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을 내면서

현대의 우리 사회는 대단한 배움의 열정이 지배하고 있다. 공교육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학원 등의 사교육을 통해서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학업에 온 힘을 다하는 중고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유치원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온갖 배움에 열중하고 있다. 배움의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 연주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수영이나 건강 체조를 배우기도 하며,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기도 한다. 이렇게 온 국민이 배움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기 계발, 능력과 실력의 제고, 나아가 사회적 지위의 성취 등 다양할 것이다. 그 이유나 계기가 어떠하든 간에 배움을 통해 능력은 상당히 고양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배움에 대한 관심과 집착에는 과거부터 이어온 관성이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여타의 동물과 달리 문화를 발전시켜 오고 있다. 앞사람의 경험, 지혜, 가치관, 도덕, 예술 등을 뒷사람에게 전하여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수와 축적의 전제가 되는 배움과 가르침이 원활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사회와 나라는 역사가 풍부해지고 문화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원시 시대부터 배움과 가르침은 중요하였다.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고 열매를 채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였고, 주거지를 선택하고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익혀야 하였다. 여러 가지 옷을 제작하는 것, 장신구를 만드는 것도 지혜 있는 이에게 배워야 하였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 가치관, 기능도 역시 배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문화는 전수되고 덧붙여져 발전할 수 있었다.

인간의 경험이나 문화는 문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엄청나게 정리되고 축적되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내용도 타인의 글을 통해 확인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한자의 사용이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고조선 말기부터는 한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이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배층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문서를 작성하고 옛 전적을 연구하며, 외국과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배움과 가르침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되면 그러한 한문의 습득은 국가가 설치·운영하는 교육 기관을 통해 제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배우는 교재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가 중심이었다. 이것을 통해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습득하고, 아울러 유교적 가치관을 배웠다. 국가 경영의 방향, 치자의 자세, 충효 등을 배워 국가와 사회의 운영에 적극 반영하였다. 제도 교육을 통해 양성한 사람들은 국가 경영의 책임자인 관인으로 흡수하였다. 대체로 제도 교육은 삼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지방의 거점 도시에서도 제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교육이 실시되어 능력 있는 이들이 양성되었다.

고려에 와서 과거제가 실시됨에 따라 배움의 기회를 얻는 층이 크게 확대되었고, 배움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매우 높아졌다. 문치주의 사회에서는 배움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상의 음덕을 입은 관직 진출도 있었지만, 과거라는 공개적인 시 험에 합격하는 것을 누구나 영예롭게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는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국자감과 향교를 통해 배움을 제공하였지만 사학, 곧 사설 교육 기관도 배움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효경』·『예기』·『논어』 등이 중심 교육 내용이었지만 과거 시험에서는 경전에 대한 이해보다는 제술(製述)이 좀 더 중시되었다. 작문 능력을 평가하는 제술에 합격하기 위해서도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였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부터 주자가 『논어』·『맹자』·『대학』·『중용』을 주석한 『사서집주』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제술보다 명경(明經)이 강조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은 관학으로 성균관·사부 학당·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 서재·서당·서원이 있었다. 국가는 교육을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확산시키고, 통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성균관은 학생을 교육하였지만, 성현을 배향하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성균관에는 생원과 진사가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지배층의 자제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성균관의 학생은 정원이 200명이었다. 국가에서는 문구류와 서책, 식사,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였다. 성균관의 학생은 사서와 오경을 공부하는 데 3년 7개월이 소요되었지만, 개인별·수준별 학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 드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성균관의 학생들은 자치 조직인 재회(齋會)를 결성하여 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자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였다. 재회를 통해 의견을 모아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 의견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성균관을 떠나 버리기도 하였다. 성균관의 교관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이를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기피하는 수가 많아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맡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방의 향교는 시설과 구조가 성균관과 유사하였지만, 규모가 작았다. 수령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지만, 가르치는 일은 중앙에서 파견한 교관이 맡 았다. 향교는 인재 양성과 성현을 배향하고 지방 풍속을 교화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향교에는 양반뿐 아니라 양민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다. 후기에는 양반 자제의 입학은 줄어들고, 양민과 서얼 출신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향교의 학생은 수업료를 부담하지 않았고, 과거 응시 자격이 있었으며, 군역을 면제받았다.

