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를 내면서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의 무기와 무예가 어떻게 변화·발전하였는가를 다루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무기 발달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주로 전문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또 무기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들 무기가 우리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무예 연구도 예외가 아니다. 무예는 무기에 비해 연구도 미미한 편이며, 연구의 초점도 대부분 무예의 기술적 측면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따라서 무기와 무예를 우리 역사의 중심에 놓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필자들이 우리나라의 무기와 무예를 자체의 기능과 흐름만으로 설명하기보다 종합사(綜合史)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동시에 무기와 무예를 하나의 문화사(文化史)와 관련하여 다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이 우리나라의 무기와 무예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무기는 한마디로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이다. 본래 무기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뜻하지 않은 위험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는 데 썼다. 그러던 것이 국가 성립과 민족 형성 이후에는 국가의 안전과 민족의 평화를 지킬 목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따라서 각 국가들은 우수한 무기를 만들고 개발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우수한 무기의 보유 여부는 전쟁에서 대규모의 병력, 장수의 뛰어난 지휘력, 잘 훈련된 군대 못지않게 승패를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었다.

무기는 크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나눌 수 있다. 공격용 무기는 적의 전투력과 전투 기재(戰鬪機材)를 파괴하는 데 쓰는 무기를 말한다. 여기에는 쏘는 무기인 궁시(弓矢)·쇠뇌(弩) 등과 베는 무기인 검(劍)·도(刀), 찌르는 무기인 철창(鐵槍), 걸어 당기는 무기인 철구(鐵句)·유자이기(有刺利器)·쇠낫(鐵鎌), 내려치는 무기인 쇠도끼(鐵斧) 등이 있었다. 방어용 무기는 적의 공격을 방호(防護)하는 무기를 말한다. 여기에는 갑옷(甲)과 투구(冑)·방패(防牌) 등이 있었다. 그러나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만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군대의 전투 행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통신 기재, 수송 기재, 군마(軍馬), 군기(軍旗), 군악기(軍樂器) 등이 있어야 한다.

무예란 개인의 체력을 단련하고 국방에 이바지하기 위해 맨손(徒手)이나 활·검·창 등의 여러 무기를 가지고 일정한 수련 체계를 통해 기량을 갈고 닦는 행위를 가리킨다. 요컨대 무예는 흔히 병기나 무력을 이용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와 겨루는 기예 또는 기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무예는 국가 방어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예는 개인의 완력은 물론이고 병기를 다루는 기술을 포함한 모든 전투 능력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무예는 개인의 무인적 자질과 능력을 나타내 주는 수단인 동시에 군사적 능력 내지는 국방력의 근간이 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무예와 무기의 발달은 오랜 기간 동안 그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기와 무예는 전쟁을 전제로 발달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어느 전쟁학자의 말처럼, 인류는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무기와 무예는 발달하였다. 무기와 무예가 발달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 전쟁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적대적 그룹이 군대를 이용하여 평등하게 투쟁할 수 있게 하는 법적 상태를 가리킨다. 집단과 집단 간의 생존을 건 싸움인 전쟁은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느끼게 한다. 전쟁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을 인간 최후의 불행으로 여겼으며, 전쟁을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손자(孫子)는 “전쟁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다. 전쟁터는 병사들의 생사가 달려 있는 곳이며,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길이므로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 현명한 군주는 전쟁을 신중히 결정하고, 우량한 장수는 전쟁을 경계한다. 이것이 국가를 안전하게 하며, 군대를 완전하게 유지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길이다.”고 하였다. 전쟁의 승패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우수한 무기의 제조와 개발은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신중히 결정해야 할 사안이며, 동시에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 점은 우리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한민족은 역사 기록상 931회의 침입을 받아 왔다.”라는 주장도 우리 역사상 전쟁이 많았음을 강조한 것이라 이해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쟁만도 가까이는 1950년에 일어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25 전쟁으로부터 멀리는 기원전 300년경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여 벌어진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역사상 규모가 제법 컸던 전쟁 혹은 전투만 꼽아 보아도 삼국시대의 살 수대첩·안시성 전투·황산벌 전투·매소성 전투, 고려시대의 거란과의 전쟁·여진 정벌·삼별초 항쟁·왜구와 홍건적의 격퇴·쓰시마(對馬島) 정벌,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일제 강점기의 의병 전쟁·독립군 전쟁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들 전쟁은 분명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고, 우리나라의 무기와 무예는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변화·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역사는 전쟁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결국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전쟁의 원인은 대체적으로 정치 세력이나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모험주의자나 전쟁주의자의 출현으로 전쟁이 일어난 때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평소 전쟁에 대비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전쟁에 잘 대비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우수한 무기를 제조·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에서 상대를 제압하려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군사적 능력 내지는 국방력의 근간이 되었던 무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무예를 연마한 군사는 전쟁에서 요구되는 체력은 물론이며 전투 면에서도 우세하였다. 따라서 무예는 군사 훈련과도 관련이 깊었다.

