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국가 불교 의례의 성립과 변화

고려에서는 다양한 성격의 불교 의례가 국가 의례로 설행되었다. 국가 의례에 나타나는 불교적 요소는 고려의 국가 운영에 있어서 불교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지방 사회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조직의 존재를 통해 지방 공동체 운영에서 불교의 역할이 확인되기도 한다.

고려의 국가 불교 의례는 성격도 다양하지만, 시기에 따라 설행되는 의례에도 차이가 있었고, 동일한 의례라 하더라도 시기에 따라 목적이 달랐다. 국가적으로 설행된 불교 의례의 다양한 성격은 불교 신앙의 내용이 풍부해졌다는 점과 함께 불교가 고려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국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거나 관정 도량(灌頂道場)을 개설하던 모습은 고려시대 국가 운영과 국왕의 권위 부여에 불교 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대규모의 불교 행사를 설행하였으며, 멸망할 때까지 정기적·비정기적 불교 행사가 수시로 개최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의 기록만으로도 불교 행사의 횟수는 유교나 도교 의례보다 월등히 많아 국가 의례에서 불교 의례가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는 『화엄경』이나 『금광명경(金光明經)』 같은 불교 경전이나 제석, 용왕, 인왕 같은 신중(神衆)에 대한 도량이나 법석이 개설됨은 물론, 성변(星變)을 물리치거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위한 의례와 진병(鎭兵)이나 호국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도량과 법석이 설행되었다. 또한, 관정이나 보살수계(菩薩受戒)는 왕의 즉위 의례와 관련되며, 기일(忌日)·백일(百日)·소상(小祥)·대상(大祥)은 상제(喪制)에 개설되는 의례였다. 그 밖에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우란분재(盂蘭盆齋)와 같은 국가적 혹은 민속적인 의례나 경찬(經讚)·낙성(落成) 등 일반 행사에도 불교 의례가 설행되었다.

고려시대 국가 불교 의례는 설행 시기에 따라 정기적인 행사와 비정기적인 행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정기적인 행사로는 연등회, 팔관회, 장경 도량, 보살계 도량, 인왕백고좌 도량, 담선 법회, 불탄일 행사, 축수 도량, 기신 도량(휘신 도량), 우란분재, 제야 도량 등이 있다.204)

이들 의례는 사찰에서 개설되기도 하였지만, 궁궐 내의 불당(佛堂)이나 정전(正殿)에서 설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각 왕의 원찰이 설립되어 불사가 설행되었는데, 봉은사(奉恩寺)는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 개창된 이래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절이었다.

고려 불교가 갖는 국교로서의 위상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새 국가의 운영과 왕실의 안정에 불교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줄 것을 기대하고 이를 정책화하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이는 고려 문화의 성격을 결정짓기도 했던 것으로 태조는 국가의 대업(大業)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산천(山川)의 음덕에 의한 것이라 인식할 정도로 불교를 중시하였다. 고려 국가 체제의 기반을 수립한 광종은 중앙 집권 체제 수립의 일환으로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무차 대회(無遮大會)와 공덕 불사(功德佛事)를 빈번히 설행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유교에 입각하여 정치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불교는 정치와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권을 높이고 국민을 통합하는 데 불교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기능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고려는 국초부터 중요한 국가 행사로서 불교 의례를 설행하였다. 의례는 집단적으로 설행되는 것으로 대민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과정을 통해 민심을 규합하고 사회 통합을 이룰 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백성에게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성종대에는 불교와 유교의 기능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현실 정치는 유교에 토대를 두어야 하며 불교의 공덕 신앙과 불교계의 폐단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유학자의 주장이 힘을 얻어 팔관회·연등회를 비롯한 국가적인 불교 행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된 적도 있었으나, 성종 사후에 곧바로 이전대로 복구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개최되는 불교 행사의 주된 내용은 변화하기도 하였으나 왕조가 존속하는 기간 내내 정기적·비정기적 불교 행사가 수시로 개최되었다. 고려 건국부터 경종대까지는 고려 불교의 틀이 잡히는 때였으며, 동시에 연등회·팔관회를 위시한 중요한 국가 불교 의례가 성립되고 자리를 잡아 나가는 시기였다.

