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을 내면서

통일신라의 불교, 불교 사상의 정립과 신앙의 보편화

7세기 중반에 문무왕은 통일 전쟁과 병행하여 행정의 제도화를 위한 제반 관료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적인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고기 이래 원광·자장 등의 섭론 사상과 보덕·낭지(朗智) 등의 일승 사상, 혜공(惠空)·대안(大安) 등의 반야공관 등 다양한 교학을 성숙시키며 굳 건한 토대를 마련해 온 신라 불교는 고구려와 백제의 성숙한 교학을 받아들여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수용한 새로운 신라 불교 철학을 정립하였다.

유식과 기신론 그리고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상적 추구는 상호 연관을 보이면서 깊은 교학적 이해를 보여 신라 불교 철학을 이룩하였다. 화회적 지향성을 추구하는 원측(圓測)의 유식 사상은 도증(道證)·태현(太賢)에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뚜렷한 흐름을 이루었고, 경흥(憬興) 등 다른 사상적 성향을 보이는 유식 사상가가 대거 등장하여 유식 사상은 7세기 후반 신라 불교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보살계 사상이 크게 중시되어 원효(元曉)와 의적(義寂)·태현 등은 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梵網經)』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7세기 중반에 국가 불교 활동을 주도하던 밀교 승려들은 중고기 이래 지속되어 온 밀교를 이어받아 이후 수용되는 후기 밀교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 불성론(佛性論)이 진전을 보여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이는 8세기 이후 전개된 불성을 자각하는 선종의 수용과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하는 후기 밀교의 수용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이들 새로운 사상 수용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 사상을 정립하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실천 원리를 모색하였으며 『화엄경소』에서 보법적(普法的) 세계관을 제시하는 정치한 사상 체계 수립으로 신라 불교 철학을 확립하였다. 의상(義相)이 선도한 화엄 사상은 일승(一乘)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주축으로 평등한 교단 운영을 실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틀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량 축적의 자신감은 신라에서 주요 교학을 집성한 『금강삼매경』이나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을 편찬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다양한 사상적 추구는 사상 자체의 역량 확대는 물론 다른 사상과의 연관이나 신앙 및 실천적 불교 활동과 연관지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계율 연구가 유식 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고, 유식 사상가는 여래장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점찰 신앙의 보급은 여래장 사상의 진전에도 기여하였다. 미타와 미륵이 병행하여 신앙되었고, 화엄 교단에서는 아미타 신앙이 성행하였으며 화엄과 밀교의 연계도 나타났다.

통일기 신라의 정치적·경제적 진전과 사상적 역량 제고에 따라 고양된 기층민의 의식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타 신앙과 관음 신앙이었다.

미타 신앙은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사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내세 신앙이다. 신라의 미타 신앙은 별다른 공덕을 쌓을 수 없었던 중고기의 일반민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여기에 기층민과 직접 어울리던 교화승의 활동이 더해져 점차 기반을 다져 나갔다. 현실에 미타정토를 구현하려는 신라의 미타 신앙 경향은 국민의 일체감과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약사 신앙은 주술을 이용한 치병 신앙으로 유행하여 많은 약사불상이 제작되었다. 약사 신앙은 질병, 기근 등의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생명까지 연장해 준다는 현세적 성격을 가졌다. 이는 사후의 정토를 기원하는 정토 신앙을 보완해 주는 것이었다.

관음 신앙은 국가의 안녕과 개인적 현세 이익을 보장받고자 하는 현실 구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한편으로 미타정토 왕생과 연결된 내세적 경향도 가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신앙의 하나였다. 현실 구제 중심의 관음 신앙은 불국토적 진신 신앙이나 변화 관음 등으로도 나타났다.

미륵 신앙은 교학의 성격 때문에 두드러진 신앙 사례를 보였다. 중고기의 미륵 신앙이 미래불로서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설법하여 구제한다는 미륵 에 대한 신앙이었던 데 비해, 중대의 미륵 신앙은 현재 미륵이 머무는 도솔정토에 상생하고자 하는 상생 신앙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지장 신앙은 석가가 입멸한 뒤 부처가 없는 말법 시대에 하늘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망자 구제 신앙이다. 그런데 진표(眞表)가 선도한 지장 신앙은 점찰계법의 계율을 지키는 실천행을 강조하는 신앙으로 지방의 서민들에게 깊숙이 전파되어 왕성한 모습을 이루었다.