실제 우리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삼국시대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원을 전후하여 고구려·백제·신라가 주변 소국을 정복해 나가면서 고대 국가를 형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전쟁이었다. 고대 국가를 형성한 후 4세기 이후에는 영토 확장을 위한 삼국 간의 쟁패 과정 또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7세기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원(中原)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의 정복에 나서면서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삼국시대의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었다. 삼국 통일 전쟁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따라서 강한 전력, 즉 잘 훈련된 군대와 우수한 무기가 없이는 국가를 수호할 수 없었던 까닭에 삼국은 제각기 무기 제작에 국력을 경주하였다.

고대의 전투에서 주력 무기는 창·도검·도끼·활이었다. 이 가운데 창은 병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창은 창날을 자루에 끼울 때 창날 아래의 슴베를 장대에 꼽는 창(槍)과 투겁의 구멍에 창대를 삽입하는 모(鉾)가 있다. 삼국시대의 창은 투겁창이 다수를 차지한다. 또 투겁창과 꺾창(戈)을 합한 모양으로 두 창의 찌르기와 찍거나 끌어 당기는 기능을 아울러 할 수 있는 극(戟)도 있었다. 삼국시대의 도검은 양날칼인 검이 초기에 한때 유행하였지만, 2세기부터는 줄곧 외날 칼인 도가 유행하였다. 형태상 칼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부착된 환두대도(環頭大刀)가 그것이다. 둥근 고리 안에는 잎사귀 두 잎 혹은 세 잎 문양 혹은 용과 봉황문이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장식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도끼 또한 전투용으로 사용하였던 무기였다. 도끼 몸통에 날 방향과 평행하는 자루 구멍을 뚫어 그곳에 자루를 끼우게 되어 있었다. 횡공부(橫孔斧)인 이러한 형태의 도끼는 안악 3호분 행렬도, 약수리 고분 행렬도 등에서 보이며, 실제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다. 활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우수한 성능의 활을 보유하였다. 이는 고대 문헌에서 한중일(韓中日) 삼국의 무기를 평가하면서 중국의 창, 일본의 칼, 조선의 활이라 기록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기마전(騎馬戰)과 수성전(守城戰)을 위주로 하는 전쟁 방식이 주를 이루었던 데에 있다. 또한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산재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의 무예로는 쌍검술, 활쏘기, 기사술, 축국, 그리고 수박(手搏)과 씨름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삼국시대에 가장 성행하던 무예는 기사술(騎射術)이었다. 기사술은 말타기와 활쏘기가 결합된 복합 무예이다. 기마전이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던 삼국시대의 전장에서 기사술로 중요한 전투 를 수행하였다. 궁수가 안장에 앉은 채 상체만 뒤로 틀어 돌려 활을 쏘는 ‘파르티안 샷(Phartian Shot)’의 기사술은 무용총 수렵도에 잘 그려져 있다. 수박은 주로 손을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맨손(徒手) 무예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수박도가 보이고 있어 4∼5세기경에 이미 수박이 성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씨름은 장천 1호분과 각저총 같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삼국시대에 무예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는 무기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였다. 고대 무기의 기본이었던 창·활·칼이 고려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실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사용한 무기도 창·활·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고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어 여진 정벌 과정에서 기병 중심의 무기를 강화하였으며, 이후 무예 진흥책을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무예도 무기와 마찬가지로 삼국의 것을 계승하여 활쏘기·수박 등이 유행하였으며, 격구(擊毬)도 무예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격구는 고려 예종대에 시행된 것으로 보이나, 의종대에는 크게 성행하였다. 의종은 격구를 관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격구를 즐겨서 대간(臺諫)에서 문제를 삼을 정도였다. 고려시대에 성행한 또 하나의 무예는 수박이었다. 수박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전통 무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로부터 계승되었다. 수박은 두 사람이 손 또는 주먹으로 힘을 겨루는 무예였는데, 병법의 하나로 익혔다. 고려 귀족 사회를 뒤엎었던 1170년(의종 24)의 무신난도 수박희(手搏戲)를 하던중에 일어났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행차하기 전에 주연을 열고 무신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였는데, 오병수박희가 도화선이 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고려시대 무기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일종의 기계식 활인 쇠뇌(弩)의 개발에 주력하였다는 점이다. 쇠뇌는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화살을 쏘는 활의 일종이다. 한마디로 기계식 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쇠뇌는 전통적인 활에 비해 개선된 무기인 것이다. 쇠뇌는 나무로 된 활 틀과 발사 장치인 노기(弩機)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기는 시위 걸개·방아쇠 멈추개·방아쇠로 구성되어 있다. 쇠뇌는 활에 비해 명중률이 대단히 높았고, 엄폐된 곳에서 운용할 수 있어 방어에도 유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폐된 곳의 구멍을 통해 언제라도 사격이 가능하여 공격에도 유용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삼국의 쇠뇌를 계승하여 좀 더 성능을 강력하게 발전시켰으며, 쇠뇌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부대를 설치하였다.

