낄 수 있다.[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조선 19세기 후반, 높이 23㎝.]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백자는 급변하는 주변 정세와 수요층의 변화를 잘 소화하고 내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당면한 조선의 현실을 문양과 기형, 색상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수요층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중국 그릇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체적인 취사선택이 엿보이기도 하였다. 고난의 순간에도 있는 그대로의 단점을 드러내는 과감성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와 좌우 비대칭의 달항아리, 다양한 청화백자 문방기명에서 각 시기마다 수요층의 미감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또한, 조선 최고의 화원들이 그린 문양의 필치와 구도는 당시 회화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백자에 어울리는 변형이 시도되어 조선의 특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분원은 피폐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재정악화와 내부 관리들의 부패로 분원공소로 바뀌었다. 그나마 오래지 않아 회사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일본이나 중국과의 그릇시장 경쟁에서 점차 설 땅을 잃었던 것은, 조선 말기 조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필자] 방병선
353) 『分院磁器貢所節目』, 규장각 古 4256-11.
354) 19세기 실제 그릇의 형상은 다음 책의 도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淺川巧, 『朝鮮陶磁名考』, 朝鮮工藝刊行會,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