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을 내면서

고려시대의 불교, 국가 불교와 불교의 사회화

고려 불교는 새로운 사상으로 확립된 선종과 내용을 정비한 교학이 서로 대립하는 추세 속에서도 상호 조화를 모색하며 전개되었다. 고려 불교는 불교 조직과 제도를 운영하며 국가 불교의 틀을 유지해 갔고,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교단 운영과 불교 사상 및 신앙의 확대를 추구하였다.

초기에 중앙 집권적 개편에 따라 불교도 9산을 통합하고 교종과 병행하는 개편이 추진되었다. 태조는 국가 운영의 지침으로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광종은 교종과 선문으로 분산된 불교 교단의 정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승과(僧科)를 시행하여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고 승단을 관리하는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다. 또한, 선교일치의 경향을 띠고 있던 법안종(法眼宗)의 수용에 노력하고 균여(均如)를 지원하여 화엄 종단을 통합하게 하는 한편, 천태 사상의 활성화도 지원하였다.

성종대에는 유학이 고려 사회의 운영 이념이 되어 종교와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는 불교와 양립하게 되었다. 왕실과 귀족의 토지 기부로 사원의 경제력은 비대해졌으며, 귀족 자제의 출가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러한 귀족 불교적 면모는 기층민의 신앙적 욕구를 멀리한 채 전개되었다.

왕실과 귀족의 원당(願堂)이 늘어 가고 사원은 경제적 토대가 더욱 확대되어 승려의 활동과 불사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졌다. 사원전(寺院田) 외에 사원보(寺院寶)의 운영과 상업, 수공업 등의 경제 활동으로 사원의 경제력은 더욱 커갔다.

고려시대에는 80여 종에 1,000회가 넘는 각종 불교 행사가 열렸다. 국가 에서 개설한 불교 행사는 전란이나 재앙 퇴치 및 국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축제적인 성격도 함께 지녀 국민의 일체감 조성에 기여하였다. 이에 비해 지방 사회의 향리층이나 일반민은 독자적인 신앙 공동체인 향도를 결성하여 불상 등의 조성 시주에 참여하여 정토 신앙을 유지하였다.

고려 불교는 인쇄 분야에서 뛰어난 유산을 남겼다. 초기부터 불경의 인쇄 보급에 노력하였던 고려 불교는 11세기 전반에 고려 대장경을 이룩하였는데, 당시 한역(漢譯) 대장경 중 가장 규모가 큰 6,000여 권으로 수록 범위가 가장 포괄적이면서 정교한 조판술에 정밀한 교정 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어 의천(義天)은 동아시아 불교학 전반을 총 집대성한 1,010종 4,740권 분량의 교장(敎藏)을 편찬하였다.

11세기에 문벌 귀족 사회의 진전에 따라 불교의 귀족적 성격도 강화되어 화엄종과 법상종 등 교단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의천은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고 교종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선종은 천태종을 새로 개창하여 교단을 개편하고자 하였다. 원효 사상을 계승하고 송나라의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계의 반성을 촉구한 그의 개혁은 문벌 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그의 사후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선 사상이 부흥되어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 고조로 거사선(居士禪)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기층민과 유리된 귀족 불교는 붕괴되고 대신 결사(結社)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知訥)은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 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사상을 조직하고 깨달음과 꾸준한 실천을 강조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적 바탕 위에서 지눌은 지방민과 함께 수선사(修禪社) 결사를 이끌었다. 지눌과 그의 계승자 혜심(慧諶)은 선 사상을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여 발전시키고, 민중의 정토 신앙을 수용하여 지방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수선사 결사는 이후 지속적으로 계승되며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추를 이루었다.

요세(了世)는 참회 수행의 실천행과 미타정토를 강조하고 이론적 근거를 천태 사상에서 찾는 백련사(白蓮社) 결사를 이끌어 지방 지식인과 기층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방 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에 투신하여 지방의 지식인과 연계되어 추진한 결사 운동은 새로운 지성을 열었지만, 계승 과정에서 중앙 권력과 연결되면서 결사의 본래 취지가 퇴색하였다.

13세기 후반 이후 대내외적으로 대몽 항쟁기를 거치고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원 간섭기로 접어들자 불교계는 신앙 결사를 계승하는 비판적인 경향이 유지되면서도 정치적 현실과 타협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좀 더 두드러졌다. 그런 중에 13세기 말부터 몽산(蒙山)의 간화선(看話禪)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14세기 중반 이후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었다.

원 간섭기에는 일연(一然)을 비롯한 가지산문(迦智山門)이 부각되어 보수 세력의 지원 아래 세력을 확장하였고, 고려 말에는 태고(太古)와 나옹(懶翁) 등이 출현하여 불교계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한편, 무기(無寄)는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하며 보수적인 경향을 비판하였으나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상적 계승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권문세가와 연계되어 거대한 장원을 소유한 사원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내적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현상적인 교단 개편 노력이나 원나라 선종의 도입 등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불교계의 사회 경제적 현실은 신진 성리학자들의 주된 개혁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불교의 현실적 기능을 긍정한 억불론(抑佛論)이 위주였으나 후반에는 적극적인 불교 비판을 주장한 척불론(斥佛論)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불교 교단은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고려 사회와 함께 붕괴되었다.

[필자] 정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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