고려는 1231년(고종 18) 8월 몽고의 침략을 받았다. 이로부터 40년 동안 고려와 몽고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몽고는 기동력과 인내·끈기를 바탕으로 매우 우수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몽고군은 전체 병력의 60% 정도가 경무장 전사(가죽 투구)였으며, 이들은 소형의 활, 단창, 칼, 도끼를 사용하였다. 성곽 전투가 많았던 고려와의 전쟁에서 몽고는 여러 종류의 공성 장비를 이용하였다. 몽고의 1차 침입 때 벌어진 귀주성(龜州城) 전투에서 몽고군은 누거(樓車)·목상(木床)·발석차(拔石車)·운제(雲梯) 등의 공성용 무기를 사용하였다. 이때 고려의 박서(朴犀) 장군은 대우포(大于浦)로 운제를 격파하여 몽고군을 물리쳤으나 대몽 항전에서 고려는 기본적으로 청야입보(淸野入堡) 전술을 썼다. 이는 고려의 종심(縱深) 깊은 지형상의 특성을 이용한 방어 전략으로 양계(兩界)의 진(鎭) 중심 방어선이 무너진다 하여도 적군의 진출로 근처의 모든 지역은 해당 지역에 분산 설치되어 있는 산성으로 들어감으로써 항전을 계속하여 적의 병참선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이다. 적이 병참선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도록 고려군이 산성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들판에 있는 먹을 것을 모두 태우거나 없애버렸다. 유목 민족인 몽고군이 기병 중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취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군인들은 근접전에서 도검과 창을 많이 썼다. 특히 성곽 위주의 요새전이나 북방 기마 민족을 상대하기에는 다른 무기류보다 꺾창과 투겁창이 효과적이었다. 꺾창은 다른 병기와 달라 찍거나 긁어내릴 수 있으며, 투겁창 역시 예리한 칼날을 이용하는 장병기(長兵器)라는 점에서 기병전에 효과적이었다. 활 또한 장거리 전투에서 유리하였다. 1232년(고종 19) 12월 처인성 전투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는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였다. 이는 바로 궁시(弓矢)로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였다.

