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5장 붓그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3. 월경의 관리법

조선 부인들이 쓰시는 것

‘달거리’, ‘몸엣것을 한다’는 말은 월경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일제 강점기의 신문, 잡지에는 월경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고 있다. 근래에는 생리라는 말을 흔히 쓰고 있는데, 생리 현상이라는 차원에서 간접적으로 둘러서 말하던 것이 굳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우리가 흔히 ‘생리대’라고 부르는 것을, 일제 강점기 신문, 잡지 등에서는 ‘월경대’라고 표현하였다. 서울 인근에서는 ‘개짐’이라고, 충청도·경상도 인근에서는 ‘서답’, ‘달거리포’라고 불렸다.378)

(생리대) 끈을 달아 가지고 양쪽 보래기를 기다랗게 꼬매 가지고 양쪽에다가 고리를 달잖아. 그거를 삶아서 뚜드려 가지고 찌(삶아) 가지고 막 줄에다가 널어놓으면 며칠씩 말려야지, 안 말라요. 오래 말리지. 두꺼워 가지고, 척척척척. 그런데 (생리대 천이) 촌으로는 귀했지만은, 나는 상주읍에서 커 가지고 뭐 수건이고 귀하고 없고 이래 보질 안 했어. 우리 집에는 수건도 흔했고, 그런 것도 만드는 것도 이엽으로, 다 좋은 거 끊어 가지고 한 땀 만들어서 했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가제(gauze)라고 아(이) 기저귀, 그런 걸로 하고 그랬지. 그거를 이엽이라고 일본말로 가제라고 했지. 난 상주읍에서 클 때는 그런 거 안 봤어. 시집 와 가지고 하도 없어 가지고 그랬지. 난 그런 거 모르고 살았어.379)(최옥자 구술)

(생리는) 열네 살에. 보통이지 뭐. 그건 뭐, ‘어느 때가 되면은 그런 거 한다.’ 하는 거는 언니도 있고 집안에 여자들이 더러 있으니깐 그런가보다 하고, 어머니가 챙겨 주면 그걸 하는 걸로 하고 그랬지. 생리대가 뭐 있어. 왜 가제 같은 거, 기저귀 하는 수건. 그거지. 그런 거 딱딱 접어 가지고 그렇게 맸어. 그것만 하면은 챙피하고 처음에는 막 죽겠고 학교도 못 가겠고. 참 그렇더라고. 천은 두꺼워. 앞에(는) 많이 대고, 뒤는 조금 얇게 하 고. 그렇게 했어. 또 안에다 더 대 가지고. 학교 갈 때 그렇게 해 가지고 가는 데, 아이구 살은 상(像)도 아니야 죽은 상(像)이지. 죽상이 돼 가지고 가는 거지. 하하.380)(박현선 구술)

70대 할머니들의 구술을 들어 보면, 네모진 천의 양쪽 모서리에 고리를 달아 끈을 끼워, 착착 접은 천을 몸에 고정시켰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몇 개씩 만들어 준 것을 썼다고 한다. 앞의 구술에서는 면·가제 같은 천이 등장하는데, 베도 많이 썼다고 한다. 베는 면처럼 뻣뻣하게 굳는 것이 덜하고 조물조물 빨면 잘 지워졌다고 한다.

<월경대의 여러 모양>   
옷감을 길고 넓적하게 접어 사각형을 만든 다음 양쪽을 무명실로 꿰매어 고정한 것이다.
<월경대의 여러 모양>   
<월경대의 여러 모양>   
옷감을 생긴 대로 접었을 때 길이가 짧을 경우 양쪽을 모아 대각선으로 접은 다음 뾰족하고 길게 남은 끝부분을 접어 꿰맨 것이다.
<월경대의 여러 모양>   
접은 천 사이에 솜을 두어 누빈 것이다.

이렇게 월경대는 어머니가 딸에게 만들어 주고, 세탁법·간수법 등 경험적 지혜인 동시에 ‘감추어야 할 것’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의학적 위생상의 맥락에서 월경 처리법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월경을 헌 천이나 헌 솜 조각으로 처리하던 예전의 방식은 위험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세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청결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 자체에 대한 더러움이 아니라, ‘외부 세균의 침입’을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월후대 광고>   
『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 27일자에 실린 광고이다. 당시 월경대는 천을 몸에 고정시키는 고정 띠의 형태였다.

