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를 내면서

“부∼자∼되세요!”

어떤 광고에 나오는 이 말이 이제는 생소하지 않다. 듣기에 싫지 않은 인사말이다. 그럼에도 “건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등의 좀 더 점잖고 추상적인 덕담이 우리 귀에는 더 익숙하다. 어떤 이는 이 인사말을 두고 현대 물신주의에 빠져든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인사말은 천년을 변함없이 중국인이 나누는 설날 아침 덕담이다.

동양 세계의 상인의 대명사는 역시 ‘중국 상인’이다. ‘상인(商人)’이란 용어도 중국사에서 나왔다. 중국에서 태평성대로 생각되는 하(夏)·은(殷)·주(周) 3대 중 은나라의 다른 이름인 상(商)에서 기원한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은나라 사람들은 장사를 하여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은나라 사람들은 장사에 능하였다. 이에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 매매 활동을 하는 직업을 상업(商業), 매매하는 물품을 상품(商品)이라고 하였다.

“장사치치고 간사하지 않은 상인은 없다.”는 말은 상인에 대한 동양 세계의 전통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역사를 바꾼 상인이 존재한다. 범려(范蠡)가 대표적 인물이다. 월나라의 구천(句踐)을 도와 고사 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만들어 낸 범려는 과감히 정치를 버리고 상업에 뛰어들어 상인의 비조(鼻祖)로 존경받았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라의 군주를 세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을 보려던 여불위(呂不韋). 그는 상인의 신분으로 진(秦)나라 재상의 지위에 올라 나라에 비길 정도의 부와 권력을 누렸다.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게 하고 내용 중 누구라도 오류를 지적하면 한 글자에 천금(千金)을 주겠다고 호언했던 배경이다. 제나라를 춘추 오패의 선두로 끌어올린 중상주의자(重商主義者) 관중(管仲)이 있는가 하면, 위나라를 전국 칠웅의 하나로 키운 억상주의자(抑商主義者) 이회(李薈)도 있다. 하지만 중국도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이 역사적 기조를 이루었다. 상인과 정치 세력은 잘나가더라도 언젠가는 흐트러질 관계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청나라 말기에 ‘살아 있는 재신(活財神)’이라고 불리던 호설암(胡雪巖)이 갑자기 몰락한 예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중국 역사 속에 상인의 존재와 전통이 명·청대 10대 상방(商幇)을 형성하고 중국 상인을 동양 상인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하였다.

그 중국 상인이 이제 한국 상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은 한번 정한 목표는 좀처럼 포기하거나 연기하지 않는다. 주변 강대국 틈새에 낀 약소국이자 분단국인 한국이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1991년 대전 엑스포, 2002년 월드컵 축구 대회 등을 연거푸 유치한 것을 보라. 그들의 불타는 열정과 악착같은 승부 근성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들이다. 한국 상인들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들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천만리 머나먼 길도 마다 않고 달려온다. 심지어 목표를 달성해 얻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치르는 희생이 더 크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국 상인의 적극성과 근면성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 상인의 정신 세계와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려고도 한다. “효와 충은 중국인이 죽었다 깨어나도 모방할 수 없는 한국 인의 행동 철학이다. 효성이 지극한 한국 상인과의 거래에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효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일상적인 대화나 무역 상담에서 그들의 부모나 조상을 깔보거나 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성씨에 관심을 표하고 그 성씨는 중국에서도 명문이라고 치켜 올려주는 중국 상인을 싫어하는 한국 상인은 없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부 묻기를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부모 생일에 정성이 담긴 선물을 전해 준다면 금상첨화이다.” 또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인 30만을 살육하는 남경 대학살을 저질렀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무고한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총칼 앞에서 쓰러졌다. 우리 두 나라 국민은 그 당시 힘을 합쳐 싸운 항일 동맹 관계였다.’라는 말 한마디에 감읍(感泣)하는 한국 상인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등등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전략으로 중국 상인이 한국 상인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근대 민족 국가로 발전해야 하는 시점에서 식민지로 전락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자연히 중세 경제 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발전하는 과정도 굴절이 불가피하였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은 경제 규모 면에서 세계 10위권이며, 동북아시아를 이끄는 당당한 중심축의 하나이다. 그 이면에는 기업가로 불리는 상인들이 있다. 이들의 역사적 뿌리는 어디에 있고, 정신적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자본의 민족성, 건전성, 사회적 책임이 논쟁의 도마에 오르기 이전에 우리의 역사에서 현대와 맥을 잇는 상인의 존재를 찾을 수는 없을까?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고 이를 나라 밖으로 연결시켜 국내 경제의 혈관을 통하게 했던 존재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단절된 듯 보이는 한국의 상업 문화의 특징을 밝히고 역사적 연결 고리를 이을 수는 없을까? 그 속에서 정권과 밀월 관계에 있던 상인의 운명과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나라의 재계를 움직였던 큰 상인은 역사를 이끄는 존재인가 아니면 부정되어야 할 존재인가?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상인은 한국의 전근대 역사를 통틀어 철저히 역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 다. 상인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리 ‘모리배(謀利輩)’, 간교한 장사치 ‘간상배(奸商輩)’로 불렸다. 장사를 한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받는 장사꾼 ‘상고배(商賈輩)’였던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밑바닥, 그야말로 말석(末席)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 상업은 일하지 않는 무리들로 누에를 치지 않으면서도 비단 옷을 입고, 지극히 천(賤)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물은 나라가 가진 것보다 많은 존재였다. 농부는 토지를 경작해 세금을 내고, 장인은 국가에 노역(勞役)을 바치지만, 상인은 이미 역역(力役)도 없고 또 세금도 없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못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하였을까?