현종대 이후에는 정치 전반에 미치는 불교의 영향력이 차차 증대되고, 신앙 행위도 적극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국가 불교 의례가 성행하여 국가적 불교 행사의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현종대에는 『인왕경(仁王經)』을 궁궐에서 강경하는 인왕 도량이 국가 행사로 정례화되었다.205)

『인왕경』은 『금광명경』과 더불어 호국적 성격이 짙은 불교 경전으로 널리 신앙되어 왔다. 현종대 『인왕경』 신앙이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국란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인왕경』 강경 행사는 백좌인왕경 도량으로 이름이 바뀌어 정기적인 행사로 정착되었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대규모의 반승(飯僧) 행사도 함께 설행되었다. 『인왕경』과 관련된 행사는 현종대 이후 정기적으로 9월이나 10월에 궁궐에서 반승을 수반하여 열리는 대규모의 백고좌인왕 도량과 특정 목적을 가지고 수시로 개설된 인왕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대규모의 백고좌인왕 도량은 전혀 개설되지 못하였으며, 비정기적인 인왕 도량도 목적이 진호국가(鎭護國家)에서 소재 도량(消災道場)으로 변하였다. 국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성대하게 열리는 기수 도량(祝壽道場)도 현종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덕종대 설행된 국가 불교 의례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휘신 도량(諱辰道場)의 설행과 국왕이 보살계를 받는 의례의 설행을 들 수 있다. 휘신 도량은 선왕(先王)과 선비(先妣)의 기재(忌齋)를 진전 사원에서 지내면서 이름을 바꾸어 부른 것이라 한다. 국왕의 수계(受戒) 행사는 국왕이 보살계를 받아 스스로 불제자(佛弟子)임을 다짐하고 이를 널리 선언하는 의식으로 고려 국왕은 대부분 보살계를 받았다. 이 행사는 대개 6월에 정기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왕에 따라서는 수차례 보살계를 받기도 하였다.

