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를 내면서

돈은 오늘날 한자어로 화폐 또는 통화라 한다. money는 화폐로 번역하고 currency는 통화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화폐는 형태와 상관없이 돈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통화는 원래 지급 수단으로 사용되는 주화(鑄貨, coin)나 은행권을 지칭하는 말로 협의의 돈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은행권과 주화를 합한 것을 통상 화폐 발행고라고 하고 민간 보유 현금과 요구불 예금을 합한 것을 통화라고 정의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통화는 광의의 돈이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화폐나 통화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돈을 한자로 천화(泉貨)나 전(錢)이라 하였다. 전은 오늘날 한자 사전에 돈으로 나오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중량을 가지는 돈, 곧 금속 화폐(metallic money)를 의미하였다. 천화는 그것뿐만 아니라 직물 등 비금속 상품 화폐도 포괄하였다. 전의 가장 좁은 의미는 동전(銅錢)이어서, 동전을 전화·전폐, 은으로 된 돈을 은화(銀貨)라 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은전(銀錢)이란 말도 사용하므로 전의 더 넓은 의미는 금속 화폐이다. 화(貨)나 폐(幣)도 돈을 지칭하는 말이나, 전화·전폐·은화·저폐(楮幣)·저화 등처럼 화폐 소재를 앞에 표시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저폐·저화란 닥나무로 만든 지폐이다.

돈, 곧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의 정의는 기능과 결부되어 있다. 첫째, 화폐는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것이 화폐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다. 그래서 화폐란 재화나 용역을 교역하는 데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불 수단이라고 정의된다. 둘째, 화폐는 지급 수단으로 기능한다. 화폐로 거래를 종결하기 때문에 화폐는 채무의 최종적인 결제 수단으로 기능한다. 셋째, 회계의 단위 내지 가치의 척도로 기능한다. 넷째,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도 기능한다. 금속 화폐부터는 대개 이 기능들을 모두 수행하지만, 금속 화폐가 보급되기 전에는 일부 기능만 수행하는 화폐가 드물지 않았다. 예들 들면, 조선 초 저화 유통이 실패한 후에도 그것은 가치 척도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노비 매매 문서 등에 나타났다.

화폐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실로 다종다양하다. 그것은 대체로 ‘비금속 상품 화폐(물품 화폐라고도 한다) → 금속 화폐(칭량 화폐 → 주조 화폐) → 불환 화폐(태환 은행권 → 불환 은행권) → 전자 화폐’라는 변천 과정을 거치고 있다. 곡물, 직물 등과 같은 초기 화폐는 교환의 매개 수단이기 이전에 자체로 사용 가치를 가진 상품 화폐(commodity money)이다. 최초의 화폐는 비금속 상품 화폐였으나, 금속 화폐에 비해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였다. 첫째, 내구성이 약하여 저장하기 불편하다. 둘째, 이질적이어서 가치 척도로서 약점을 가진다. 셋째, 분할·휴대에 불편하여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서도 약점을 가진다. 거래 규모가 커지고 원격지(遠隔地) 거래가 성장할수록, 비금속 화폐의 불편이 더욱 커져 결국 금속 화폐가 요청되었다. 최초의 금속 화폐는 무게를 달아 교환하는 칭량(稱量) 화폐였다. 이것은 무게를 달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일정한 규격의 화폐를 주조하였다. 중량이나 단위를 규격화하여 주조한 금속 화폐를 금속 주조 화폐, 줄여서 주화(鑄貨)라고 한다. 여기서 중량을 줄인 정도나 마모된 정도가 심하면 액면 가치와 소재 가치가 분리되어 이런 주조 화폐는 더 이상 칭량 화폐 또는 상품 화폐가 될 수 없다.

