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4. 화약 병기 시대의 개막

우리 손으로 만든 화약 병기

고려가 화약을 자체적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은 1377년(우왕 3)의 10월의 일이었다. 1372년(공민왕 21)에 이미 화약을 사용한 기록은 있으나 화약 자체를 제조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화약을 제조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염초(焰硝)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최무선(崔茂宣, 1328∼1395)의 노력으로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무선은 1328년(충숙왕 15)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무선이 살았던 때는 왜구의 침탈이 컸던 시기였다. 그가 화약과 화약 무기 개발에 골몰하였던 것은 왜구로 인한 피해상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미 화약을 중국에서 수입해다가 쓰고 있었지만, 최무선처럼 국산화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무선은 화약 제작소를 차려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왜구를 소탕하는 데 쓰기 위해서였다.144)

최무선은 어떻게 화약을 제조할 수 있었을까?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0월 처음으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판사 최무선의 건의에 의한 것이다. 최무선이 원나라 화약 제조 기술자 이원(李元)과 한 동네에 살면서 대우를 잘 해준 다음 그에게 은근히 화약 제조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에게 이를 전습시켜 시험해 본 다음 마침내 나라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한 것이다.”145)

『태조실록』에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최무선은)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국내에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만나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한 상인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한 끝에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의 이름은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냈다.146)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염초를 굽는 비밀을 알아낸 데 있었다. 염초 굽는 비밀을 알아내려 하였던 것은 수전에서 화공(火攻) 작전을 구사하려는 것이었다. 염초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최무선이 잘 대해 준 원나라의 이원이 바로 염초 굽는 장인(匠人)이었다. 최무선은 이원에게 은밀히 염초 굽는 기술을 물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염초를 구웠다. 또 중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을 만들게 하고 최무선이 직접 감독하였던 것이다.147) 한마디로 최무선은 왜구 격퇴를 위하여 화공 전술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과 화약 병기를 제조하고 나아가 전함까지도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 최무선은 1380년(우왕 6)의 진포(鎭浦) 해전과 1383년(우왕 9) 관음포(觀音浦) 해전에서 자신이 개발한 화약 병기로 왜구를 크게 격퇴시켰다.

최무선은 화약 제련과 화포 제작에 평생을 받쳤다. 훗날 그가 임종할 때 부인에게 “아들이 장성하거든 주라.”고 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 『용화포섬적도(用火砲殲賊圖)』 등이 그것이다. 책의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화약수련법』은 화약 제조에 대한 것이며, 『화포법』은 화약 병기인 화포 제작 방법에 대한 서적일 것이다. 『용화포섬적도』는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섬멸하는 것을 그린 그림으로 화약 병기의 우수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부인은 이를 잘 감추어 두었다가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 열다섯 살이 되자 내주었다고 한다.148) 최해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약·화기의 전문가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는 어떠한 것일까? 고려 말 최무선이 제작한 화기는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피령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유화·주화·촉천화 등이다.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질려포 등은 발사 무기로서 적의 성루·성문·성벽·배·공성 장비 등을 타격하고 파괴하는 데 쓰던 화기로 보인다. 이 가운데 대장군포는 화기 발사 전문 부대라 여겨지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의 대표적인 화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포는 철촉이 달린 나무로 된 대형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육화석포는 조선시대의 완구와 유사한 화기로 둥근 돌로 만든 포환을 발사하는 무기로 보인다. 질려포는 속이 빈 둥근 나무통과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통 안에 지화통과 소발화통을 나란히 넣고 그 둘레에 화약을 채워 넣었다. 화약 위에는 작은 철 조각들을 넣고, 그 위에 쑥 잎을 채웠다. 질려포는 폭발할 때 마름쇠가 날아가 인마(人馬)를 살상하는 무기이다. 신포는 신호용 화약 무기로서 발사할 때 폭발 소리와 내뿜는 불·연기 등으로 진을 치거나 성곽과 진영에서 서로 신호를 교환할 때 쓰였다.149)

화전·주화·천산오룡전·유화·촉천화 등은 화약의 힘으로 적진을 불사르거나 인마를 살상하는 무기이다. 일종의 분사식 화기인 것이다.150) 주화는 이름 그대로 날아가는 불화살이다. 이른바 로케트형 화기인 것이다. 주화의 구조나 형태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화는 말 타고 쓰는 게 편리하다. 말 탄 사람이 허리에 끼거나 화살통에 넣고 말을 달리면서 발사하면 맞은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그 광경을 보고 소리를 듣는 자는 모두 질겁한다. 밤에 쏘면 빛이 하늘을 비추므로 무엇보다도 적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 적이 숨어 있는 곳에서 쓰면 연기와 불이 흩어지면서 생기니 적이 놀라서 숨어 있지 못한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은 주화가 어떤 무기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151) 그러나 로케트형 화기라고 해서 장점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주화는 화살이 나가는 총통과 같이 곧지 못하고 총통에 비해 화약을 너무 많이 허비하는 단점이 있다.152)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붙인 다음 화살을 활에 재워 날리는 무기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왕궁의 불꽃 놀이에 화전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묻어 놓은 화전에 불을 붙이면 날아 올라가 하늘을 찌르고 요란한 소리와 유성 같은 광경이 펼쳐지며, 길게 늘인 밧줄 끝에 설치한 화전에 불을 붙이면 밧줄을 따라 화전이 날아간다.”고 묘사하고 있다.153) 이는 화전이 고려 말 왜구의 격퇴에서 얼마나 위력을 발휘하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촉천화는 명칭으로 보아 병기가 비행할 때 ‘하늘과 부딪치는 불’이라는 뜻이다. 이는 폭죽과 같이 쏘는 화약 병기였던 것 같다. 촉천화는 분사 추진식 화약 무기로 이해할 수 있다.

최무선은 화약을 제조한 뒤 화약 병기까지 만들었다. 그가 만든 화약 병기는 크게 발사기, 발사물, 폭탄, 로케트형 화기 등으로 다양하였다. 화약이 폭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화약 사이에 공기를 어떻게 있게 하여 이를 일시에 연소할 수 있도록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 병기가 요즘의 수류탄과 같은 화기는 아니었지만, 재래식 병기에만 의존하였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수십 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민심이 불안해지고 농토가 황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운(漕運)이 두절되어 국가 재정이 위협받고 있던 고려의 처지에서 화약 병기의 자체 제조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화약 병기로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 김대중
144)박재광, 「최무선」, 『한국 과학 기술 인물 12인』, 해나무, 2005.
145)『고려사』 권133, 열전46, 신우(辛禑)1, 우왕 3년 10월.
146)『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4월 임오.
147)『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화약고기(火藥庫記)』의 기록이다.
148)『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4월 임오.
149)박재광, 앞의 책, 31쪽.
150)박재광, 앞의 책, 33쪽.
151)『세종실록』 권118, 세종 29년 11월 신해.
152)채연석, 『한국 초기 화기 연구』, 일지사, 1981, 40쪽.
153)박재광,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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