정종대에는 『인왕경』을 받들고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경행(經行) 행사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왕명으로 구정(毬庭)에서 행향(行香)한 뒤 『인왕경』을 색색(色色)으로 칠한 가마에 얹고 세 패로 나누어 시내를 돌았는데, 그 뒤를 승려가 독송하며 걸어갔고, 다시 관원(官員)이 공복(公服)을 입고 행렬을 이루며 국민의 복(福)을 빌었다. 이후에 이 행사는 연례적으로 설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민간에서도 널리 설행되었다.206) 정종대에는 『인왕경』에 버금가는 호국 경전인 『금광명경』에 대한 신앙 행사도 시작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불교 행사는 문종대를 거치면서 더욱더 다양화되어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다라니를 외며 복을 비는 소재 도량을 비롯하여 제석천(天帝釋) 도량, 마리지천(摩利支天) 도량, 문두루(文豆婁) 도량 등 밀교 도량도 개설되었다. 이전에는 복을 빌거나 전쟁·가뭄 등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기원 행사도 대승 경전과 호국 경전의 신앙에 의거하여 행하였다면 이 시기부터는 순수 밀교 경전에 의거한 밀교 의례도 함께 설행되면서 국가 불교 의례는 내용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의례로서의 체제도 갖추어 갔다. 특히, 밀교 의례가 성행한 것은 당시의 왕권 강화 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며, 여진이나 거란의 압박이나 침략으로 인한 호국 경전 신앙 행사가 많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마리지천도>   
고려시대에 마리지천 도량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자주 개설되었다. 이 불화는 14세기 그림으로 『마리지천경』에 묘사된 마리지천의 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여 고려시대 신앙된 마리지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몽 항쟁기 국가 불교 의례의 특징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각종 진병 의식(鎭兵儀式)이 주로 설행되었다는 점과 연등회나 팔관회처럼 왕권을 과시하는 행사는 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무신 정권의 성립은 정치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준 일대 사건이었지만 전통적인 종교관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아니어서 국가에서 개설하는 불교 행사는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최충헌(崔忠獻)이 집권한 신종·희종·강종대에는 불교 행사를 설행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고종대에 와서는 전처럼 다시 회복되었다. 이 시기 불교 행사의 특징은 소재기복(消災祈福) 행사의 비중이 늘고, 교화·경축·천도·국왕 수계 등의 행사 비중은 줄었다는 점으로, 당시 권력의 향배를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몽고와의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국가 불교 의례의 설행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는 어느 때보다도 호국을 위한 국가 불교 의례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강화 천도기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고려는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면서 봉은사를 비롯하여 개경에 있던 중요 사찰을 강화도에 다시 세웠다. 전쟁 중에 급히 천도한 까닭에 한꺼번에 사찰들을 세우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건립하였다. 이때 세운 절을 보면, 연등회와 팔관회에 반드시 필요한 봉은사와 법왕사를 필두로 문두루 도량이 지속적으로 설행된 현성사(賢聖寺), 마리지천 도량이 설행되는 묘통사(妙通寺)가 적극적으로 중건되었다. 이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중시하였던 도량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대장경 조판은 불력으로 외적의 격퇴를 기원하는 호국적 발원으로 이루어진 불교 신앙의 상징이었다. 대장경 조판 외에도 국왕의 사원 행향 및 각종 불교 행사 설행을 통하여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기원하며 온 국력을 기울였으나 마침내 군사적 대응이 한계에 이르렀다. 1257년(고종 44) “계책이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 다만 불우(佛宇)와 신사(神祠)에 기도할 따름이다.”207)라는 기록은 당시의 절박함과 함께 현실적 대응의 한계를 불교 신앙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음을 잘 반영한다. 강화 천도 후에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례인 팔관회와 연등회는 대체로 설행되었으나 기타 축수 도량이나 추모·천도 행사 등은 거의 열리지 못하였고, 인왕 도량, 소재 도량, 마리지천 도량, 문두루 도량 등 진호국가 행사와 소재기복 행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화엄신중(華嚴神衆) 도량, 천병신중(天兵神衆) 도량, 화엄천병신중 도량 같은 신중 도량이 강화 천도기에 집중적으로 설행되었는데, 이것은 위기 상황에 화엄신중의 옹호를 간절히 열망하는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화엄신중은 불국토 옹호의 기능을 가진 신중으로 이들을 위하고 섬김으로써 국토의 고난을 면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원나라와 강화를 맺은 후 고려 조정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소위 ‘원 간섭기’가 시작되었다. 원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 시기의 고려 불교는 중국 불교의 직접 도입 및 원나라를 통한 티베트 불교(西藏佛敎)의 도입으로 변화가 활발하였다.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을 중심으로 양국의 지배층이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고려에서 활동하던 소수의 몽고인을 중심으로 서장 불교가 신앙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 활동 하던 고려인이 많았던 만큼 적어도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지배층은 서장 불교와 접촉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도입이 고려의 불교 신앙에 있어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금동 탑형 사리기 일괄>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사리기 또는 사리 장엄구라고 한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 장엄구는 14세기를 전후하여 새롭게 등장하는데,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한 라마탑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원래 개성 경천사지에 있던 탑이다. 초층(初層) 탑신부에 1348년 건립되었음을 알려 주는 명문이 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공장(工匠)들을 보내어 세운 것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다만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의 사찰을 자신들의 원찰로 중창할 때 중창 공사를 감독할 관리와 공사에 참여할 장인을 파견하고, 불사에 사용될 불구(佛具) 등을 보내곤 하였는데, 이러한 경로를 통해 원나라의 불교 미술품이 들어와 고려 불교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208)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사리기와 사리탑 등이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209) 개성 부근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직접적인 예이다. 게다가 서장 승려가 왕실을 중심으로 고려 내에서 활동하였던 기록으로 보아 불교 신앙의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교 신앙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새로운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서장 불교의 영향이 아니라 이 시기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성립된 특수한 관계, 무신 집권의 경험, 오랫동안 겪은 전쟁 경험 등의 정치 환경 변화였다.

