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2. 신앙의 실천과 불교 대중화

미륵 신앙

미륵 신앙에는 먼 훗날 이 땅이 거의 낙토가 되어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설법하여 구제할 때 참가하기를 희구하는 하생(下生) 신앙과 현재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는 미륵을 믿어 그의 정토인 도솔천에 낳기를 바라는 상생(上生) 신앙의 두 가지가 있다.

유식 사상을 확립한 무착이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아 『유가사지론』 등을 이루어 냈다고 하여, 유식학파나 법상종에서는 미륵 신앙을 중심 신앙으로 삼아 왔다. 이는 신라 법상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미륵 신앙은 법상종에서 두드러진 신앙 사례를 보였다. 중고기의 미륵 신앙이 미래불로서의 미륵에 대한 신앙이었던 데 비해 중대의 미륵 신앙은 도솔정토에 상생하고자 하는 상생 신앙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미륵정토도>   
도솔천에 있던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내려와 미륵불이 되어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경전의 내용을 그린 고려 후기 불화이다. 아랫부분에 밭갈이하고 추수하는 생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상생 신앙은 미륵의 상호(相好)를 만들거나 명호(名號)를 부르거나 오계 등의 계율을 지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비록 번뇌는 완전히 끊지 못해 해탈에 이르지는 못해도 미륵을 부르면 도솔천에 상생할 수 있으며, 계를 범하거나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미륵에게 참회하면 청정해질 수 있다고 한다. 미타 신앙에 비해 자력적인 미륵 상생 신앙은 수행할 능력이 있는 승려라든가 귀족 등에게 환영받았고, 그렇지 못한 일반민은 미타 신앙을 믿는 추세였다. 법상종 사원에서는 미륵과 미타 두 신앙을 함께 수용하여, 미륵은 금당에 주존으로 봉안하고 강당에 미타를 봉안하였다.

미륵 계통의 경전에 대해 원측·원효·경흥·의 적·태현 등이 주석서를 썼고, 중대 미륵 신앙은 이들 미륵 정토 교학에 바탕한 실천 수행이 주를 이루었다. 신문왕대에 국로로 활동한 경흥은 원효의 미타정토 우월론에 대해 미륵정토도 그에 못지않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륵이 하생하여 구제하는 대상을 대소승 제자로 확대 해석하여 미륵 신앙의 대상을 넓혔다.

태현은 남산 용장사에 머무르며 항상 미륵장륙상을 돌며 예배하였다. 경덕왕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왕과 신민의 신분 질서를 강조한 충담(忠談)은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였다. 이들은 도솔정토의 미륵 신앙을 말해 준다.

<용장사곡 석불 좌상 및 대좌>   
불상의 머리 부분은 없어지고 손과 몸체 일부만 남았는데, 원형 대좌가 인상적이다. 법상종의 조사인 태현이 용장사에 머물며 예배를 드리면 불상이 따라서 돌았다는 설화가 얽혀 있어 8세기 중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김지성이 조성한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사망자가 중심을 이루는 아미타상과는 대조적으로 생존 공양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미륵 신앙이 현세적인 것으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월산에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수도자가 있었는데 709년(성덕왕 8)에 현신 성도하여 경덕왕 때 남사를 창건하고 미륵과 미타상을 조성하였다. 경덕왕 때 월명(月明)은 죽은 누이를 위해 향가를 지어 미타정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였는데, 해가 둘로 나타나자 도솔가를 지어 도솔천의 미륵보살에게 기원하여 이변을 해결하였다.

김지성,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월명의 신앙은 모두 미륵과 미타가 연관된 신앙 내용을 보여 주며 시기적으로 경덕왕 때에 집중된 것이 특이하다. 이를 통해 중대 법상종계 미륵 상생 신앙이 미타 신앙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9) 백월산 남사의 관음은 수도자가 성도하고 미륵정토로 왕생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미륵 상생 신앙과 관음 신앙이 연결된 모습이다.

한편, 진표는 『점찰경』에 바탕을 두고 말법 중생이 여러 장애에 부딪혀 결정적인 믿음을 얻지 못하고 수행에 전념하지 못할 때, 과거의 좋고 나쁨과 현재의 즐겁고 괴로움 등을 살펴 마음을 깨우치고 의심나는 것을 해결할 수 있게 한다는 점찰 신앙을 이끌었다. 이는 미륵 상생 신앙과 지장 신앙(地藏信仰)이 연결된 것이었다. 말법 시대에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은 부처가 없는 시대에 석가와 미륵을 이어 준다고 하여 미륵을 중시하는 법상종에 수용될 수 있었다. 진표는 이 지장보살의 교화를 받는 방법으로 점찰계행에 의한 참회법을 내세우고, 이것이 도솔천에 왕생하는 지름길이라고 여겨 점찰 신앙을 선도하였다.140)

경덕왕대에 집중적으로 보이는 미륵 상생 신앙은 강력한 중대 왕권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였다. 그러나 진표가 주도하던 미륵 상생 신앙은 점찰법을 근간으로 지방 사회에서 기반을 넓혀 고려에까지 이어졌다.

[필자] 정병삼
139)김혜완, 「신라 중대의 미륵(彌勒) 신앙」, 『계촌(溪村) 민병하(閔丙河) 교수 정년 기념 사학 논총』, 논총 간행 위원회, 1988, 37∼38쪽.
140)정병삼, 「불교 철학의 확립」,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98, 410∼411쪽.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