어느 날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던 온달(溫達)이 궁궐에서 쫓겨난 아리따운 공주를 만난다. 평강 공주는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는 진실된 마음으로 혼인하기를 요청한 뒤, 궁궐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땅과 집,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서 살림살이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보기 좋고 비싼 말이 아닌 병들고 파리하지만 싼 말을 골라 사서 그 말을 살찌운다. 평강왕 때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온 것을 막아 낸 일등 공신 바보 온달이 세상에 진가를 드러내기 전의 일이다. 역사적 인물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등장한다. 공주는 궁궐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땅과 집은 물론 노비와 소와 말 그리고 잡다한 살림살이까지 다 갖출 수 있었다. 물건을 바꿀 수 있는 유통 경제 그리고 그것을 움직였던 상인의 존재가 온달 장군의 역사에 숨어 있는 것이다.

원시 사회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역사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도시는 시장을 통해 발전하였다. 도시의 시민(市民)은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삼국시대 왕이 살고 있는 왕도(王都)인 평양·공주·부여·경주는 한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였다. 왕권을 대신하는 지방관이 있는 곳에는 관아(官衙) 도시가 형성되었고 상업이 발전하였다. 관아 도시가 아니더라도 물건을 교환할 사람들이 있으면 자연 발생적 으로 시장이 섰다. 역원(驛院) 제도는 교통, 통신 제도였지만 역원이 있던 곳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차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도시는 상인 없이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왕도에는 시전(市典)이 있어야 했다. 신라 지증왕 때 경주에는 동시(東市)와 시장을 관리하는 동시전(東市典)이란 관청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경주에는 동시 이외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생겨나고 각 시장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립되었다. 한 나라의 왕도와 상인의 상관관계는 고려와 조선의 왕도 개경과 한양의 건설 과정에서 더 잘 볼 수 있다.

도읍 건설의 3대 주요 사업은 궁궐, 관아 그리고 시전의 완성이었다. 이는 시전이 국가 조달품과 생필품 공급을 담당하는 기능을 넘어 조세의 수납과 소비 과정에 이르기까지 빠질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시전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역사 자료가 풍부해지는 조선시대부터는 베일에 가려졌던 권력과 거상의 미묘한 정치 역학 관계가 밝혀지고, 상인의 이름도 조금씩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째와 둘째 장(章)인 ‘상인과 정치 권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에서는 이러한 권력과 상인의 관계 그리고 한양 상인의 모습과 그들의 존재 양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 전통 사회의 국가 간 무역은 대체로 중국과 여러 나라 사이에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貢物)을 주고받는 조공 체제의 형식 속에 이루어졌다. 중국으로의 사신 파견은 외교적 안정을 이루는 방편임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 창출의 통로이자 문화 교류의 가교(架橋)였다. 부여와 동예는 물론 고대 국가로 성장한 고구려도 오래전부터 중국 측에 금·은·말·가죽류·활 등을 수출하고 비단을 비롯한 직물류를 수입했다. 백제도 바다를 통해 중국의 남조, 일본 등지와 빈번한 무역 활동을 펼쳤다. 신라도 금·은·동·유황·인삼·수달가죽·말 등을 수출하고 중국의 비단과 금은 세공품·서적 등을 수입했다. 삼국통일 이후 청해진을 중심으로 펼쳐진 ‘해상왕 장보 고’의 활동은 고대 한국 무역사의 꽃이라 평가할 만하다.