탈지면이나 가제, 또는 깨끗한 종이를 삽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면서, “가제 같은 것을 삽입하는 것은 절대로 금하고”, 깨끗한 손으로 “살균한 탈지면, 가제를 외음부에 대고 정자대(丁字帶)로 매어 두는 것”이 대안으로 등장하였다.381) 질 안에 넣는 방식이 아닌 외음부에 덧대는 방식이 강조되었다. 일본에서는 몸에 고정시키는 형태의 월경대 상품이 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착용감이나 생활상의 편리함이 아닌, 위생 의학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다.

질 안에 솜이나 종이를 넣는 습관은 나와야 할 피가 ‘맥혀서 썩어 가거나, 처녀막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서는 외부에 탈지면, 가제를 대고, 그 위에 월경대 혹은 정자대를 매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 시기 월경대는 천을 몸에 딱 붙게 고정시키는 띠의 형태가 많았다. 정자대는 정(丁) 자 모양의 띠 형태였다. 월경대는 2∼3시간마다 바꿔 주는 것이 좋고 “조선 부인들이 쓰시는 것은 넘우 뻣뻣한 것인고로 그러한 방법은 조흐나 그 부분의 피부를 상케할 념려가 잇습니다.”라고 하였다.382) 굵은 베는 뻣뻣하며, 빨아서 다시 쓰는 것은 ‘불결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월경할 때에는 소독한 솜을 쓰고 곧 버리는 것이 ‘깨끗한 것’이었고, 끈을 꼭 맬 경우 피가 순환되지 않으니 주의하라고 하였다.383) ‘낡아서 부드럽게 된’ 천을 사용하는 경험적 지혜는 ‘낡아서 더러워 진’ 것을 사용하는 비위생적인 태도로 비난받았다.

<월경대 광고>   
『신여성』 1931년 10월호에 실린 광고이다. 조선복, 일본복, 서양복에 모두 적당하다는 이 월경대는 경성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에서도 판매하였다

‘외부 세균의 침입’에 대한 우려는 이른바 청결 유지를 위한 다양한 생활 태도를 제시하였다. 요즘처럼 속옷이 몸에 밀착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천에 끈을 달아 몸에 고정시켰다. “의복, 대(帶), 속곳 등을 단단히 매면 답답하고 속이 편치 아늘 뿐 아니라, 위생에도 심히 불량하다.”고 지적되었다. 또한 월경 시의 ‘불결함’이 강조되어, “국부를 온하게 하며 이를 청결하게 함은 무엇보다 긴절하다.”384)는 것이다. 이른바 월경 섭생법은 월경 중에는 국부를 씻되, 질 내를 씻지 말 것, 전신욕을 하면 월경 과다가 될 수 있고, 질 내에 이물질이 들어갈 염려도 있고 감기에 쉽게 걸리기 때문에 전신욕을 피하라는 것이었다.385)

[필자] 김미현
378)조희진, 『선비와 피어싱』, 동아시아, 1998.
379)구술 권명환·면담 박정애, 「시어머니와 며느리, 권명완, 최옥자」, 『한국 여성 인물사』 1, 숙명 여자 대학교 출판부, 2004. 최옥자 1929년 경상북도 상주시 출생. 1946년 결혼.
380)구술 박현선·면담 박정애, 「여교사 박현선」, 『한국 여성 인물사』 1, 숙명 여자 대학교 출판부, 2004. / 박현선 1923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1929년 봉래 소학교 입학. 1935년 진주 일신 여자 고등 보통학교 입학. 1939년 숙명 여자 전문학교 기예과 1기 입학.
381)『조선일보』 1933년 2월 5일자.
382)『조선일보』 1927년 8월 26일자.
383)『중외일보』 1928년 4월 7일자.
384)우곡생, 「월경론」, 『여성계』 3호, 1918년 9월호, 50쪽.
385)여의사 운대(雲壹) 길정희, 「월경과 위생」, 『여성지우』 1권 2호, 192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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