액면 가치와 소재 가치가 일치하는 상품 화폐가 퇴조하면서, 소재 가치와 상관없이 액면 가치가 법이나 관습으로 통용이 보장된 불환 화폐(fiat money)가 등장하였다. 불환 화폐 중에 법으로 통용력이 보장된 것이 법화(legal tender)이다. 주화든 지폐든 액면 가치가 소재 가치로부터 분리되면 불환 화폐가 될 수 있다. 대표적인 불환 화폐는 지폐이다. 10,000원권의 소재 가치는 10원도 못 미칠 것이다. 은행이 발전하면서 은행에 지급을 청구할 수 있는 지폐인 은행권(note)이 등장하였다. 초기의 은행권은 태환이 보장된 상품 화폐였다. 중앙은행이 은행권의 태환을 정지한 이후에는 그것이 불환 화폐의 중심이었다. 불환 화폐는 정부든 은행이든 누구도 상품으로 교환해 주지 않은 화폐로, 액면 가치는 소재 가치가 아니라 발행 주체의 권위와 신뢰에 의해 유지된다.

신용 경제가 성장하면서 어음이나 수표가 화폐를 대신하여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어음이나 수표는 은행의 결제 전까지는 채무로 남아 있어서 최종적인 지급 수단이 아니나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신용 화폐(credit money)라고도 한다. 수표나 어음이 전자 통신 기술의 발전에 수반하여 카드나 전자 이체로 대체되어 감에 따라, 예금의 현금 역할은 증대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전자 화폐(electronic money)는 카드에 이체된 일정 금액이 지출에 따라 줄어드는 선불 카드로서 기존의 은행권이나 주화를 대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화폐의 변천 과정은 대체적인 추세로서, 이 도식에 맞지 않는 사례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는 주화로 만든 동전이 널리 유통되다가 송·원대에 지폐가 등장하였고, 명대부터 지폐가 소멸하자 은화라는 칭량 화폐가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은화가 제한된 영역이나마 장기간 통용되었고 원 간섭기에 지폐가 제한적으로 유통되었으나, 고려 말에 소멸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지폐·동전의 통용 정책이 실패하였다. 전근대에 지폐의 활발한 유통을 경험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중국 지 폐가 어느 정도 유통된 나라도 원 간섭기의 고려뿐으로 보인다. 당시의 지폐는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고, 은행권이 아니어서 태환되지도 않았다. 전근대에는 칭량 화폐와 주화인 금속 화폐가 널리 사용되고 발전하였다.

전근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화폐가 경합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쌀, 삼베, 모시, 은화, 지폐 등 특히 다양한 화폐가 경합하였다. 가장 고액 거래에는 은화, 가장 소액 거래에는 쌀이 주로 이용되었다. 15세기 전반에 무명이 널리 보급되면서, 물품 화폐의 주종은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었다. 17세기에는 은화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무명이 주종 화폐의 자리를 내어 주고, 1678년부터 동전이 보급되면서 은화를 압도하여 갔다. 이리하여 직물 화폐인 포화(布貨)가 주종을 이룬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는 17세기에 금속 화폐 시대로 전환하였다. 동전이 널리 보급된 후에도 쌀·무명은 동전의 보조 화폐 기능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 책의 제1장에서는 비금속 화폐 시대를, 제2장에서는 금속 화폐 시대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의 기점을 근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으로 잡는다.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식민지화되기까지는 제3장에서 다룬다. 이 시기에는 당오전과 백동화가 남발되었고 멕시코·일본의 은화, 일본의 은행권 등이 들어와 활발히 유통되었다. 한국 정부는 1894년 은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은화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였다. 이후 금본위 화폐 제도의 도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진출한 제일은행이 1902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은행권을 발행하였으나, 한국인은 그 수수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은행권은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으로 법화로 지정되었다. 1909년에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1911년 조선은행으로 개칭)이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권을 처음 발행한 것은 주권이 탈취된 직후였다. 조선은행권은 발행되던 1910년 말부터 통화량의 과반을 차지하였고, 1915년부터 80%를 넘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화폐의 중심은 주화에서 지폐로 바뀌었다. 백동화는 화폐 정리 사업을 통해 폐기되었고, 엽 전을 제외한 구화폐의 통용은 1920년 말까지만 허용되었고, 엽전도 1930년부터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의 화폐는 제4장에서 살펴본다.

