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1. 부국강병의 길군사 선발을 위한 무예

무인 선발의 기본 과목, 활쏘기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벌귀족 중심의 협착한 인재 등용에서 벗어나 관리 선발의 문호를 개방하여 능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다. 조선 건국 초의 무반 등용은 취재(取才)라는 특설한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1402년(태종 2)에는 정식 무과로 시행되었다.

무과는 대체로 문과와 유사하였으나 크게 두 가지가 달랐다. 첫째, 문과는 학교 제도와 연관 속에서 운영되었으나, 무과는 학교 제도와 관련 없이 운영되었다. 이는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조선 왕조가 무인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무학 기관을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문과는 1차 시험인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 시험이 있는 반면에, 무과는 이러한 1차 시험에 해당하는 시험이 없었다. 이는 조선의 과거가 문과에 편중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1664년(현종 5) 한시각(韓時覺)이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중의 길주과시도이다. 함경도 길주에서 무과 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렸다.

무과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를 비롯하여 증광별시(增廣別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 춘당대시(春塘臺試), 외방별과(外邦別科) 등의 부정기 시험과 도시(都試)가 있었다. 도시는 서울과 지방의 군사와 문무반의 자원에 따라 봄가을에 거행한 연무 대회로 식년시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무과는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법제화되었다.

무과의 시험 과목은 크게 무예와 강서(講書) 시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무예는 활쏘기와 창을 중심으로 한 보(步)·기(騎) 무예와 격구(擊毬)로 이루어졌다. 강서는 병서와 유교 경전의 시험이다. 식년 무과의 초시는 무예만을 시험 보았다.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의 여섯 가지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궁술(弓術)과 기마술(騎馬術)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무기 체계 면에서 보면 네 종의 궁시(弓矢)와 한 종의 창으로 구성되었다.

전반적으로 궁시의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편전의 평점이 90분으로 전체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편중되어 있었다. 격구는 고려 말에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던 과목으로 문신들의 폐지 주장이 있었지만, 무예 훈련의 기초가 된다고 하여 1425년(세종 7) 4월에 채택되었다.

<길주과시도 부분>   
길주과시도 중에서 무과 시험을 생생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광경이다.

무과의 복시(覆試)는 무예와 강서를 시험 보며, 초장·중장·종장의 삼장제(三場制)로 운영하였다. 복시의 종장은 강서로 시험을 보았는데, 이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의 선발을 목적으로 한 데 있었다. 그리고 정시(廷試)는 기격구와 보격구의 성적에 따라 합격자의 등급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조선시대의 무과는 무예와 함께 병서를 통한 병략(兵略)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군사 지휘관 선발을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예의 시험 과목 역시 활쏘기와 말타기가 중심이 된 장병(長兵) 전술 위주의 무예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근접전 무예인 격검(擊劍, 칼쓰기)은 시험 과목에서 아예 제외되었으며, 창술도 비중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

또한 궁술(弓術)은 군사 훈련에서도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활쏘기는 군관들의 군사 훈련인 동시에 체력 단련이었고, 오락이며 유희이기도 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군관들끼리 편을 갈라 요즈음과 같은 단체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접한 군관들을 방문하여 원정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활은 10순(巡, 1순은 다섯 발) 단위로 쏘았는데, 20순이나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지만 하루에 10순을 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기감영도병 중 읍승정>   
19세기에 인왕산 아래 서대문 밖에 자리 잡은 경기 감영 일대의 풍경을 그린 경기감영도병(京畿監營圖屛) 중 활터인 읍승정(揖升亭) 부근이다. 읍승정에서 활을 쏘는 이들이 있고, 마당에는 관원들이 도열해 있으며, 공터에는 과녁이 다섯 개 놓여 있다. 조선시대 군사 훈련에서 궁술은 중요 포인트였으며, 활쏘기는 군사 훈련인 동시에 유희이자 오락이었다.

특히 강무가 궁술을 위주로 치러지는 것이고, 대열과 강무가 끝난 뒤 행해지는 관무재의 과목 세 가지 중에서 모구와 삼갑사도 궁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궁술이 군사 전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박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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