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

3. 고려시대의 남녀 옷차림

[필자] 김문자

남자 복식은 크게 왕복(王服), 백관복(百官服), 평상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시대 왕과 관리는 특별한 상황에 맞추어 제복(祭服), 조복(朝服), 공복(公服), 상복(常服)으로 구분하여 입었다.

먼저 왕의 옷차림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복은 왕이 제사 지낼 때 입는 옷으로 면복(冕服)이라고 한다. 고려 초·중기에 왕은 구류면구장복(九旒冕九章服)을 착용하였고, 원 간섭기에는 선대(先代)의 것을 그대로 따른 듯하다. 그런데 일본 화장원(華藏院)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규(圭)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 실제로도 이와 같은 면복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 공민왕대에는 십이류면십이장복(十二旒冕十二章服)을 착용하여 자주성을 보여 주었으나 1370년(공민왕 19)에는 명나라로부터 다시 구류면구장복을 사여받아 사용하였다.

조복은 왕이 백관과 사민(士民)을 접견할 때 착용하는 옷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 초·중기에 관모는 복두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송나라 제도와는 다르다.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 의하면 국초에는 자황포(柘黃袍)를 착용하였으며, 그 후 의종대에는 때에 따라 자황포(赭黃袍)와 치황의(梔黃衣)를 입었다. 충렬왕 때에는 복색이 중국과 같다고 하여 지황(芝黃)으로 자황(赭黃)을 대신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황포를 사용하였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질손(質孫)’을 왕의 조복으로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장시왕도의 왕 모습>   
고려 불화 지장시왕도 중에서 공양하는 왕의 모습으로 왕의 면복을 볼 수 있다. 면류관을 쓰고 면복을 입고 손에 규를 들고 있다.
<공민왕 초상>   
종묘에 있는 공민왕 초상화로 왕의 조복을 볼 수 있다. 평각의 복두를 쓰고 홍색 대수포(大袖袍)의 조복을 입고 규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공민왕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에서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소매통이 넓은 포를 입고 있는데, 이는 고려 초·중기의 조복으로 생각된다. 또한, 공민왕대에는 조복으로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하였다. 한편, 일본 대은사(大恩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에 나타난 왕은 원유관를 쓰고 대수포(大袖袍)에 방심곡령(方心曲領)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것이 조복제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공복은 왕이 사신을 접견할 때 착용하던 옷으로, 비단으로 만든 자색 공복에 옥대(玉帶)를 띠고 상홀(象笏)을 들었다. 원 간섭기에 사신을 맞이할 때는 질손을 착용했을지도 모른다. 공민왕 이후에는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을 것이다.

<고려 벽화의 관리 모습>   
수락암동 1호분의 벽화 12지신상도의 관리의 모습으로 백관의 조복을 볼 수 있다. 양관을 쓰고 대수포를 입고 홀을 들고 있다.
<지장시왕도의 관리>   
고려 불화 지장시왕도의 인물도로 백관의 공복을 볼 수 있다. 각이 아래로 처진 복두를 쓰고 단령포를 입고 홀을 들고 있다.

상복은 왕이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던 옷으로, 고려 초·중기에는 검은 비단으로 된 높은 모자를 쓰고 소매통이 좁은 담황색의 포를 입었으며 여기에 비단으로 만든 자색대를 띠었다.

백관 또한 왕과 마찬가지로 제복, 조복, 공복, 상복의 네 가지 옷차림이 있었다. 『사기(史記)』에는 백관의 제복과 공복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조복과 상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초상화나 고려 불화에 나타난 인물상을 통해 조복과 공복의 착용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지금대>   
안동 태사묘 삼공신 유물로 복원된 것이다. 가죽띠 위에 여지문을 새긴 금속 장식판이 붙어 있다.

제복은 조선시대와 달리 면복류가 주류를 이룬다. 1141년(인종 18) 제도에 따르면 품계에 따라 1품복(一品服)은 칠류면오장(七旒冕五章), 2품복은 오류면삼장(五旒冕三章), 3품복은 무류면(無旒冕)이었다. 조복은 양관(梁冠)을 쓰고 대수포를 입고 손에 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고려 불화의 인물상에서도 양관을 착용 하고 단령을 입고 있는 백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백관이 조복을 착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몽주 초상>   
정몽주의 초상화로 백관의 상복을 볼 수 있다.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고 허리에 각대를 띠고 있다.

광종대의 공복 제도는 계급에 따라 자삼(紫衫), 단삼(丹衫), 비삼(緋衫), 녹삼(綠衫)의 네 가지 색으로 나누어 착용하였다. 의종대의 공복 제도는 복두, 복(服), 대(帶), 어대(魚袋), 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복색과 대, 어대, 홀의 재료로 상하 등위를 구별하였다. 복색은 계급에 따라 자색, 비색, 녹색, 검은색의 사색 공복을 이루며, 대는 장식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가죽띠인 황동제의 화려한 여지금대(荔枝金帶)8)도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어대는 금어대와 은어대가 있었으며, 비색의(緋色衣) 이상은 상홀(象笏)을, 녹색의(綠色衣)는 목홀(木笏)을 들어 등위를 구분하였다. 공복 착용 모습을 보여 주는 예로는 지장시왕도의 인물상을 들 수 있는데, 복두에 단령포를 착용하고 손에 홀을 들고 있다. 복두는 양각(兩脚)이 밑으로 처진 형으로 당나라 신하(臣下)의 복두와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이 밖의 다른 불화에서는 복두의 모양과 포의 색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초상화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 김문자
8)경북 안동 태사묘(太師廟)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태사묘의 일괄 유물 중의 하나이다. 본래의 가죽띠가 아니고 후일에 새로 제작된 가죽띠이다. 즉, 금동 장식판이 본래의 가죽띠에서 떨어지자 그것을 모아 두었다가 후일 새로 제작하여 옮겨 붙인 것이다(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태사묘 소장 유물 보존 및 복원을 위한 기초 연구』, 2001,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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