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향도와 지방의 불교 신앙

매향(埋香)은 마을 사람들이 향나무를 베고 날라다 묻는 의식을 함께 치름으로써 공동체의 단결을 다지고 공동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매향 의식은 강원도 고성, 경상남도 사천, 전라남도 해남·영암·장흥, 충청남도 당진 등 바닷가 지방을 중심으로 설행되었는데, 향도(香徒)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도하였다.215)

향도는 통일신라 무렵 등장하였는데, 국가의 지방 행정 기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불교를 매개로 자발적으로 꾸려진 지역 공동체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점차 중앙 집권화하는 과정에서 향도 역시 지방 행정 구역 단위로 조직되어 나갔다.

향도와 관련되어 가장 유명한 불교 의식은 매향이다. 매향은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沈香)을 만드는 것이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좀 더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게 되는데 이런 침향의 향을 불교에서는 으뜸가는 향으로 치고 있다. 매향 의식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한 신앙 형태인데 향을 묻는 것을 매개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즉, 땅속에 향나무를 묻었다가 오랜 기간 이 지난 후 그 향나무에서 나오는 향연(香煙)을 매개로 하여 미륵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매향 공덕이 도솔천의 미륵불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갯벌 깊이 구덩이를 만들고 구덩이마다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적은 향나무를 넣었다.

<사천 매향비 탁본>   
경남 사천에서 있는 매향비이다. 사천 매향비는 1387년(우왕 13)에 세운 것이다.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빌며 세운 비석으로 매향의 목적과 시기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어 주목되는 자료이다.
<사천 매향비>   

미륵 신앙과 관련이 있는 매향 의식은 고려 전기에도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1002년(목종 5) 도속향도(道俗香徒) 300여 명이 팔흠도(八歆島)에서 매향을 한 것은 고려 전기에 확인되는 유일한 매향 사례이면서 한편으로는 고려 전기 사례 중에서 가장 많은 향도가 참여한 경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향과 관련된 향도의 활동 대부분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집중되어 있다. 향도는 고려시대 내내 활동하였지만, 매향 활동에 있어서만큼은 이 시기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고려 후기 이후의 내우외환이 가중되는 가운데 기존 향촌 질서가 변화하는 한편,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연해지(沿海地) 개간으로 자연촌이 성장하고 신생 촌락이 형성되면서 그에 대응할 향촌 공동체 질서가 필요하였다. 특히, 연해지는 개간이 진행되면서 농장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인구 유동이 심하게 일어났으며, 게다가 외적의 침입까지 잇따르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지역 주민은 다른 지역 주민보다도 안주(安住)에 대한 바람이 강하였고, 촌락의 결속을 강화시킬 필요도 있었다. 사회 변동기에 연해 지역 백성은 각자 자기가 사는 인접 지역에서 매향을 하면서 미륵의 구원과 용화 세계(龍華世界)의 도래를 기원하고 향촌 공동체 나아가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매향 활동은 향도가 주도하였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지방관이 주도한 형태, 현지 방어를 맡은 수군 지휘관과 유향품관(留鄕品官)이 주도한 형태, 향촌 결계(結契)와 향도가 주도한 형태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지방에서 이루어진 많은 불사가 향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려 전역에서 향도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향도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981년(경종 6) 도속향도 20여 명이 오늘날의 경기도 이천 지역에서 마애 반가상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216) 1010년(현종 원년)에 시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한 경상북도 예천의 개심사(開心寺) 5층 석탑처럼 향도는 불상·범종·석탑 등 종교 기념물을 함께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마을 공동 작업을 함께하기도 하였다.217)

<개심사지 5층 석탑>   
경북 예천에 있는 탑으로 1010년에 지역의 향도들이 세웠음을 알려 주는 명문이 상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에는 십이지신상, 상층 기단에는 팔부중, 초층 탑신에는 인왕과 자물쇠를 조각하였다.

고려 귀족 문화가 난숙하는 12세기 무렵이 되면 국가 질서와 일정하게 연계되어 있던 기존의 향도와는 성격이 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1131년(인종 9) 음양회의소(陰陽會議所)는 승속잡류가 모여 떼를 이루어 만불향도(萬佛香徒)라 이름 붙이고는 염불독경(念佛讀經)을 하며 맹랑하고 이상한 짓을 하고 내외 사사(寺社)의 승도(僧徒)가 술을 팔고 파를 팔며 병기(兵器)를 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고 날뛰면서 유희를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니 이를 금하게 해 달라 청하였고, 인종은 이를 받아들여 만불향도를 금지하였다.218) 국가에서 바라보기에 향도가 이전과는 달리 국가 질서를 저해하는 행위를 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한편, 12세기 이후에는 구성원, 활동 내용, 규모 등 향도의 성격도 다양화되었다. 불상이나 석탑 조성을 주로 하던 것에서 염불·재회(齋會)·소향(燒香)·회음(會飮)·상장례 때의 부조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중창 불사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인다.219) 1311년(충선왕 3) 약 사암(藥師菴)에 소종(小鐘)을 조성한 사례,220) 1323년(충숙왕 10) 조성된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화기(畵記)에 양주(楊州) 지역의 향도가 참여한 사례,221) 1342년(충숙왕 후 3) 송림사(松林寺)의 향완(香琓)을 향도가 조성한 사례222)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전과는 달리 소규모로 구성되는 향도가 늘어났으며, 구성원도 다양화되었다. 그리하여 1339년(충숙왕 후 8) 성중의 부녀들이 향도를 결성하여 재를 설하고 점등(點燈)을 하며 무리 지어 산사로 다니면서 승인들과 사통한다 하여 이것을 금하였던 것으로 보아223) 여성만으로 구성된 향도가 있었고, 염제신(廉悌臣)의 경우처럼 개경의 고관만으로 이루어진 향도도 있었으며, 1342년(충혜왕 후 3) 왕의 신효사(神孝寺) 행차를 수행한 등촉배(燈燭輩)가 결성한 향도224) 등이 있었다.