우리는 돈이라고 하면 지폐(은행권)와 주화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은행 이용이 일상화된 시대라면 현금 통화는 여기에다 예금 통화(요구불 예금+저축성 예금)까지 포함하여 생각해야 한다. 개항 후 은행의 출현과 더불어 당좌 예금이 등장함에 따라 당좌 수표가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금융 기관이 증가함에 따라, 유력 상공업자들에 의한 예금 통화의 이용이 늘었으나 그것이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당시 예금 통화는 당좌 예금을 말하며 저축성 예금을 포함하지 않았다. 광복 후 1948년 은행이 발행한 당좌 수표, 이른바 자기앞 수표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고액 거래에 사용되었다. 어음 및 수표와 같은 신용 화폐의 이용도 계속 증가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온라인 시대가 열리면서 전자 이체가 확대되고 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하여 신용 카드, 직불 카드 등을 이용하는 결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예금 통화가 현금 통화를 압도하게 되었다. 1990년대 디지털화의 진전과 더불어 다양한 카드가 도입되면서 전자 화폐 시대가 열렸다. 오늘날 거래에는 은행권이나 주화 같은 현금보다 수표나 카드가 널리 사용되고 은행이 그 거래 내역에 따라 결제하므로, 결제 수단이 다양화되고 현금 결제도 줄어들었다. 광복 후 화폐 경제의 성숙은 제5장에서 다룬다.

사회주의 북한의 주민에게 화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는 제6장에서 고찰한다. 사회주의 이념은 화폐·자본의 숭배를 비판하므로, 사회주의혁명 후 소련은 화폐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적어도 경제 계산 단위로서의 화폐 기능까지 도외시할 수 없어서 단념하였다. 사회주의에서는 시장의 영역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에 화폐의 기능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북한에서의 화폐 유통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보다도 더욱 제한되었다. 북한에서도 생산재는 무현금 거래, 소비재는 현금 거래라는 사회주의 원칙을 유지했지만,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 달리 식량을 비롯한 일부 생필품의 배급제를 장기간 유지해 왔기 때문에 화폐 유통은 그만큼 제한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 경제난이 심화되어 국가가 더 이상 생산재와 식량을 정상적으로 공급해 주지 못하자, 기업과 주민들은 시장에서 생산재와 식량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 화폐의 기능은 대폭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 주화인 상평통보 1개=닢(葉)은 1푼(文)이고, 10푼이 1전(錢), 10전이 1냥(兩)이었다. 냥과 전은 조선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체에서 금속 화폐를 헤아리는 단위였다. 이러한 화폐 단위는 무게 단위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무게 단위는 10푼이 1전(3.75g), 10전이 1냥, 16냥이 1근(斤)이었다. 상평통보 한 개의 무게는 원료인 동의 시세에 따라 4.5∼9.4g에 걸쳐 있었다. 1894년에 조선 정부가 은본위제를 도입하면서 중국에서 쓰던 멕시코 은화의 단위인 원(元)을 차용하여 신식 화폐 5냥을 1원으로 헤아렸다. 1905년 식민지 권력에 의한 화폐 정리 사업에서 은본위 구화폐 10냥(2원)은 금본위 신화폐 1원(圜)으로 교환되었는데, 원은 일본의 화폐 단위인 원(圓, 약자로 円)과 가치를 같이 하였다. 어느 1원도 100전이다. 한국은행이 한일 병합 직후 발행한 화폐의 단위도 원(圜)이었으나, 그 명칭을 바꾼 조선은행이 1911년부터 발행한 화폐의 단위는 원(圓)이었다. 일본인은 ‘圓’을 ‘엔’으로 읽으나, 조선인은 한자 발음 그대로 ‘원’으로 말하고 썼다. 북한 정부는 1947년부터 수차례 화폐 개혁을 하였으나, 화폐 단위를 바꾸지는 않았다. 남한 정부는 1953년에 100(圓)=1환(圜)으로 화폐 단위를 변경하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을 단행하였으며, 1962년에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명목 단위를 10분의 1로 다시 절하하였다. ‘圜’의 음이 바뀌었으며, 남한에서 1962년부터 사용하는 화폐 단위인 원은 한자 표기를 가지지 않는다. 1894년 갑오개혁과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을 과도기로 하여 ‘냥’ 체제가 ‘원’ 체제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한국사에서 외국 화폐의 유통은 어떠한가? 고구려 성립기까지 서북 지방에서는 중국의 금속 화폐가 꽤 유통되었다. 고려시대에 송나라 화폐가 상 당량 유입되었으나 화폐로서 활발히 기능하지는 않았다.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 지폐가 제한적으로 유통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은화가 대량 유입되었고, 그 후부터 18세기 초까지 일본 은화가 많이 들어왔다. 금속 화폐 시대가 개막된 17세기는 외부에서 유입된 은화가 화폐의 주역이었다. 그러다 조선 정부가 제조한 상평통보는 17세기 말부터 은화를 압도하였고, 18세기 중엽 일본 은화의 유입은 두절되었다. 개항 후 외국 화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가치가 안정되고 송금에 편리한 이점에 힘입어 1890년대 후반에는 내륙의 대도시에도 활발히 통용되었다. 조선 정부는 화폐 주권을 수호하려는 의식을 가졌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화폐 정리 사업으로 한국은 일본 화폐권에 편입되고 말았다.