고려 말에는 무기 체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약과 화약 병기를 자체적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어 많은 화약 병기를 만들었다. 바로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화약 병기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이처럼 자체 제작한 화약 병기로 연안 지방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조선은 부국강병을 최상의 과제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무예도 군사 선발과 훈련으로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무예는 대열(大閱), 강무(講武), 격구, 모구(毛毬), 창술(槍術), 석전희(石戰戲), 격검(擊劍), 씨름, 달리기 등이 있었다. 대열은 국왕이 친림한 가운데 군사를 모아 행하는 대규모 군사 훈련으로 일종의 열병식이었다. 열병식이 끝나면 활쏘기와 창쓰기와 기병 무예를 시험하였다. 강무는 국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일정 지역에 출동하여 그 지역에서 사냥하는 일종의 동원 훈련이었으며, 모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로 털 공을 맞추는 무예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화약 병기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활쏘기는 여전히 강조되었다. 활쏘기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인 동시에 전투 시 화약 병기를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은 고려 말에 개발된 화약 병기를 더욱 발달시켰다. 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황자총통(黃字銃筒)·총통완구(銃筒碗口)·삼총통(三銃筒)·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세총통(細銃筒)·신기전(神機箭)을 개발하여 명실상부한 화약 병기 시대를 열었다. 세종 때에 개발한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으로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화약 병기 개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 전기 화약 병기 개발의 결정체는 1451년(문종 원년)에 만든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였다. 이 화차는 100발의 신기전을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실제 성종 때 여진 정벌 과정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진격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화차가 활용되었고,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도 권율(權慄)이 화차 40량을 운용하여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던 전황을 극복하고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이 과정에서 화차에 탑재되는 화기도 성능이 우수한 최신의 화기로 대체되었다. 성종대에는 화차에 탑재되는 사전총통 대신 주자총통(宙字銃筒) 50정을 탑재하였고, 선조대에는 승자총통(勝字銃筒)을 탑재하였다. 화차는 오늘날의 다연장 로켓과 유사하여 재래식 야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지역을 일거에 초토화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일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하였다고 할지라도 무기 제조를 누구에게나 열어 놓을 수는 없었다. 창끝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왕조의 존폐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왕조 정부가 무기의 제조와 개발을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무기를 만들 수 없도록 끊임없이 제한하였다. 특히 뛰어난 화약 병기가 개발되면서 이러한 우려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 즉 단종대부터 화약 병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 고, 군사 무예로서 개인 무예도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들 무예는 민간으로 이어졌다.

조총(鳥銃)의 전래는 조선의 무기 체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조총은 기존 총통류와 달리 격발 장치가 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龍頭)에 끼워져 있는 화승(火繩)이 화약에 불을 붙여 줌으로써 탄환이 발사되는 화승식 소총이었다. 우수한 성능을 지닌 조총이었지만 화승식이어서 비가 올 때 사용할 없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총의 우수성을 경험한 조선은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일본 병사인 항왜(降倭)를 동원하여 조총 제작 기술을 알아내고, 노획한 조총을 분석하여 시험 제작하였다. 아울러 명나라 군대를 통하여 좀 더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배우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조총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제조 기술이 교묘한 조총의 총신을 만들기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꾸준히 조총을 연구 제조하여 인조대에는 조선에서 만든 조총이 일본제보다 성능이 훨씬 우수한 단계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얻은 조선의 무예와 무기에 대한 인식은 단병 전술을 통한 단병기(短兵器)의 개발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하여도 병사 개개인의 무예보다는 진법 훈련을 통한 병사들의 전투력을 우선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무기는 우리식에 맞게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오늘날 지뢰와 비슷한 파진포(破陣砲)를 비롯하여 50개의 조총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병거(兵車)를 개발하였다. 이어 18세기는 홍이포(紅夷砲)와 천보총(千步砲)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인조반정은 군사권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하는데 결정적 계기였고, 이후 부진하던 무기와 무예 개발에 대한 노력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인조는 단병 기예의 훈련을 어영청(御營廳) 등에도 확대하도록 훈련도감(訓鍊都監) 교사의 차출을 권장하였다. 이후 효종은 북벌(北伐)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활과 화살을 재평가하였다. 신식 무기인 화포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재래 무기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중시한 것이다. 이는 청나라의 무기가 재래식이고, 전장이 만주 평야 지대인 점을 고려한 조치였다. 더불어 보병은 장병검, 기병은 단병검으로 대체하여 청나라의 도검류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사법(射法)과 검법(劍法) 개선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한 예가 적군과 접전할 때 칼이 손에서 떨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의 손잡이에 줄을 매달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당시 조선의 화포 부대가 최강의 전력이었지만, 폭풍우가 칠 때면 화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던 점을 개선하여 수어청(守禦廳)의 화포수와 사수를 반반으로 혼합 편성한 전천후의 사포 참반대(射砲參半隊)를 재편성하였다. 효종은 북벌전이 만주 평원전이 될 것을 예상하여 그 대비책으로 금군을 친위 기병대로 개편하고, 창덕궁에 전용 기사장(騎射場)을 마련하여 위사(衛士)들에게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연마시켰다. 이때 취한 무기 체계는 화포, 궁시, 기사 등 장병기 중심으로서 이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1759년(영조 35)에 사도 세자가 『무예신보(武藝新譜)』를 간행하면서부터이다. 『무예신보』는 단병기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를 보완한 것이다. 영조 때의 단병기에 대한 관심은 도성 사수론(都城死守論)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영조는 도성 사수를 천명하고 이를 위한 군비 개선으로 무기 체계를 정리하였다. 이에 따라 도성 사수론에서 제기된 근접전을 상정하였다. 영조를 이은 정조는 요새화된 군사 도시인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壯勇營)을 통한 수성을 구상하였다. 아울러 국왕 호위를 위해서는 화약 병기뿐만 아니라 단병기 무예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정조는 정기적으로 대열(大閱) 등을 통하여 이를 시험하거나 장려하는 실전 무기 개발과 무예 장려책을 펼쳤다. 1790년(정조 14)에 발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한 많은 표준 무예서를 보급하였다.