서원은 16세기 중반 이후 세워져 학문 연구와 선현을 제사 지내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사림의 자치 활동을 보장하였고, 지방의 여론을 수렴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성리학의 경전을 중심 공부 교재로 삼았다.

서당은 조선 후기에 급증하였는데, 규모가 작고 정부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당을 세우고 운영하는 주체는 매우 다양하였다. 서당의 훈장은 외부에서 초빙할 수도 있었지만 마을이나 문중의 사람이 맡기도 하였다. 서당에는 5, 6세에 입학하여 15, 16세에 공부를 마치고 대개 향교에 진학하였다. 서당에서는 『천자문』·『동몽선습』·『통감』·『소학』을 공부하였으며, 교재를 읽고 암송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까지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은 약간의 변천이 있었지만 『논어』·『효경』·『예기』 등 유교 경전을 배우는 것이 중심이었다. 이를 통해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터득하였고, 유교적인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선생이 경전을 해석하면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이를 듣고 이해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하였다. 토론이나 문답보다는 선생의 강의가 중심이었고 철저한 암기를 전제로 하는 공부였다. 학생에게는 인격의 도야나 자기 성취도 중요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제도 교육을 통한 배움은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에게는 일부 최상층에서 가정 교육을 통해 배움의 기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과학 기술, 의술, 법 등 실용적인 공부는 우선시되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국교가 확대되면서 서구 문물이 밀려들게 되자 배움과 가르침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이 과거의 유교 경 전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의술 등으로 확대되었고, 각종 외국어를 습득하게 되었다. 가르치는 주체도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많이 퇴색하고 외국인 선교사나 개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부는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고 행정의 실무를 담당할 필요에서 학교를 설치하였는데, 동문학·육영공원이 그것이었다. 1883년에 세운 동문학은 근대적 관립학교로서 주로 외국어를 가르쳤고, 1886년에 설립한 육영공원에서는 현직 관료와 고관의 자제에게 수학·자연 과학·역사·정치학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때에는 교육 입국 조서가 반포됨으로써 각종 관립학교가 세워져 교육을 담당하였다. 최초의 사립학교는 1883년에 세워진 원산 학사였다. 원산 학사에서는 외국어·역사·지리·자연 과학을 가르쳤다. 한편,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전파하고 서양 문화를 보급하려고 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배재학당·이화학당·경신학교·정신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는 을사조약 이후 3∼4년 사이에 3,000여 개의 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에서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 우리의 역사와 지리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이에 통감부에서는 1908년에 사립학교령을 내려 학교의 설립을 인가받도록 하였고, 검정에 통과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는 등 탄압을 하였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남학생만이 아니라 여학생도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교육 내용이 종전의 사서오경 중심에서 크게 변하였으며, 학생들의 자치 활동도 다양해져 각종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교육을 통해 조선인에게 제국 신민의 자질과 품성을 갖도록 하고, 기초 실무 능력만을 배양하려 하였다. 일제는 민족 교육을 금지하려고 조선 교육령·사립학교령·서당 규칙 등을 제정하여 학교의 설치와 교육 내용을 통제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경에는 사립학교가 690여 개로 감소하였다. 서당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대학이나 전문학교 같은 고등 교육 기관은 설치하지 않았다. 지방에는 보통학교 를 설립하였으며, 서울을 비롯한 일부 대도시에 극소수의 고등 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학교에서 식민지 하수인으로서 필요한 실무 교육만 받도록 하였다. 3·1운동 이후에 일제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교육한다고 표방하면서 경성제국대학을 설치하여 학생의 3분의 1을 한국인에게 할당하였으며, 초등 교육을 약간 강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제도 교육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고급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였다.

흔히 “배워야 한다.”, “배움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복잡하여 어느 일면만을 부각시켜서는 곤란할 것이다. 문제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부단히 배우며 사는데, 그 배움은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배움을 통해 전체 사회 생활의 수준이나 문화적 역량이 제고되는 것이다. 배움, 그것은 우리 사회가 갖는 저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배움의 내용이나 수준, 배움의 방식 등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배움의 열정은 현재 우리 사회의 여건 속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과거로부터의 유산이라는 측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밑거름으로 해서 작성하였다. 연구의 내용과 수준에 편차가 있고, 연구되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아 기술하지 못한 점도 있다. 기존의 연구를 정리하면서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이나 모습, 자치적인 활동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제도권의 교육에 초점을 두어 기술하다 보니 배움과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한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배움은 거의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5년 8월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필자] 이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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