<관경십육관변상도 부분>   
1323년에 그린 관경십육관변상도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화기(畵記)를 통하여 양주의 향도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향도의 활동은 점차 불교 신앙 공동체로서의 색채가 옅어지는 대신 계회(契會)의 성격을 띠면서 친목을 위한 연회나 상장례 때의 부조 행위를 주로 하는 향촌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향도에 의한 불교 행사는 지역 공동체의 자발적인 신앙 행위였고, 그 밖에 지방에서 열렸던 불교 행사로는 윤경회(輪經會), 경행(經行), 전경회(轉 經會)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중앙에서 설행하는 행사이기도 하면서 각 지방에서도 치르는 행사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1047년(문종 원년) 기사는 당시 지방에서 설행하던 윤경회나 경행 등의 행사의 일면을 보여 준다.225) 당시 주부군현(州府郡縣)에서 전경회를 해마다 성대하게 열고 있었는데 이 행사에는 갖가지 놀이와 잔치가 이어졌다. 그런데 지방 향리가 이를 빙자하여 금품을 과중하게 거두고 민력을 피폐하게 할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는 복(福)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후 취포오락(醉飽娛樂)을 금지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중앙의 장경 도량과는 규모나 성격에서 좀 차이가 있었지만 각 지방에서도 대장경을 받들어 고양하는 윤경회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046년(정종 12) 시중(侍中) 최제안(崔齊顔)에게 명하여 구정에서 설행한 경행은 고려시대 설행된 경행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최제안은 구정에서 분향하고 가구경행(街衢經行)을 배송(拜送)하게 하였다고 한다. 개경의 가구를 세 길로 나누고 각 길마다 채루자(彩樓子)로 『반야경(般若經)』을 메고 앞서 가게 하고, 승도들은 법복(法服)을 갖추어 걸어가면서 경전을 독송하였고, 감압관(監押官)도 공복(公服)을 입고 보행으로 따라가면서 가구를 순행하였다고 한다. 이 행사는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으로 경행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상례로 삼아 설행하였다고 한다.226) 1106년(예종 1)에는 나라에서 가구경행을 성대하게 행하였는데, 5부의 인민들이 이를 본받아 각각 저희들의 촌리(村里)에서 걸으면서 독경하였다고 한다.227) 예종 때의 가구경행은 비를 빌기 위한 행사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이러한 가구경행이 매우 성행하였다는 점과 일반 백성도 행하였다는 점이다. 예종대의 기록에는 개경에 거주하는 5부민(五部民)이 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형태의 가구경행은 각 지방에서도 설행되었다.

한편, 전경회는 회경전이나 천성전(天成殿) 등 주로 궐내에서 자주 개설 되는 행사였다. 경행이 개경이나 지방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거행되는 행사였다면 전경회의 목적은 주로 종묘사직의 편안과 나라의 태평이었다. 이러한 전경회는 한번 개설되면 며칠씩 도량이 열리곤 하였는데 6주 동안이나 계속되기도 하였다.

<회경전터>   
고려 궁궐의 정전이 있던 곳이다. 원래 회경전이라고 불렸으나 뒤에 승경전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는 각종 국가 행사를 비롯하여 전경회와 같은 국가 불교 의례도 열렸다.
[필자] 강호선
215)한국 생활사 박물관 편찬 위원회, 『한국 생활사 박물관』 07-고려 생활관 1─, 사계절 출판사, 2002, 39쪽.
216)허흥식 편저, 「이천마애반가상명(利川磨崖半跏像銘)」,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중세 상, 아세아문화사, 1984, 428∼429쪽.
217)이태진, 「예천 개심사 석탑기의 분석」, 『역사학보』 53·54, 역사학회, 1972.
218)『고려사』 권85, 지(志)39, 형법(刑法)2, 금령(禁令), 인종 9년 6월.
219)채웅석, 『고려시대의 국가와 지방 사회』,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300쪽.
220)허흥식 편저, 「지대사년명동종(至大四年銘銅鐘)」,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아세아문화사, 1984, 1108쪽.
221)편집부, 『고려시대의 불화』 해설편, 시공사, 1997, 80∼81쪽.
222)허흥식 편저, 「송림사향완(松林寺香琓)」,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아세아문화사, 1984, 1157쪽.
223)『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충숙왕 후8년 5월.
224)『고려사』 권36, 세가36, 충혜왕 후3년 6월.
225)『고려사절요』 권4, 문종 원년 정월.
226)『고려사』 권6, 세가6, 정종 12년 3월 신축.
227)『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 원년 6월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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