미타 신앙은 미륵 신앙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고, 관음은 미타의 보조적 역할을 맡기도 하는 등 신앙 간의 연계 현상이 많았다. 이처럼 다양한 신앙 경향이 유지된 것이 신라 불교 신앙의 특색이다.

사상과 신앙이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전개된 신라 불교는 7세기 후반에 의례와 실천 신앙의 확보로 전 사회 계층이 공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의상이 창도한 7세기의 화엄종과 진표와 태현이 선도한 8세기의 법상종 같은 종단을 형성하였고, 일반인으로 신앙 대상을 확대하였으며 지방 사회에도 확산되었다.

7세기 후반에 형성되어 진전된 신라 불교 사상의 정화는 8세기 중반의 안정과 짝하여 우수한 문화 명품을 만들어 내는 발전기를 이룩하였다. 불국토의 전당 불국사(佛國寺)와 교리와 과학의 구상이 돋보이는 석불사(石佛寺)는 화엄 사상 외에 여러 사상이 복합적으로 이루어 낸 문화의 결정체였다.

8세기의 교학을 주도한 화엄학 연구는 의상의 사상을 직접 계승한 계통과 의상과 법장(法藏), 또는 원효 사상이나 기신론 사상과 융합 이해하려는 경향이 공존하였다. 유식학은 유식중도설의 입장에서 성상(性相))의 대립을 지양하고 회통한 태현의 유식 사상이 정립되었다. 중국의 신밀교가 정립되자 현초(玄超)와 의림(義林) 등이 이를 신라에 전수해 오고 여기에 혜초(慧超)의 활동이 더해져 관심이 고조되었다. 무상(無相)은 중국에서 선종 정중종(淨衆宗)을 형성하였고, 신행(神行)은 북종선(北宗禪)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신라 불교가 교학 위주의 한계를 반성하면서 찾아 나선 새로운 시도였다.

8세기에도 다양한 신앙 경향은 지속되었다. 미타 신앙은 사후 추선과 현세 왕생을 중심으로, 관음 신앙은 현실 구제적인 성격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미륵 신앙은 법상종에서 미타와 병행하여 신앙되었고, 진표가 선도한 지장 신앙은 지방의 서민들에게 전파되었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중앙에서 귀족의 분열이 심화되고 지방 세력이 크게 들고 일어나는 사회 변혁기가 되자, 그동안 신라 사회의 지도 이념이던 화엄과 유식 중심의 교종 불교는 새로운 진보적 이념으로 탈바꿈하지 못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선종에게 지도력을 잠식당하게 되었다.

경전의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에 비해 선종은 구경(究竟)의 목표로 이끌어 주는 방편인 문자를 넘어선 선(禪)의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 직접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 불교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불성을 곧바로 깨닫는다는 선의 주장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교종 체제를 부정하는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불교계의 근본적인 개혁 요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새로운 남종선(南宗禪)을 전해 와서 신라에서 독자의 산문(山門)을 개창한 대표적인 예가 9산 선문(九山禪門)이다.

선종은 9세기 전반부터 도의(道義)를 비롯한 도당 승려들의 귀국으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도의는 교종의 반발로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으나, 이보다 조금 늦은 홍척(洪陟)은 흥덕왕의 귀의를 받았다. 9산 선문의 개조를 비롯한 선승들은 대체로 호족 출신이 많았다. 그리하여 9산 선문은 대부분 지방 세력인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산문을 개창하였다.

신라 통일기 이후 불교는 대중화되면서 지방 사회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 산물이 지방의 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앙 공동체인 향도(香徒)이다. 향도는 초기에는 경주의 왕실이나 귀족이 중심이 되어 각 종파별로 중심 사원의 통제와 지도 속에 운영되었지만 차츰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는 방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신라 말 이후 고려시대에는 더욱 독립적 성격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필자] 정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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