고려에서는 원나라 황실을 위한 불교 행사를 자주 열었으며, 공덕 사상에 의한 불사가 매우 성행하였다. 원나라 황실을 위한 불교 행사는 고려 내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원나라 황실의 후원을 받아 개최되는 경우도 많았다.

원 간섭기에 불교 행사의 설행 횟수와 규모는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전경(轉經)이나 사 경 등과 같은 공덕 불사와 원나라 황제를 위한 축수재(祝壽齋)가 주로 유행하였고, 화엄 도량과 같은 대승 경전 신앙에 의한 교화 행사는 거의 열리지 못하였다. 인왕 도량이나 금광명경 도량과 같은 진호국가 행사는 크게 감소되었고, 밀교 행사도 소재 도량, 관정 도량, 공덕천 도량 정도만이 개설되었다. 또한, 팔관회는 전혀 설행되지 못하였으며, 연등회도 상원연등회보다는 불탄일 연등회가 더 큰 행사가 되어 갔다. 고려에서 원 간섭기 이전에 국가적으로 중시하였던 불교 의례가 크게 위축된 것이다. 대신 수륙재(水陸齋)가 본격적으로 설행되었으며 용화회(龍華會)도 설행되었다.

<윤장대(輪藏臺)>   
경북 예천 용문사(龍門寺) 대장전(大藏殿)에 있는 것으로 1190년(명종 20)에 만든 것으로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윤장대는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는 구조인데, 돌림으로써 경전을 읽는 효과를 낸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전경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원 간섭기에 설행된 장경 도량에서의 전경, 사경은 국가적 차원이 아닌 국왕 또는 왕실 차원의 공덕 행사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전경이 유행한 것은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 전경은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경(讀經)과는 달리 경전의 초중종(初中終)의 몇 줄만 가려 읽는 의식이다. 라마교도는 전경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속제 원통(圓筒)의 면(面)에 경문을 새겨 그것을 돌려 가며 읽었다고 하는데 당시에 고려에서 행한 전경 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공양 행사인 반승도 국왕 또는 왕실 차원의 공덕 행사가 되었다. 원 간섭기에 이따금 실행된 반승은 설행 횟수와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인왕 도량 등을 개설하면서 열린 대규모의 반승은 자취를 감추고 국왕 개인이나 왕실 불교 신앙 차원에서 수백 명 혹은 천여 명의 소규모로, 그것도 전국적이 아니라 궁궐이나 특정 사원에서만 행하였다. 이러한 반승 행사의 위축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대규모 국가적 호국 행사였던 인왕 도량이 종전처럼 열리지 못하였던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대 이후 고려 말까지 불교계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한 세력에게 비판받으면서 존립 기반이 서서히 좁아진다. 그리하여 원 간섭기 이후 근근이 유지되어 오던 국가 불교도 토대를 잃을 위기에 빠졌고, 자연히 국가 불교 행사의 설행도 쇠퇴하여 고려 전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나 횟수가 줄어들었다. 몇 차례 열렸던 불교 행사도 국가적 문제에 대응한 공적인 행사라기보다는 왕실 차원의 사적인 성격이 더 컸다. 그러나 국가 불교 행사의 설행 횟수와 규모는 현격히 줄고 성격도 국가 차원에서 왕실 차원으로 변하였지만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명맥은 유지하였다.

[필자] 강호선
204)안지원, 『고려의 국가 불교 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8∼9쪽
205)김형우, 『고려시대 국가적 불교 행사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48쪽.
206)김형우, 앞의 글, 51쪽.
207)『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 44년 7월 무자.
208)강호선, 「14세기 전반기 여원(麗元) 불교 교류와 임제종」,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20쪽.
209)윤용이, 「공예」,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451∼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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