광복으로 미군정의 통치를 받게 된 남한은 엔화권으로부터 분리되어 달러권에 편입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에 1달러=15원(현재 원화로는 0.15원)이라는 환율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 돈의 가치는 달러에 비해 8만분의 1 이하로 하락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경상 수지 흑자국이 될 때까지 한국은 만성적으로 외화 부족에 시달렸다. 외환 부족 시대의 상징이 암달러상이었다. 외환 사정이 나아지고 외환 자유화가 진전됨에 따라, 한국인도 외화를 넉넉히 가지고 자유롭게 여행하고 해외에 투자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돈은 경제의 혈맥이라 할 수 있다. 돈이 적절히 공급되어야 경제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거꾸로 경제 성장은 돈 이용의 활성화와 화폐 경제의 성숙을 요청한다. 1876년 개항 이전 한국 경제는 심한 기복을 가지면서 완만히 성장하는 데에 그쳤는데, 그 때문에 화폐 경제도 더디게 성장하였다. 뒤집어 보면 화폐 경제의 후퇴 또는 더딘 성장이 경제 전반의 완만한 성장을 낳은 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1860년경 동전량은 1,400만 냥 내외이고, 그것은 쌀 생산량의 13%인 200만 석 정도를 살 수 있고, 자급분을 포함한 국내 총생산의 3% 정도로 추정된다. 개항 후 국내외 통화량이 급증하여 그 총량은 1904년경 일본 돈으로 2500만 엔으로 정도였다. 그것으로 쌀을 560만 석 정도 구입할 수 있었다. 화폐 경제의 가장 괄목할 발전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났고, 그러한 급격한 발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금융 자산 소득이 1980년에 국민 총소득의 세 배를, 1998년에 여섯 배를 넘게 되었다.

금속 화폐, 특히 동전이 통용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돈의 위력은 커져 갔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방랑 시인 김삿갓은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나 돈이 바로 항우장사지”라고 읊조렸다. 도덕주의가 강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상평통보가 발행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동전을 없앨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돈 없이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민생의 안정이 손상될 것을 자각하면서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이 배금 사상을 비판하여 왔지만, 1990년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계획 체제가 와해되는 가운데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통화량의 증가가 실물 경제나 금융 경제의 성장보다 빠르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 전반에는 동전량이 안정적으로 증가하여 물가가 안정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장기간 인플레이션을 경험하였는데, 그 요인 가운데 한 가지로는 당백전·당오전·백동화처럼 소재 가치보다 명목 가치가 훨씬 높은 화폐의 남발을 들 수 있다. 광복 직전부터 6·25 전쟁에 이르는 동안에는 극심한 정치·경제적 혼란의 와중에 격심한 통화 남발로 한국 역사상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통화 남발과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은 박정희 집권기에도 지속되었다. 1980년 외채 위기를 계기로 세계적인 물가 안정 추세 가운데 물가 안정책이 강력히 추진됨에 따라, 긴 인플레이션 시대가 마감되었다.

2006년 7월

고려대학교 교수

[필자] 이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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