19세기 조선은 국권 수호를 위하여 다시 무기에 눈을 돌렸다. 1810년(순조 10)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과 구미 열강의 침탈로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무기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을 진압할 때 사용한 무기는 조총, 삼혈총(三穴銃), 호준포(虎蹲砲), 대완구(大碗口), 완구(碗口), 백자총(百子銃), 천(天)·지(地)·현자총(玄字銃), 불랑기(佛狼機), 대장군전(大將軍箭), 석류화전(石硫火箭), 창(槍), 윤제(輪梯), 각종 궁시류 및 탄환류 등이었다. 이들 무기는 주로 조선에서 자체 개발한 것이었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여 그대로 활용하거나 조선의 현실에 맞게 개량한 것도 있었다.

병인양요는 조선이 프랑스인 선교사를 처형한 사실을 빌미로 삼아 1866년 10월 프랑스가 극동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도와 한강 수로 입구를 점령한 데에서 비롯된 조선·프랑스 양국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다. 당시 구식 화승총인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이미 1840년경부터 뇌홍 뇌관(雷汞雷管)을 격침으로 때려서 발화하는 뇌관 격발식(雷管激發式)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병인양요는 무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 점은 신미양요도 마찬가지였다.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4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구실로 삼아 아시아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 해협으로 진입시킨 데에서 비롯된 조선과 미국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다. 이때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한 다섯 척의 군함에 타고 온 미군은 플리머스(Plymouth) 총, 스프링필드(Springfield) 소총 또는 레밍턴(Remington) 후장식(後裝式) 소총으로 무장하였고, 포병대와 장교는 단도와 레밍턴 연발 권총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이끄는 광성진의 조선군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였으나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완패하였다.

19세기의 무기에 대한 관심은 병서(兵書)의 간행으로 나타났다. 전통 무기 운용 방식의 계승을 역설한 박종경(朴宗慶)이 『융원필비(戎垣必備)』를 편찬한 직접적인 동기는 홍경래의 난이었다. 그는 이때 훈련대장에 재직하면서 군대를 점검하고 관련 장부를 검토해 보고 국가의 외란(外亂)과 내치(內治)에 대한 대비책이 소홀함을 절실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당시에 제작한 무기의 형태, 제원, 제작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외국의 병서를 수입·응용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해국도지(海國圖志)』이다. 청나라 위원(魏源)은 아편 전쟁의 패배를 직접 체험하고서 국가의 자강과 발전을 위해서 『해국도지』를 저술하였다. 위원은 해상을 통해 침범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서양의 문물을 수입해야 함을 역설하였고, 서양의 우수한 국방력이 전함, 화기, 군대 양성과 훈련임을 강조하였다. 이를 조선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해국도지』에는 전선, 화륜선(火輪船), 각종 대포, 대포 사용 시의 측량 방법, 화기 소총, 수뢰포(水雷砲), 서양의 포대 등에 대해서 설명문과 함께 자세한 그림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또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과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은 『융원필비』와 『해국도지』를 대본으로 간행된 것이었다. 이들 병서의 편찬은 결국 기존 무기를 좀 더 효율적이고 집약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수한 무기에 대한 생각은 병서의 재발견에 머무르지 않았다. 신식 무기와 신식 군대를 갖추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는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의 체결 이후 서구 문물제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더욱 절실하였 다. 마침내 1880년(고종 17) 무비자강책(武備自强策)을 마련하고자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유학생들은 화약, 탄약의 제조법뿐만 아니라 전기, 화약, 제도, 제련, 기초 기계학까지 학습하였다. 아울러 1881년 4월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설치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가 당면한 ‘부국강병’을 이루어 가는 조치였다. 부국강병의 추진은 교련병대의 설치와 더불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0.12)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1881.1), 영선사 파견(1881. 윤7)이었다.

