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1. 불교 사상의 발달

계율학

계율이란 수행자 개인이 선행을 하겠다는 자율적 의지인 계(戒)와 교단 통제를 위한 승가 규범인 타율적 율(律)을 합쳐 말한 것이다. 불도를 배우는 이가 반드시 닦아야 할 삼학(三學), 곧 잘못된 것을 그치고 잘못되지 않게 하는 계율(戒), 산란한 마음을 막고 안정을 얻는 선정(定), 진리를 깨닫기 위해 이치를 관하는 것(慧) 중의 하나인 계율은 초기 불교 이래 크게 중시되어 승려와 불교도의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며 변화해 왔다. 신라에서는 삼국기에 사분율(四分律)에 대한 저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자장을 비롯한 율사들은 불교 수용 이후 교단 체제 형성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던 계율을 중심으로 신라 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중대 신라에 들어서면 계율에 대한 관심이 원효를 계기로 사분율 위주에서 범망계(梵網戒) 중심으로 바뀌고, 계율 연구도 율사가 아니라 유식 학승이 주도하였다.133)

원효는 『범망경』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통해 보살계를 신라 사회에 수용 정착시켰다. 『범망경보살계본사기』에서 원효는 특정 경론에 의거하지 않고 『범망경』을 주석하여, 이미 유행하던 소승계와 새로이 수용된 범망계와의 관계를 해명하였다. 그리고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는 범망계를 중심으로 현장이 새롭게 주목한 유가계와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원효는 중죄의 규정을 완화하고 계를 범하게 된 동기를 중시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면서 수행자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원효는 중생의 이익을 위한 자비살생(慈悲殺生)은 도리어 복을 짓는 것이라고 하여 이타행과 중생 제도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무애행(無碍行) 및 중생 제도 활동과 연관을 갖는 새로운 포괄적 계율관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승장(勝莊)은 『범망경술기』를 지어 유가계를 기준으로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의도를 보여 원효와는 다르게 이해하였다. 의 적(義寂)의 『보살계본소』와 태현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역시 승장과 같이 유가계의 입장에서 유가계를 바탕으로 범망계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유가계에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본 것 등은 승장과 다르다. 의적은 재가 신자(在家信者)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였는데, 이는 통일 이후 증가한 서민 신자의 성장을 반영한다. 동시에 의적은 노비와 주인은 지위가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신분의 구별을 엄격히 하기도 하여 신라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반영한 면도 보인다. 태현은 현실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지만, 왕권 수용을 인정하고 효은(孝恩)을 강조하였다.

계율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원효를 비롯한 계율 논사들은 중생에게 큰 이익을 가져오게 하는 자비살생은 오히려 복을 짓는 일이라는 살생관을 보였으며,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는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의 경우에도 드러난 결과보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중시하여 평가하였다. 보살계 이외에도 원효나 도륜·경흥·혜경 등은 사분율 관계의 저술을 남겼다.

이처럼 신라에서 크게 중시된 보살계 사상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으로 지배자의 전횡을 삼가게 하고 선정을 유도하는 일면도 가질 수 있었고, 평등 사상을 통하여 서민에게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은 효행을 강조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므로 이의 유행은 유교와 불교 간의 갈등을 완화해 주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134)

[필자] 정병삼
133)최원식, 『신라 보살계(菩薩戒) 사상사 연구』, 민족사, 1999, 246쪽 및 251쪽.
134)최원식, 앞의 책, 249∼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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