고려시대 상인들의 무역은 국제 사회에 ‘코레아(Corea)’의 이미지를 매우 인상 깊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정도로 활발하였다. 고려 상인들은 송나라와는 물론 거란, 여진, 몽고와 무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식국(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역하였다. 14세기 무역은 왕실과 권력층의 주도로 더욱 활발해졌다. 충렬왕의 후비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는 잣(松子)과 인삼(人蔘)을 강남(江南)에 보내어 많은 이익을 얻었는데, 나중에는 환관(宦官)을 각지로 보내 이를 강제로 거두어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권세가가 서로 앞을 다투어 무역을 하여 진이(珍異)한 물품을 백성들에게서 빼앗는 현상도 일어났다. 임금이 직접 양(羊)을 무역하도록 지시하는 일도 있었다. 무역이 활발해지자 민간에서는 사치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에 “길가에는 제왕(帝王)의 의복을 입은 사내종과 후비(后妃)의 장식을 한 계집종이 널려 있다.”, “민가(民家)에서는 혼인 때 비단 요와 비단 이불, 가죽과 폐물 등을 갖추지 못해 심한 경우에는 결혼의 적정 연령을 넘긴다.”는 과장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에 사치를 단속하고 세모시(細紵)와 마포(麻布)만을 쓰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고려에서 나지 않는 놋쇠와 구리로 만든 그릇을 쓰지 말고 자기(瓷器)와 목기(木器)를 쓰도록 습속을 고쳐야 한다.”고도 했다. 이처럼 국제 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물품은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사치품 무역을 단순히 국내 물품의 유출과 소비재 수입에 따른 손실 무역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와 소비 현상’은 자본주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이중환(李重煥)은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는 앉아서 재화(財貨)를 움직여 남쪽으로는 일본과 통하며 북쪽으로는 연경(燕京)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끌어들여 더러는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라고 하였다. 서유구(徐有榘)는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 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교역을 하면 반드시 재물을 얻는 법이다.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수백만 금을 벌어들인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양에 가장 많고 다음이 개성이며, 그다음은 영남의 동래와 밀양 그리고 관서의 의주·안주·평양에 많다. 그 모두가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상에 있어 국내 상업에서보다 배의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하였다. 국내 상업과 국제 무역을 연결하는 거상의 존재가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셋째 장과 마지막 장에서 다룬 평양, 의주, 개성, 동래는 한양과 함께 무역을 통해 조선의 거상을 배출한 상업 도시이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거상은 한국 상업사의 전통을 간직한 5대 상단인 것이다.

각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상업 발전은 그 지역의 상업 문화와 상인의 특성과 맞물려 있다. 상인은 취급 물건에 따라, 자본의 규모에 따라,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고 일정한 규율 속에서 행동하였다. 상인들만의 언어, 습속, 금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상호 경쟁 관계도 형성되었다. 한양 상인은 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조선 최대 상단이었다. 평양 상인은 고도(古都)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한양 상인에 대한 강한 라이벌 의식을 지녔다. 평양 출신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한양 상인에게 팔아넘기고 야릇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양 상인에 필적하며 굵직굵직한 부자를 배출했던 개성. 이성계의 목을 벤다고 조랭이 떡국을 끓여 먹는 도시. 그 속에서 개성 상인은 송도 사개부기(四介簿記)를 만들어 내고, 전국에 그들의 상업망을 형성하였다. 서북 지방의 차별 철폐가 명분이 된 평안도 농민 운동에 뒷돈을 댄 상인 중에는 개성 상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북쪽의 국경 도시이자 국제 무역의 관문이던 의주. 중국과의 무역을 인정받은 의주 상인은 개성 상인과 무역의 이익을 나누는 절묘한 파트너였다. 일본과의 외교 통로에 위치한 동래 상인. 그들은 일본과의 무역을 성사시켜 중국-조선-일본의 경제를 국제 네트워크로 완성시키는 무역상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5대 상단을 이해하지 않고 동북아시아의 국제 무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한국의 5대 상단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자본의 향방은, 그리고 자본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그들의 인적 계보는 계승되고 있는가? 이익을 다투었던 상업의 역사는 권력의 역사보다 기복과 부침이 훨씬 많다. 그러나 각 지역의 상인이 이룬 그들의 상업 문화와 정신 세계는 오늘날에도 분명 상업 활동과 기업 활동의 내면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잊고 있었으나 중요한 것이라면 되찾아야 할 것이요, 지금껏 이어지되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당연히 바꾸어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 상인의 역사적 모습은 곧 가까운 미래에 반추하게 될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005년 8월

건양대학교 교수

[필자] 이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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