대한제국기에서 독립 운동기에 이르는 기간은 자강과 독립을 위해서 우수한 무기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대한제국은 군사 장비를 제조하는 기술을 배워 자체 제작하려는 노력보다는 완제품 장비를 직수입하여 이용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소총, 육혈포(六穴砲, 권총), 군도(軍刀), 권총탄, 맥심포(麥沁砲), 야전포(野戰砲), 산전포(山戰砲), 회선포(回旋砲) 등을 수입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3,435톤 규모의 군함인 ‘양무호(洋務號)’도 도입하였다.

일제의 침탈에 대항해 일어난 의병 전쟁은 신무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였다. 1896년 제1차 의병 전쟁 당시 의병의 무기는 매우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군은 죽창(竹槍), 화승총, 천보총 등과 같은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반면에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Snider rifle)과 무라다 소총(村田小銃) 같은 세계적 수준의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1906년 제2차 의병 전쟁 때에도 의병 부대는 칼, 창, 화승총 등 재래식 무기를 주로 소지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38식 소총, 기관총 등을 사용하였다. 사용 무기만을 놓고 보더라도 의병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후 독립군에게 무기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투철한 정신과 고양된 사기 외에도 현실적 조건으로 군비 조달, 무기 구입, 군사 훈련 등과 같은 전력 증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총기, 탄약 등의 화력 증강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만주 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중 시베리아에 출병한 체코 군대에게 구입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소요된 자금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국내 동포가 헌납한 군자금이었다.

독립군이 보유한 무기는 실로 다양하였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밖에도 미국제나 독일제 심지어 일제까지 섞여 있었다. 권총류로는 루가식(Luger式)을 비롯해 7연발식·남부식 등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무기로는 기관총과 속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폭탄이라 부르던 수류탄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일제는 조선인들이 무예를 익혀 그들에게 저항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무예의 수련과 계승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따라서 상무적인 무예나 놀이는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예는 민간에서 알게 모르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태껸이다. 수벽치기는 주로 군사 무예로 발달하다가 근대식 군제와 무기 체제의 도입, 군대 해산을 계기로 단절된 반면에 태껸은 주로 놀이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므로 일본의 무술에서 스포츠로 발전한 유도, 검도 등의 확산 속에서도 면면히 명맥을 이어 왔다. 더욱이 황국 식민화 정책을 통해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한편 씨름과 활쏘기는 무예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고 민속적인 경기로 발전하였다.

전쟁이 잦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무기와 무예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가가 위태로울 때 그 중요성은 더 크게 인식되었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대체적으로 전통 시대에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전쟁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간의 세력 균형 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우호 관계가 지속될 때는 평화가 존재하지만, 평화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국가는 군대를 유지하고, 그 군대가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도록 힘썼으며, 잘 훈련된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른바 “한 번 써 먹기 위해서 백년을 준비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범세계적으로 보면 전쟁, 전쟁 상태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기존 무기 전체를 재래 무기로 만들었다. 가공할만한 핵무기의 살상력은 인류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렸다. 범세계적으로 전쟁의 예방과 억제를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이제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일종의 폭력 행위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고 국민의 생사가 걸려 있는 사안인 만큼 매우 신중해야 한다. 더욱이 오늘날의 전쟁은 그 파괴력이 과거 우리가 경험한 어느 때의 전쟁과는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8월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필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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